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요네하라 마리의 첫 집필작이라는 책을 '프라하의 소녀시대'와 '마녀의 한 다스' '미식견문록' 이후에서야 읽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줄곧 에세이스트로서의 요네하라 마리만을 접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통역사'로서의 요네하라 마리의 진면목을 실체로 만난 기분이다.

앞서 다른 책들의 독서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마녀의 한 다스'는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프라하의 소녀시대'와 '미식견문록(아껴가며 읽는 중)'의 경우에는 뚜렷이 남는다. 그건 책에 담겨 있는 정보의 양 때문인 것 같다. 정보의 양이 많은 쪽은 오랫동안 독서를 해서 잘 기억에 남지 않는 것.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녔던 저자가 이후 그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거나 찾아가면서 기억을 반추해보는 내용이다. 극히 서정적인 문체인지라 결말에서 '이런 식의 감상은 좀' 이라는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거북하지 않게 자신의 기억을 정치적-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시도에는 경탄할 수 밖에 없다. 미식견문록의 경우에는 음식과 관련된 다양한 참고 자료들과 러시아 민담, 우화가 등장하여 조금씩 아껴서 읽고 소화해서는 수다를 떠는 자리마다 하나씩 내놓고 있다.

'미녀냐 추녀냐'도 '마녀의 한 다스'처럼 정보가 무지막지하게 많이 담겨 있다. 하나하나 읽으려고 하다 보면 지친다. 그래도 지치거나 잡학지식으로 치부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는 이유는 '통역사'로서의 그녀의 체험이 글 전체를 꿰뚫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체험이 글 전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고, 집중해서 읽다 보면 이중삼중으로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이다. 러시아어를 통역한 일본 통역사의 글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고 있으면 책 안에 적어도 네 명은 들어 있는 것 같다.

소주제 역시 훌륭하다. 다룰 수 있는 건 다 다루는 것 같다. 통역과 번역의 관계 / 통역과 번역의 차이점 / 통역에서 살려야 할 것 / 통역에서 문맥의 중요성 / 궁극적인 목적인 '커뮤니케이션'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 등등. 통역사를 지향하고 있지 않더라도 언어를 쓰면서, 혹은 다른 언어를 공부하면서 살짝 엿보고 만 이문화 소통의 즐거움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러시아 공항을 200번 넘게 왔다갔다 한 저자의 통역 경험과 더불어 동료 통역사들의 다양한 경험 역시 함께 실려 있다. 몇 개는 정말 소리내어 웃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빵 터지고 만다. 물론 유머러스한 면에서는 '미식견문록'도 만만치 않지만.

번역에 관한 담론은 문학 수업을 하면서 매우 자주 접하게 되고, 교수님이 '번역이 필요한 번역'이라면서 번역자의 뼈아픈 증거물을 교탁에서 흔들어보일 때도 생각하게 되지만, 통역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 책에는 경험으로부터 스스로 통역의 원칙을 세우고 통역과 번역, 이문화 간의 차이들에 대해 끊임 없이 고민하고 연구해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혼종 문화 속에서 외국어에 대한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봤을 사람이라면 웃다가 넘어갈 유머가 철철 흐른다. 에세이스트로서도 훌륭하지만, 훌륭한 에세이가 나오는 데에는 통역사라는 확고한 직업관이 있었기 때문.

덧, '미녀냐 추녀냐'와 같은 비유가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주로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제회의나 정치연설 무역미팅과 같은 곳에서 통역했을 사람이라면 그런 농담이고 뭐고를 일상적으로 접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 글에도 종종 나온다. 그런 것도 밝게 웃어 넘기고 오히려 저쪽이 부끄러워질 정도의 센스를 겸비했던 건 정말 노련한 사람 밖에는 할 수 없는 일. 불쾌한 것을 재미있게 바꿔내는 능력은 짖꿎은 농담을 좋아하는 러시아인의 언어와 문화를 오랫동안 접해왔던 덕일지도.

귀로 듣는 것의 10%, 보는 것의 30%, 경험하는 것의 80%가 남는다고 하니 읽어보면 좋을 듯. 아, 3시간 동안 아주 먼 곳까지 다녀온 기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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