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1989년에 출판된 『Dancing at the Edge of the World: Thoughts of Words, Women, Places』 의 번역본이다. 동시에 국내 나온 작가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앞서 나온 두 권의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2017)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2016)보다 이른 시기에 쓴 글들이 묶여 있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서 점점 더 과거의 방향으로 출간되고 있는 셈이다.


책에 실린 글은 1976년부터 1988년까지의 것들이다. 이 시기는 『헤인 시리즈』, 『어스시 연대기』로 작가적 명성을 얻은 직후다. 작가의 주요 소설들이 출간된 시점을 훑어보니 이 산문집에 실린 글을 쓴 기간 동안 소설출판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 기간은 작가에게 변화의 시간이었던 듯하다. 초기에 "남성적 글쓰기의 여성 작가"라는 평을 받았던 르 귄의 페미니즘 성향이 이후 강렬해졌다. 책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SF·판타지 작가로 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수록한 글은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단순한 배치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하니 마음 변화의 연대기랄까 윤리와 정치 분위기에 대한 반응의 기록이며, 특정한 문학 개념들의 영향이 변화한 데 대한 기록이자, 생각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 되어 준다.

p.9, 들어가는 말 中


작가의 변화는 책의 형태에도 반영돼 있다. 10년간의 글을 모아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검토하면서 작가는 과거의 글을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과거와 달라진 출간 당시의 생각을 더해 자신의 변화를 독자에게 알렸다. 책에 파란색 작은 글씨로 인쇄된 글을 보면 글쓴이가 스스로에게나 독자에게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 느껴진다.


예전 글을 심하게 수정하는 건 옳지도, 현명하지도 않아 보인다. 마치 예전 글을 없애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 거쳐야 했던 길의 증거를 숨기는 것 같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 주고, 그 변화 과정을 남겨 두는 것이…… 그리고 어쩌면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껍질을 열지 않는 조개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더 페미니스트답다.

p.22


작가는 친절하게도 책에 실린 각각의 글이 지향하는 바를 첫머리에 기호로 알려주고 있다. "원하는 글을 찾고, 원치 않는 글을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작가의 '친절한' 고안물이다. ♀(여성)은 페미니즘 관련, ○(세계)는 사회적 책임 관련, □(책)은 문학과 글쓰기 관련, →(방향)은 여행과 관련된 글이다. "특정 경향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들이 피해 가"라고 남긴 표시지만 관심가는 주제에 더 주의를 기울이기 위한 표시가 될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엔 문학, 글쓰기와 관련된 □기호가 유익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대한 글들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것이었다. 르 귄의 아버지는 인류학자였고 어머니는 작가였다. 어머니 시어도라 크로버는 작가의 꿈을 자녀양육 이후로 미뤘다. 50대에 들어 글을 쓰기 시작한 어머니는 어린이 책에서 시작해 전기 소설로 르 귄보다 먼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딸은 어머니의 도전이 늦춰진 것을 아쉬워한다.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성취를 할 수 있었으리라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어머니의 책 『내륙의 고래: 시어도라 크로버의 아메리카 원주민 스토리 다시쓰기』에 붙일 서문 <시어도라>를 쓸 때 딸로서의 르 귄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너무 늦게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후회했음을 안다. 그러나 심하게 후회하지는 않았다. 시어도라는 후회하거나 남을 탓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예전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니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나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p.249


작가는 여성이 부담해야하는 이중의 노동에 주목했다. 사회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노동을 하면서 동시에 작가의 삶을 놓지 않기 위해 여성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가. 르 귄은 주부-예술가의 고됨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작가들이 쓸 수 있는 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작가는 <여자 어부의 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인 알리시아 오스트리커를 인용한다.


여자 예술가가 어머니가 될 때의 이점은, 그 상황 덕분에 삶과 죽음과 아름다움과 성장과 부패의 원천에 직접적으로, 피할 수 없이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 그 여자 예술가가 어머니의 행위들이 사소하고, 인생의 주된 문제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문학의 위대한 주제들과는 무관하다고 배웠다면 그 배움을 잊어야 한다. 이전의 배움은 여성멸시이고, 사랑과 탄생보다 폭력과 죽음을 더 좋아하는 사고와 감정 체계를 보호하고 영속시키며, 거짓이다.

(…)

출산과 육아가 문학에서 주된 자리를, 성교와 낭만적 사랑이 500년간 차지해 온 것과 비슷한 자리…… 아니면 전쟁이 문학이 시작된 순간부터 차지해 온 것과 비슷한 자리를 점한 문화에서 산다는게 어떤 의미일지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pp.405-406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해야한다는 연설문 <어느 공주 이야기>에는 자신의 경험을 담았다. 쉽게 밝히기 어려운 낙태 과정과 그것이 자신의 일생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1982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결정이다. 이름있는 작가가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 일을 공개한다는 건 보통의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르 귄은 소설 집필 외에서 다양한 저작 활동을 했다. 강연을 하고 에세이와 서평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얼마나 많은 책의 서평을 요청받고 또 받아들였는지에 놀랐다"고 밝히고 있다. 유명 작가들에 대한 비평이 흥미로웠다. 『다크 타워』를 출판한 전기 작가 월터 후퍼가 "잘못 생각했"다며 C.S. 루이스에 대해 "혐오가 많았고, (…) 자기 신념에 독선적"이라고 평가했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중 「미지와의 조우」를 본 후에는 "일부러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나 보다고 믿기에는 충분하다"며 "거의 모든 면에서 비합리적"이라고 혹평한다. 조지 루카스의 수많은 팬들을 고려해보면 르 귄의 솔직함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책 제목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캘리포니아 원주민 노랫말이다. 작가 르 귄은 “미래를 만들려면 과거가 있어야만 한다”며 그 세계는 잃어버린 세계일 수도 있고, 그래서 “세계를 만드는 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추게 된다고 적었다.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던 “잃어버린 세계”는 무엇일까. 여성이 지워진 세계가 아닐까. 여성의 지워진 존재 끝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추는 춤은 그녀의 책이 계속 나오는 한 계속될 것이다. 솔직하고 아름답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