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 아름다움을 비추는 두 거울을 찾아서
장파 지음, 유중하 외 옮김 / 푸른숲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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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학은 세 가지 패러다임의 충돌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첫 번째는 모든 구체적인 형상 이면에 공통적인 요소로 존재했다고 믿었던 '미의 본질'에 관한 연구이고, 두 번째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 의지 가운데 감성에 상응하는 '미의식'에 관한 연구이며, 세 번째는 기술로부터 분리된 '예술 법칙'에 관한 연구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론이라든지 사색은 고대 그리스 이래로 연구되어 왔지만, '미학(Aesthetik)'이라는 명칭은 1775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학자 바움가르텐의 <미학>에서 사용되었고, 칸트에 이르러 독립적인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다양한 학문 분과 가운데서도 미학은 그 생성과 발전 과정에 곡절이 많았다고 볼 수 있는데, 단순하게는 현상이나 가치로서의 미와 예술을 대상으로 삼는 체계적인 학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학문 체계는 과학적 형태를 갖춘 서양 문화의 산물이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정립된 학문 체계에 비춰 중국은 체계를 갖춘 미학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어느 관점에서는, 중국에서는 '미적 논의'만 있고 학문 차원의 미학은 없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기존의 미학이 서양의 범위 안에서만 고금을 관통하는 미학 이론을 세웠을 뿐이라고 한다. 보편적인 학문으로서 미학이 성립하기 위한 기본조건들은 서양의 미학뿐만 아니라 중국의 미학에도 부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즉, 기왕의 미학이 정립된 마당에 중국의 미학이 갖는 특수성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재밌는 발상인 것 같다. 결론적으로 중국, 나아가 동양의 미학을 인정할 수 있을까. 독자의 관점에 따라 수용의 폭은 다를 것 같다. 여전히 그 체계가 모호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중국의 미적 논의가 개념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던 탓일 듯 싶다. 동양 사상은 태생적으로 순환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산수 자연의 구현을 예로 들어보자. 서양은 그림을 그릴 때 풍경을 마주하며 그 비율과 색채, 의미 내포를 정확히 반영한다. 반면, 중국은 "실컷 돌아다니면서 한껏 보고 나서, 그것이 가슴속에 역력하게 새겨지는" 경지를 추구했다. 다시말해, 중국의 미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화할 수 없고, 마음으로써 깨달아야만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는 방식과 조화를 본받는 관점의 차이는 극히 일부의 설명에 불과하지만 매우 직관적인 예시다.

저자의 목표를 어떻게 평가하든, 서양과 중국의 미학을 비교한 작업만으로도 매우 흥미롭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는 물론 최근에도 동서 미학의 비교는 찾기 어려워 보인다. 책은 전체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바탕이 되는 문화 정신을 다룬 1장과 미학을 총제적으로 비교한 2장까지만 읽어도 가치가 있다. 서양의 미학은 시대별로 구분되는 반면, 중국의 미학은 유가와 도가, 불가, 그리고 굴원의 사상적 근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머지는 내용과 방법, 주체에 해당하는 여러 목자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발문을 김지하 시인이 썼는데, 스스로 밝혔듯 개인 사정으로 책 전체를 읽지 않고 발문을 쓰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과 목표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발문으로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이 책에서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저자인 장파 교수는 중국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이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듬해인 2000년 방한해서 이대 중문학자 정재서 교수와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그 대담에서 꽤 인상적인 논의가 있었다. 정 교수가 동서 미학의 이분법적 접근에 대해 비판을 했는데, 장 교수는 하나의 분석 방법론으로써 유용하다고 말했다. 비교학적 방법론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가장 날 선 비판은 다음이었다. 장 교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문화 속에 미학이 없는 나라들은 이미 체계를 갖춘 서양 미학을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아프리카나 남미 원주민 문화의 경우 비록 문자가 없지만 나름의 미학이 있으며 그들도 서구 미학과 만날 때 많은 어려움과 저항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그런 엄격한 체계성의 잣대에서는 중국 미학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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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3
퀜틴 스키너 지음, 임동현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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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오늘날에도 꾸준히, 아니 빈번하게 소환되는 정치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이다. 당장 뉴스 기사를 검색해보자, 특히 정치인과 정치 이슈와 관련된 기사가 줄줄이 끌려나오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치사상 분야의 석학으로 꼽히는 앨런 라이언 교수는 그를 정체성 파악이 어려운 사상가라고 표현하였는데, 그의 영향으로 유럽세계에서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글 쓰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이미지를 획득했는가. ‘플라톤적’ 또는 ‘홉스적’이라는 수식과 ‘마키아벨리적’이라는 수식이 주는 느낌의 차이가 그 대답이 될 것 같다. ‘마키아벨리적’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가치중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버크, 프리드리히 대왕, 마르크스와 엥겔스, 아이젠하워 대통령, 헨리 키신저 등등, 그는 “교활함과 표리부동, 불신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마키아벨리적 혐의와 악평이 오늘날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세련되거나 섹시한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비평가가 말했듯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자신과 세계 앞에 공공연히 말할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그런 이미지가 진실과 부합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퀜틴 스키너 교수 또한 그런 악평이 정당한지, 그가 자신의 주요 저작을 통해 제기했던 정치와 정치도덕에 대한 견해가 과연 그런 것들이었는지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흔히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서만 소환되지만, 마치 애덤 스미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부론>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을 함께 읽어야 하듯이, 마키아벨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주론>뿐만 아니라 <로마사 논고>를 함께 되짚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키너 교수의 이 원저는 2001년 시공사의 로고스 총서를 통해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2010년 한겨레지식문고 시리즈에서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고(절판), 원저가 OUP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되면 이어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를 통해서 소개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가 꽤 깊은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내용상으로는 한겨레지식문고본의 제목이 잘 맞긴 하다. 그러니까 책 목차 구성이 르네상스 키드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을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외교관으로서, 군주의 조언자로서, 자유의 이론가로서, 피렌체의 역사가로서. 이러한 목차 구성은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그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메디치가에 대한 구직 수단이라는 저술 배경이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훗날 자유로운 이론가로서 저술한 <로마사 논고>에서는 논조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스키너 교수는 마키아벨리를 단순히 <군주론>의 저자로서만 다루지 않고, 그의 ‘네 얼굴’을 순차로 제시하며 각각의 시대적 배경과 그가 처한 환경이라는 맥락에서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을 재구성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독자는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상이 모순되는 지점을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그 시대가, 그가 처했던 환경이 난세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한비자와 함께 거론되는게 아닐까. 어쩌면 단일한 인물상이 왜곡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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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 먼 이야기, 색 - 다채롭고 신비한 예술
한혜진 지음 / 미진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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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주제로 다룬 책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할 수 없으나, 당장 재미있고 좋은 책을 몇 종 떠올릴 수는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중세 문화사 전문가인 미셸 파스투로는 <The History of a Color> 시리즈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에는 <파랑의 역사>와 <빨강의 역사>, <색의 인문학>이 번역돼 나왔다. 출판사 ‘월북’에서 나온 <컬러의 말>과 <컬러의 힘>도 대중적으로 꽤 많이 읽힌 책이다. 그런데 교양서로 출간되는 이런 책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문화사적 배경에서 색을 소개한다. 예컨대, 고대인에게 대수롭지 않거나 심지어 미개한 색으로 인식되었던 파랑이 어떤 역사적 사건 내지 사회적 현상을 거쳐 오늘날 모든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손꼽히게 되었는지.




지금 소개하는 책은 다른 층위에서 색을 다룬다. 색채의 개념을 “물리적 현상인 색이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현상”이라고 본다면, 색채이론은 색의 본질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이론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는 색깔이 다양한 주체의 경험현상에 따라 다르게 지각되기 때문이다. 색채이론을 다룬 책도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요제프 알버스의 <색채의 상호작용>을 비롯해 몇몇 연구자들의 책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순수하게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교과서나 논문에서나 볼 수 있는 어려운 색채이론을 과학과 건축, 미술, 영화, 애니메이션 등 여러 분야와 연계해서 이해를 모도한다. 독자는 저자가 해외 여러 나라의 색채 연구자들과 교류하며 경험했던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에 더 자연스럽고 깊게 몰입할 수 있다.

 

세부 주제 가운데서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정말 많지만, 그 가운데 ‘색각이상’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인상에 남는다. 먼저 스스로 색각이상자였던 A교수님 말씀을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끝없는 정글에서 사과를 따 먹어야 생존할 수 있는 유인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만약 잘 익은 빨간색 사과와 그렇지 않은 초록색 사과를 구분 못하는 색각이상 유인원이라면? 망막의 구조니 추상체와 간상체니 하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결론을 보자. 빨간 사과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대다수의 유인원은 빨강과 기분 좋은 감정을 연관지을 수 있는 반면, 일부 색각이상 유인원은 초록색 사과를 먹고 배앓이를 할 수도 있고 정글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색에 대해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공통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색은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뇌를 통해 만들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A교수님은 색에 대한 감성은 평등하지 않으며 색채 감성을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순간 무수하게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책의 제목처럼, 색은 물체라는 개념에 따라다니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색을 빈번하게 인식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회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항상 사물을 바라볼 때 색을 특별하게 인식하지 않은 상태로 대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에게는 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 누군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대상을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의 눈에는 다르게 보여도 암기하듯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을까. 실제로 약간의 색 구분이 안 될 때에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살아왔다는 한 연구자의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그는 색을 이름으로 구분해서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최근 평등 이슈와도 관련 있는 피부색 이야기(그렇다고 차별 이슈를 다룬다는 의미는 아니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을거리이다. 참고로 저자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피부색에 관한 연구논문을 쓰기도 했다. 미진사라는 출판사는 이번 기회에 처음 알게되었는데, 좋은 미술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출판사에서 표지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주제를 잘 담고 있는 예쁜 디자인이다.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책이 영롱한 빛깔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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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 어슬렁어슬렁 누비고 다닌 미술 여행기
류동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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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행 에세이다. 어느 장르의 책이든 일정 부분 마찬가지겠지만, 에세이만큼 저자의 삶의 궤적에 영향을 많이 받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게 된 동기나 주제 따위에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니, 어릴 적에 본 <인디아나 존스>에 영향을 받아 고고미술사학과에 진학한, 그럴법한 이야기로 저자소개를 시작한다. 이후 미술 관련된 일을 하면서 예술과 문화, 고고학에 대한 저술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DSLR 입문서를 쓴 이력이 눈에 띄었다. 이번에 출간한 책에 실린 많은 이탈리아 풍경 사진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처음 풍경과 예술 사진이 어우러진 이미지 중심의 구성을 구상했으나, 이탈리아 예술의 폭과 깊이는 결국 에세이로 풀어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정도면 책의 컨셉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베네치아와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시칠리아 여섯 도시, 6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의 작은 도시들로 작은 목차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1부에서는 베네치아와 그 주변의 파도바, 베로나, 라벤나와 같은 도시를 소개한다. 저자가 어떤 도시를 방문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영화나 미술작품의 배경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던지, 어느 미술관이나 건축물을, 혹은 어떤 공연을 보려 했다던지. 그래서 도시 여행기의 절반은 연관이 깊은 영화나 회화, 건축물 등의 소개와 함께 직접 그 장소를 둘러본 단상이고, 또 절반은 풍경과 예술 사진이다. 에세이 사이사이에 관련 사진을 배치하는 건 어땠을까도 싶은데, 이야기는 도시별로 매듭을 짓기 때문에 글과 사진을 연결지어 보기에 아주 불편한 것은 아니다.

 

3부에서 소개하는 피렌체는 저자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3부에서 함께 소개하는 도시, 루카, 산미니아토, 볼테라, 산지미냐노, 시에나, 아레초, 몬테풀차노 등등 그 숫자가 월등하게 많다. 이 작품이 이 도시와 이렇게 매칭이 되는구나 싶을 정도로 생소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저자가 피렌체에 애정을 갖게된 계기는, 어쩌면 너무 진부할 수도 있는데,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면서 그 풍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며 피렌체의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오르고 싶은 로망이 솟아날 것이다. 피렌체 두오모에 올라 그 음악을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어떤 영화나 소설, 예술작품을 보면서 그 배경이 되는 장소에 가보고 싶다고 느끼고, 또 그 장소에 직접 방문해서는 작품을 감상했을 때의 생각들이나 감정들을 떠올려보는 것은 꽤 좋은 여행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에 나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들 때 장소로 발전한다 했던가. 그러고보면 여행이란 것은 단순히 맛있는 것을 먹고 쇼핑하고 사진을 찍는 것 이상으로 복합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행위임에 틀림 없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 다른 풍경 속에서도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의 풍경 속에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프롤로그 중에서)

 

몇 가지 영화와 또 몇 가지 소설이 보고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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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2
레이먼드 웍스 지음, 박석훈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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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법학서적 따위를 읽는가> 시리즈(11) 법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법철학이라면 으레 헤겔이 먼저 떠오른다. 그의 철학에서 법철학이 어떤 위상을 갖는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1821년에 발표한 <법철학요강> 이후로 ‘Rechtsphilosophie'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으니,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테다. 그런데 헤겔의 법철학 외에도 다양한 법철학 서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 서적으로 ’구스타브 라드브루흐‘와 ’아르투어 카우프만‘, ’쿠르트 젤만‘, ’마틴 골딩‘의 저서를 거론할 수 있겠다.


법철학은 철학의 한 갈래라고 라드브루흐가, 그리고 카우프만이 그랬다. 심지어 카우프만은 법학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딱잘라 말했다. 근대를 전후해서는 법의 본질을 다룬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긴 했지만, 오늘날 법철학 저서를 쓰고 있는 학자들은 대부분 법학자들이 아닌가,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형법을 가르치는 학자가 법철학 강의를 맡는다고 한다.




법철학을 철학의 일부로 보고 접근해보자. 철학에서의 주제를 ‘대상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로 본다면, 법철학은 ‘법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법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주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어느 법철학 서적을 보더라도 공통적으로 다루는 내용이 ‘자연법과 법실증주의’, 그리고 ‘정의론’이다. 영미법학자인 웍스 교수의 이 법철학 입문서도 제1장과 제2장, 그리고 제4장에서 이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미법학자의 법철학 서적은 대륙법학자의 그것과 다를까? 약간의 구성상 차이는 있는 것 같다. 웍스 교수는 제3장에서 미국에서 주요한 위상을 갖는 드워킨과 하트를 좀 더 강조해서 소개하고 있고, 앞서 언급한 골딩 교수는 영국에서 발원한 분석철학을 부각시킨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제5장과 제6장을 보면 ‘법과 사회’(법사회학)와 ‘비판적 법이론’(비판법학)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법철학의 영역일까. 법이론의 영역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은 웍스 교수의 주저 <법이론의 이해>를 압축한 입문서이다. 그의 법이론 저서에서 핵심적인 법철학 주제를 발췌했다고 해도, 법이론의 내용들이 기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이상 필연적인 구성으로 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철학과 사상 등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듯이, 법철학도 법이론이나 법사회학, 법사상사, 법학방법론 등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학문의 지향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경계선을 확인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구분형식에만 몰두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다. 법사회학이나 비판법학도 결국은 전통적인 법개념이나 인식방법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순차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법철학이란 어떤 주제를 다루는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 좋다. 다른 법철학 서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결한 구성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그래서 역자가 “이 책은 법철학의 전반을 아우르는 ‘소축척 지도’를 제시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법은 자연에 부합하는 보편적인 도덕 가치들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규칙이나 명령, 규범의 집합에 불과한가? 정의나 인권 등은 법의 특유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법은 사회현상과 완전하게 분리되어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 법은 정치나 도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이고 명확한 개념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과 그 해답을 구명해온 역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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