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인간 호모 메모리스 - 기억과 망각에 관한 17가지 해석
이진우 외 지음 / 책세상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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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정의하는 개념은 다양한데 여기에서는 '기억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기억과 망각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하고 있다. 철학, 심리학, 문학, 예술, 역사, 자연과학 등 다각적 접근을 통해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데, 각 분야의 글 상호간에 유기적인 연계와 통합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오히려 어느 부분을 펼쳐 놓고 읽어도 문제가 없도록 독립성을 유지한 구성이 책을 읽기에는 여러모로 편리한듯 싶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행위는 동시에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행위이기 때문에 양자는 표리관계로서 언제나 우리의 삶에 동반하고 있다. 우리의 하루를 살펴보면 끊임없이 기억하려고 노력하지만 또 금새 잊어버리면서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든지 기록을 하면서 다시 망각하지 않도록 애를 쓴다. 옛날엔 지인 전화번호를 모두 암기하거나 노트에 적어 두곤 했는데, 요즘엔 핸드폰에 입력을 하고 다니니 망각은 절대 기억을 이길 수 없는 세상이 온 것도 같다. 그러나 모든 정보를 입력하고만 다니니 정작 머릿속에는 들어 있지 않아서, 이것은 기억하고 있는걸까 아니면 망각한 것일까. 아무튼 기억과 망각 사이의 순환구조를 보면 기억은 좋은 덕인 반면에 망각은 나쁜 병과 같이 인식될 수 있는데, 망각이 언제나 부정적이고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치부되는 개념은 아니다. 외상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따라서 기억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망각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함으로써 기억을 통제하는 망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잊고 싶은 기억을 잊지 못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인간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망각이라는 것도 분명 필요해 보이는데, 따라서 이책의 <기억의 병과 망각의 덕>편에서는 '우리 삶은 기억과 망각의 건강한 관계를 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빨리 잊어버리고자 하는 현대인은 '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한다. 그는 망각의 본질을 망각했다.   - 마르틴 하이데거

 

흥미로운 글들이 많았지만 특히 심리 부분의 <기억과 망각의 목적>편, 문학 부분의 <에로티즘과 망각>편, 역사 부분의 <역사, 기억과 망각의 투쟁>편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반면에 개인적인 관심과 전공에서 동떨어진 자연과학 분야의 글들은 상대적으로 잘 읽지는 못했다. <기억과 망각의 목적>편도 앞서 말했던 '건강한 관계'와 같이 양자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맥락에서, 기억이라는 사유활동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망각 작용이 목표지향적 인지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에로티즘과 망각>편에서는 한중일 삼국의 고전소설을 분석하여 남성 주인공의 여성에 대한 욕망으로 망각되는 것, 그리고 그 망각의 끝에서 망각한/된 것이 귀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아시아에서 널리 쓰이는 '인과응보'와 '자업자득'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바로 이 망각의 귀환 구조를 인식해왔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에서의 기억과 망각에 대한 해석은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책들을 저술하신 육영수 선생님의 글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전적인 답변, 즉 랑케의 '역사란 과거 사실이 진실로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작업', 마르크스의 '존재했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카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에 사이에서 저자는 '역사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투쟁'이라는 명제를 강조하고 있는데, 모든 역사적 쟁점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일본이 강제징용시설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들은 '강제징역'을 삭제한 상태에서 등재하려고 한다. 기념물이나 기념비 등과 같이 등재 행위 역시 기억의 역사이지만 삭제 행위는 망각의 역사이기도 하다. 결국 기억하려는 우리나라와 망각하려는 일본 사이에서 기억과 망각의 투쟁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요즘 사극 징비록이 방영중인데, 서애 류성용 선생이 저술한 징비록이라는 책도 기억과 망각의 관점에서 본다면 저술 목적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역사 기록들이 마찬가지이다.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어떤 것들은 후세에 기억되길 원했고 또 어떤 것들은 영원히 망각되길 원했기 때문에, 우리가 남겨진 글자 그대로를 읽는 것만으로는 실체진실에 다가가기 매우 어렵다. 아마도 우리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배웠던 세계관과 역사 가운데 '만들어진 기억'이나 '과거 망각시키기'에서 자유로울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단속한 타성력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는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한 가지 연구 주제를 놓고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글들을 함께 읽어보니 확실히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고, 어떤 글에서는 평소 생각해오던 부분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했다. 또한 평소 접하지 않던 분야에 대한 감각도 조금은 느껴볼 수 있었다. 좋은 다양한 글들이 많이 담겨 있어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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