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죽이고 죽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공포에 떨며

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총성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그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심홍의 어둠이 지평으로 내려앉았다.

숨결이 편안해져왔다. 그리운 냄새가 머릿 속으로 밀려들었다."

 

화양 동부소방서 구조3팀 팀장인 기준은 화양맨션에 몸이 불편한 환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아무리 초인종이 울려도 듣지 않아 강제로 뚫고 들어간 집 안에서는 열댓 마리의 핏빛 눈을 가진 개들이 피를 토하고 죽어있고 주인 역시도 죽어있다.

한편, 화양시 백운산 기슭에서 유기동물보호소이자 동물병원이기도 한 '드림랜드'를 운영하는 수의자 서재형은

다큐멘터리 <꿈의 나라> 출연을 통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가 그의 실체를 비난하는 김윤주 기자의 글로 나락으로 떨어져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고 스타를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원래 주인의 아들 동해. 부대 내의 모든 개들의 코를 십자로 자르고 불태워 죽인 사이코패스.

주인에게 버림받은 썰매개 쿠키와, 괴롭힘 당하던 스타를 구해내 함께 살고 있는 서재형은 사실 11년 전, 아이디타로드 개썰매 경주에 참가했던

최초의 한국인 머셔(썰매꾼)으로 이끌던 썰매개들이 늑대에게 습격당하면서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시종일관 불안한 분위기가 감도는 화양에는 정체 모르는 전염병이 퍼져 가고 개들로부터 이 병이 시작되었다는 오해로 인해

사람들은 무차별로 개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발병하고 발병한지 며칠만에 쓰러져 가다

결국 병자들은 체육관에 격리조치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알 수 없는 병은 기승을 부린다.

마침내 화양시로 통하는 모든 출입도로는 봉쇄되고 화양은 그야말로 죽음의 도시가 되어 가는데....

 

개를 향한 끔찍한 증오의 모습들, 인간의 잔학함,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7년의 밤의 정유정 작가답게.. 서사가 정말 대단한 책이었고

읽는 동안은 미친 듯이 책에 빠져 들어 읽게 했던....

잔혹한 상황 가운데서 인간은 망가져 가고 개들은 의리를 지키고, 개만도 못한 인간들을 만나고

인간다운 인간들을 만나고..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다루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나 전염병이 퍼지는 도시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스티븐 킹의 작품이 생각나는 책이었다. 그나저나 왜 제목이 28일까?;;;;;

 

정말 요즘의 한국문학에는 걸출한 작가들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참 아끼는 김중혁, 김애란 작가를 비롯하여 김영하, 정이현, 김려령, 정유정 작가까지.....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이야기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책 속에서..>

 

p.30

택시는 어두운 아침거리를 느릿느릿 달려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차창을 지나갔다. 도심을 휘감은 눈보라, 창문마다 반짝이는 풀빛,

하얗게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재형은 길 잃은 사람처럼 허둥대고 불안해 했다.

 

p.37

예상과 달리 용기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p.225

눈을 질끈 감고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견뎠다. 총소리가 멈추고, 개 짖는 소리가 그치고, 트럭이 드림랜드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나고, 정적이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

 

p.359

그녀는 차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춥고, 허기지고, 피곤했다.

밤새도록 비 오는 거리를 돌아다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p.473

그날의 학살은 화양시내에 남아 있던 군인들의 손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이후, 화양은 콘크리트 덩어리와 시신만 우글대는 정글이 되었다.

빨간 눈은 지옥 불처럼 화양을 태웠다. 용케 불길을 피한 이들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다른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약탈, 총질, 강간, 살인, 방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일들이 매일, 매 순간, 도처에서 일어났다.

서로 죽이고 죽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공포에 떨며 고속으로 공멸해갔다. 남은 자들은 서로를 피해 가시 세계 밑에 숨어 지냈다.

 

p.479

뺨은 희고, 살갗은 축축하고, 몸은 딱딱했다. 젖은 나무를 만지는 것 같았다. 나무처럼 평온해 보였다.

어쩌면 나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간 없는 세상에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