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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모든 것 ㅣ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그 새벽에 대해 언젠가는 쓸 수 있을까. 아직 자신이 없었다. 오래 전의 구덩이 같은 것.
모두가 잊은 척 미끈히 덮고 살더라도 움푹 파였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게 오직 하나로 족했다."
1994년. 내가 함께 다니던 친구는 뚜렛 증후군으로 본의 아니게 욕설을 뱉어내는 준모와..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혜. 그렇게 둘 뿐이었다.
다단계 회사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가 회사가 망해 사기로 고소를 당해 외국으로 도피한 엄마.
그런 엄마를 매몰차게 버린 아빠와 자신의 손을 질질 끌고 와 할머니네에 두고 간 이후,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난 그저 쓸모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난 엄마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엄마를 그리워하며..그렇게..
험난했던 나의 시절을 살아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고향을 잃고 이름을 잃고 존재를 잃어야 했던 내가 지나온 모든 인생들..
책을 읽으며 때로 먹먹하기도 때로 한심하기도 때로는 가슴이 아리기도 했다.
누군가의 인생.. 내 인생만 힘들고 지친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준...
그리고 그 모든 과거의 기억들.. 움푹 패인 기억들을 뒤로 하고 살아간다는 것..
뮤지컬 어쌔신의 Sometihing just broken 이라는 넘버도 떠오르고...
아련하고 먹먹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었다.
<책 속에서..>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는 친구들과 꼭 나누고 싶었는지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 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
p.19
우리는 함께 픽 웃었다. 자주 있는 순간은 아닌데, 내가 꽤 좋아하는 순간이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다같이 엇비슷한 어떤 느낌에 도달한 것 같은 착각 때문이다.
p.59
잘 지내? 응, 나도 잘 지내. 밥 잘 챙겨먹어, 엄마도. 그러고 나면 더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엄마가 미안하다,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겠지. 그래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괜찮은 마음이 샘솟는 것도 아니다.
p.88
학생은 꽃이에요, 절벽에 핀 풀꽃. 잊고 잊히며 살아야 해요.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오래 안고 가지 말아요.
무슨 일이더라도. 사무쳐도, 아파도, 다 흘려보내요. 내 것이 아닌 듯. 그러면 꺾이지도 밟히지도 않을 거예요.
p.174
불행은 틈을 주지 않고 들이닥친다. 해석하거나 납득하려 들 필요는 없다. 해석되지도 납득되지도 않는 것,
그것이 불행이 가진 본성이니까. 이상한 낌새를 채고 어, 어, 어쩌지, 하는 순간에 불행은 토네이도처럼 사정없이 휘몰아친다.
정신을 차려보면 움푹 꺼진 구덩이와 그 주변에 어지러이 널린 일상의 잔해 뿐이다.
p.222
날이 밝고 나면 그때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내일에 대해, 다시 도달하지 못할 어제에 대해 조금쯤 더 알게 될까.
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발견했다고 거짓 고백이라도 할 수 있게 될까.
p.247
그런데 요즈음 너의 삶은 어떠니.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에게, 나는 어쩌면 이제야 그것을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