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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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은 층과 층 사이에 있습니다. 일층과 이층 사이, 이층과 삼층 사이, 삼층과 사층 사이...
저는 그 표지판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숫자와 숫자 사이에 있는 슬래시 기호(/)를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가 딱 저렇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층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끼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사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하 일층과 이층 사이, 일층과 이층, 이층과 삼층, 층과 층 사이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슬래시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미미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 김중혁의 세 번째 단편집..^^
미스터 모노레일은 장편이고 뭐라도 되겠지는 산문집이니
내가 그동안 만나온 김중혁 작가의 단편집으로는 펭귄뉴스,악기들의 도서관에 이은 세 번째 단편집이 맞다!
 
김중혁의 글에는 삶이 있다.
김중혁의 글에는 리듬이 있다.
김중혁의 글에는 생각할 꺼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김중혁의 책을 읽는다..
 
이 책에 실린 C1+y=:[8]:, 냇가로 나와, 바질,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1F/B1, 유리의 도시, 크랴샤 총 7편의 단편들은
각각 그 독특한 매력을 뽐내며 독자를 유혹할 것이다.
 
<책속에서>
* C1+y=:[8]:
 
정글에서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한 가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도시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낙서를 연구하면서 이성과 감성을 분리하는 법을 배웠다.
 
태초에 판자가 있고, 바퀴가 더해진 것일까, 아니면 어느 날 누군가 스케이트보드의 바퀴를 떼버리고 눈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스케이트보드를 만든 게 먼저였을까, 아니면 눈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노보드를 만든 게 먼저였을까.
 
*냇가로 나와
 
전설은 책상에서 완성되는 법이다
 
패싸움이라는 건 선택의 문제야. 누가 누굴 선택해서 어떻게 싸우냐, 그런 걸로 승패가 갈린단 말이지.
 
*바질
 
이별은 육체적인 단어다. 헤어진다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별은 그런 그의 균형을 통째로 망가뜨렸다. 균형은 부서졌고 균형이 붙들고 있던 형체도 망가져서 몸의 모든 부분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박상훈은 생각했다.
 
줄기가 두 동강 나고 이파리가 흔들리면서 박상훈의 코로 바질 향이 훅 풍겼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한 시간에 1씩 숫자가 줄어드는 게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숫자로 된 이름을 싫어하지만 2021394199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신체 어딘가가 지워지는 듯한, 옅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특별한 사고가 생기지 않는 한 그는 앞으로 삼십구만 사천백구십구 시간을 살게 될 것이다.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돼.
 
2021394194는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한 순간이었다.
 
*1F/B1
 
뜨거운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깜빡이는 형광등보다 외로운 존재들이다.
 
건물관리자는 자신의 몸에 집중하면 안 되는 거야. 건물의 리듬에 자신을 맡겨야지.
 
*유리의 도시
 
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유리가 바닥에 부딪칠 때만 쾅, 하는 소리가 났대요. 아무래도 자살이라고 봐야갰죠?
자살이라니, 무슨 소리야?
모든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유리의 자살로 마무리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벽에 붙어 있다가 너무 힘들어서 아래로 뛰어내린 거죠.
그늘이 없어서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서. 사무실 안녕, 하면서 말이에요. 하하하
 
창을 닫자마자, 먹을 것을 찾아 몰려드는 생물체처럼 빗방울이 창문으로 달려들었다.
 
*크랴샤
 
작은 마술쇼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했고, 다시 나타나게 했으며, 어떤 것들을 찢었다가 다시 붙였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으며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안다.
 
그 나무들이 가루가 되었다가 압축된 판자의 형태로 배달될 것이었다.
분쇄한 후의 가루를 볼 때마다 인간의 골분을 보는 것 같아서, 모든 가루는 최후의 존재들이므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고개를 젓고 눈을 깜빡여본다. 환각은 금방 사라진다.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수십 개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눈이 침침하다.
도시는 절대 낡지 않는다. 나만 낡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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