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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내들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그들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노래는 이제 더 이상 한 끼의 밥과 노역을 피하기 위한 구실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래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윤 동 주의 마지막..
스기야마 도잔의 마지막..
와타나베 유이치의 마지막..
최치수의 마지막...
p.16
소리는 하늘보다 파랬고 바람보다 맑았고 별보다 반짝였다. 자신의 몸에서 뽑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수도승처럼 정진하는 죄수들.
먼지와 빛과 함께 허공을 떠도는 선율, 뒤섞이는 소리들의 화음. 그 소리를 들으며 스기야마는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장기를 다시 찾은 것 같았다.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뜨거운 심장을.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야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p.33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항상 그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동주에게 죽느냐 사느냐는 생과 사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To be 가만히 있느냐 Not to be 가만히 있지 않느냐 즉, 행동하느냐 행동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p.137
하지만 좋지 않은 기억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숙성되며 모든 기억은 소중하니까,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삶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이니까. 혼자만의 사랑 또한 그의 인생을 이룬 소중한 한 부분일 것이다.
p.154
나는 그렇게 얻은 잿더미 위의 승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승리는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부서진 양심과 잿더미가 되어버린 인간성 밖에는..
p.178
감사해야 할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감사하기에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으니까. 나는 살아남은 것이 부끄러웠다.
p.234
나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를 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이 더러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일본인이었다.
그를 잡아가둔 자들도, 그를 그 지경으로 만든 자들도 일본인이었다.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나도 일본인이었다.
전쟁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들 모두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벌어진 이 더러운 전쟁에 동의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용서받아야 할까? 아니, 우리들은 모두 용서받을 수 있기나 한 걸까?
나는 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p.240
나는 그를 잃어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를 잃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였다.
p.251
그는 한편의 시로 나를 꾸짖고 나를 일으켰으며 나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더럽고 악의적인 현실 앞에 무릎꿇지 말아야 했다. 일어서서 맞서야 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