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눈부시게 푸릅니다.

                    -윤동주 "길" 중에서.. - "

 

하늘, 바람, 별, 시

윤 동 주

히라누마 도주..

 

나라를 잃고 말을 잃고 글을 잃었던 망국의 시민..

자신이 내놓은 자식같은 시어가 불길 속에 사그라져 가고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그의 스물네살 첫째달은 왜 그리도 부끄러웠을까..

 

불온한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수인번호 645번 히라누마 도주.

그리고 주로 조선인 사상범들이 수용된 제 3 수용동을 관리하던 악명높은, 야생의 위험함이 풍기는 간수 스기야마 도잔의 갑작스런 죽음.

거기에서부터 비롯된 윤동주와 스기야마의 있을 수 없을 것 같던 만남과 이야기들..

스기야마 도잔의 교대였던 와타나베 유이치는 스기야마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제 3 수용동의 일인자 같은 존재인 최치수와 최치수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조용한 영향력을 가진 윤동주에 대해 알게 된다.

 

그냥 나의 짧은 글로 이 책을 설명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너무... 좋고 너무 먹먹해서.. 읽는 내내 울먹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활자의 고마움.... 

그가 있었기에 우리는 망국의 슬픔을 그의 아름다운 시어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 자료에 근거하였고 허구인 부분도 많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그리고 먹먹한 일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몹시 슬펐다.

원래 참 좋아하는 시인인데... 가장 좋아하는 시인... 나의 닉네임을 짓게 된 근원...

 

읽는 내내 마음이 서걱서걱 거렸다..ㅠㅠ

아무래도 이 책을 구입해야할 것 같다.

 

<책 속에서..>

p.9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죽음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p.37

사람들은 필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글씨의 형태와 윤관과 위치는 쓴 사람의 심성과 욕망 뿐 아니라 당시의 기분과 분위기까지 말해준다.

 

p.49

나는 그들이 꿈꾸는 책을 건넸지만 가끔은 그들이 원하는 책을 건네지 않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은 책들. 영원히 나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책들...

 

p.67

열두 권의 책은 한 줄의 연기와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나는 아직 불씨들이 깜박이는 재 위로 손을 가져갔다. 따스했다.

죽어버린 책들의 식지 않은 체온, 바스러진 활자들, 죽어버린 단어들, 스러진 음절들....

오래 참은 숨을 내뿜는 고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는 되새겼다.

 

p.84

"당신도 죄 없이 끌려왔군요."

 

p.85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를 읽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읽은 것처럼.

 

p.100~101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한 줄의 글로 족했다.

한 줄의 문장에도 배고팠던 나는 활자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나의 영혼은 언제나 영양부족 상태였다. 살아 있는 문장을 만나고 싶었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촉촉한 속살을 가진, 갓 구워 낸 문장, 굳은 몸을 녹이듯 영혼을 녹이고, 안식을 주는 글.

 

p.157

말을 마친 그녀는 조여진 태엽 인형처럼 연주를 시작했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튀어 오르면 건반은 해머를 밀어 올렸고 해머는 현을 두드렸고 현은 떨리며 향판에 부딪혔다. 음들은 이어지고 뒤섞이며 어둠 속으로, 메마른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절망의 등짐은 벗겨지고 일상의 비루함은 사라졌다. 살고 싶다는 희망, 누군가와 손잡고 싶은 연대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열망이 솟았다. 나도 모르게 피아노 선율을 따라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나의 지친 영혼을 끌어안았다. 피아노 소리는 밀물과 썰물처럼 내 가슴을 쓸었다. 내가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나의 슬픔은 극복되고 있었고 영혼은 치유되고 있었다. 음과 소리들이, 간격과 이어짐이 주위를 채웠다. 정적 속의 맥박, 고요 속의 아우성. 아름다웠다. 이 질척거리는 세상에도 깃털 같은 희망을 믿고 싶어질 만큼.

 

p.169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p.178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10절)

 

p.218

이름은 한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은 상징이에요. 한 사람의 얼굴과 눈빛과 몸집과 행동 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과 꿈과 그리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담겨 있죠. 하나의 단어가 수많은 느낌을 담고, 한 줄의 문장이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요.

 

p.220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p.225

조국을 잃어버리고,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이름을 잃어버린 청년.

 

p.236

도대체 시가 뭔데 너 같은 놈이 여기까지 왔지?

말씀 언 변에 절 사. 시는 말의 사원이지요.

 

p.239

시는 삶이에요. 당신은 당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시를 써왔어요. 잉크로 종이에 쓰는 대신 온몸으로 거리에다 시를 썼죠

 

p.259

스기야마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승전? 전쟁에 이기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전쟁과 싸워 이기는 인간은 없다. 죽음과 싸워 이기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패자다. 승자 조차도 자신이 얻은 승리 때문에 고통 받고 파멸당한다. 그러니 이기는 자에게도 지는 자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전쟁으로 상처입는 건 똑같으니까.

 

p.265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목적어 없는 첫 문장은 무언가에 쫓기듯 절박한 자기고백이었다. 그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부질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니까. 조국도, 모국어도, 자신의 이름조차도, 어쩌면 그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들을 가진 적조차 없었던 건지도.

 

p.273

시는 네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명이야. 시가 죽으면 넌 죽은 목숨이라고!

 

p.278

그러므로 문장은 말하는 자의 심경을 반영하지 않는다. 문장은 바로 말하는 자 자신이다. -스기야마의 메모-

 

p.286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별 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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