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달콤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도 맛을 모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커피 맛도 모르는 입이 어디 입인가........p.29

"창밖에는 눈보라가 흩날렸고 길게 늘어선 사이폰들에서는 투명한 물들이 맛있게 오르내렸다.
아, 정말 흐르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맛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p.35

김탁환 작가가 리심을 끝낸 후에 또 다시 쓰게 된 조선의 한 여인 이야기.
그는 리심에 있어서 답답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을 이 노서아 가비 속 여인에게 투영시켜 좁은 조선 땅을 벗어나 러시아의 드넓은 벌판을 거침없이 내달리기도 했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당찬 여인상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모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가 있던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탄 한 역관의 이야기를 읽은 후 김탁환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 작가는 그저 이 역관을 역관에만 머무르고 싶지 않아 이반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운명처럼 그를 만나게 되는 여인 최홍(따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역관이었던 아버지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선물받은 하사품을 훔치려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그 신분이 낮아지고 노비로 끌려가게 될 운명에 처한 최홍은 어머니의 권유대로 조선땅을 벗어난다. 최홍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항상 노서아 가비를 타다가 홍이 앞에서 천천히 내려 마셨더랬다. 여기서 노서아 가비란 바로 러시안 커피. 를 말한다. 최홍은 그렇게 달아나 아버지인척 하는 남자들의 속임수를 벗어나 러시아에 스스로 발을 들이고 생존의 방법들을 찾으며 자신의 러시아어 실력과 아버지로부터 배운 전각 새기는 법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파란만장하지만 광활한 평원 러시아에서 펼쳐지는 평범해보이지만 당차고 똘똘한 한 조선여인의 삶은 다른 사기꾼패에 있던 이반을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고..따냐는 사신으로 왔던 민영환 일행을 따라 조선으로 이반과 함께 돌아와 이반은 역관을..그리고 따냐는 고종황제의 노서아 가비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일하게 된다.

고종황제에게 최상의 노서아 가비를 드렸던 따냐..
두 마음을 품고 역관으로 일하며 기회를 엿보던 전직 사기꾼 출신의 이반(종식)
마치 내가 함께 그들과 러시아 벌판을 달리고 있는 것 같았고 조마조마 숨을 죽이며 고종 앞에 노서아 가비를 끓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삶은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와서 러시안 커피만큼 진한 향과 여운을 남겨주었다.

김탁환 작가는 이 책에서 커피를 각 장마다 다르게 정의해 두었다. 그 커피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 역시 처음으로 커피를 접했을 때의 그 향과 맛.. 기억과 느낌까지도 모두 함께 떠올랐다. 진한 러시안 커피 한 잔과.. 이 책을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노서아 가비 속 커피에 대한 정의>
커피는...외로워 마라 외로워 마라 속삭임이다
커피는...돌이킬 수 없이 아득한 질주다
커피는...언제나 첫사랑이다
커피는...달고 쓰고 차고 뜨거운 기억의 소용돌이다
커피는...검은 히드라다
커피는...두근두근, 기대다
커피는...아내 같은 애인이다
커피는...맛보지 않은 욕심이며 가지 않은 여행이다
커피는...따로 또 같은 미소다
커피는...오직 이것뿐! 이라는 착각이다.
커피는...흔들림이다
커피는...아름다운 독이다
커피는...끝나지 않는 당신의 이야기다.
 
* 사이폰 : 커피를 끓이는 기구로 보관이 어렵고 쉽게 깨지며 한 번 끓일 때 불편한 점이 많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건너편 나라 일본에서는 사용하는 카페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다.
외양만 보면 과학시간에 쓰는 실험기구 같이 생긴 사이폰은 증류의 원리로 커피를 알코올램프로 끓여 보내며..관찰하기가 좋고 커피를 만드는 모양이 아름다워 전시용으로 사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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