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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찾기
마리네야 테르시 지음,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7년 3월
평점 :
0. 책장을 덮고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지루한 마음에 먼저 펴들었던 역자후기에 '펑펑 울 수도 있다'는 대목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될 것 같다. 책의 시작은 나른하고 조용해서 조금은 지루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책장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이 작품에는 분명 있었다. 상처를 받아본 사람, 그 상처를 극복해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중 화자 가브리엘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터이다.
1. 찾으려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원래 이 책은 북카페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만난 한 회원님으로부터 책여행으로 받은 것이다. 그 분께서는 책을 보내오시면서,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정작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읽고 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어려웠다'는 말이 머리속에 내내 남아서, 이 책을 잡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는 200페이지 남짓한 짧은 소설책이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무작정 끌려갈 수 밖에 없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니. 그것도 한참 불안정한 사춘기 소년의 서술로. 내 피는 이미 개구리의 그것만큼이나 차갑게 식었는데, 이 소년의 불안정한 맥박을 어찌 따라가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무작정 읽어나가기엔 심적 부담이 컸던 지라, 우선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자고 마음먹고 첫 책장을 편 기억이 난다. ('무슨 모습을 찾고 싶어한다는 거지?')
이 책의 원제는 [De Gabriel a Gabriel]이다. 스페인어를 잘 모르지만, 눈치껏 때려맞추자면 [가브리엘이 가브리엘에게] 정도 되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 책에는 가브리엘이 두 사람 나오는데, 하나는 화자인 소년 가브리엘이고, 또 하나는 그의 아버지인 가브리엘이다. (두 부자는 이름이 똑같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가 소설 전반을 구성하는 큰 뼈대이기 때문에 적당한 제목이라고 생각되지만, 한국어판 제목인 [모습찾기]도 센스있게 잘 붙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큰 주제가 '편지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과정.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주변을 비로소 바라보게 되는 과정. 누구나 언젠가는 겪고 지나가야 하는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이 짧은 소설 안에 오롯이 녹아들어가 있다.
2. 아이는 아프고 난 뒤에야 어른이 된다.
소설 속에서, 소년은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사라진' 아버지에게 답장받지 못할 편지를 매번 쓴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는데도 소년에게 아무런 해명도 없이 사라져버린 아버지에게 아이가 갖는 감정은 복잡다단하다. 의문. 당황. 분노.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 바닥에는 항상 사랑이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신이 아버지에게 대가 없이 주었던 사랑과 신뢰. 그 하나만을 믿고 소년은 편지를 쓴다. 집에는 더 이상의 소통이 없어, 왜 아버지가 사라졌는지 자신에겐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 엄마가 있고, 학교에는 친하게 지내면서도 굳이 속내 이야기까진 하고 싶지 않은 알레한드라가 있다. 소년의 초점은 살아있는 두 사람을 애써 외면한 채,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 하나에만 맞춰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에겐 아빠의 이야기를 숨기느냐'고 엄마를 다그친 날, 엄마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 가브리엘은 결국 진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직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상처. 어떤 선택권도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공평한 운명. 그것에 어떻게든 애써 저항해보려 했던 것이 가브리엘에게 있어서의 '편지'였다. 고치였고 희망이었고 믿음이었던 '편지'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신기루마냥 부서지자 가브리엘은 곧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다시 기운을 차리는데, 그 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동안 외면했던 엄마와 알레한드라가 있었다. 그렇게 그는 추억 뿐이었던 아버지를 놓아주고, 그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옆으로 돌아온다.
소년은 종잇장으로 만들어진 꿈에서 깨어나, 이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세계에 남았다. 마치 새로 태어난 양, 주변의 모든 것에 처음부터 다시 적응을 한다. 어머니와 서툰 대화를 하고, 아빠에게 편지를 쓰는 대신 알레한드라에게 펜을 들어 답장을 받을 수 있는 편지를 쓰며, 아기가 걸음마를 하면서 세상과 부딪치듯 그를 둘러싼 새로운 세상과 부딪치고 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하나하나 삭일 줄 아는 맷집을 기르면서, 상처를 마주보고 객관화하는 힘을 키우면서 가브리엘은 이제 막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걸음마를 한다. 아버지가 준 추억을 꼭 쥐고, 꿋꿋하게 세상 밖으로 걸음마를 한다. 역자후기에서의 '펑펑 울 수도 있다'는 대목은 아마 이 장면을 읽고 받을 감동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나 싶다. 주저앉지 않고 용기를 낸, 작은 소년의 발걸음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줄은 내 미처 몰랐었다.
3.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였다는 사실 뿐.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뿐.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탯줄을 잇는 것과 같아서, 누구와 사랑에 빠지면 그 탯줄을 통해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과 환희와 고양감을 그와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 몸인 것마냥 모든 것을 나누고 있다는 벅찬 환희가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을 떨게 하는 것이다. 다만, 상대방에게 외면당하거나 여의치 않은 일로 이별을 겪게 되면 마치 그 탯줄을 강제로 잘린 양 갑자기 절망이 찾아오고 급기야는 그에 대한 분노에, 원래 탯줄이 이어져있던 적이 없다는 듯 매몰차게 굴게 되는 일이 많은데 이별은 이별대로, 사랑했던 기억은 사랑했던 기억대로 각각 갈무리를 할 수 있는 성숙함이 어른이 될 수 있는 필요조건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가브리엘처럼, 떠나버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사랑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아둘 수 있게 되면 말이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새로이 소통하는 법을 배웠고,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법도 배웠고, 부끄러움 없이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법도 배웠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스물 여섯 먹은 나조차 못하고 있는 일을 너무 의연하게 해내고 있다. 그래.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알량한 자존심, 버림받지 않았다는 믿음에 매달려 주변을 돌아보지조차 못하는 모습? 아니다. 그렇지 않다. 순간이나마, 아름다웠던 그 때를 '진정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마음이 아프더라도 사랑을 사랑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꿋꿋한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비록 그랬었더라도,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도 저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압니다.' 하는 그런 마음. 그래. 가브리엘. 그거 하나면 된 거야. 사랑하였으므로, 내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 말 한 마디. 쉬우면서도 정작 우리 어른들은 말하기 힘든 그것. 저자 마리네야 테르시가 우리네 덜 익은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 점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