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그 해리슨의 코리안 엔드게임
셀리그 해리슨 지음, 이홍동 외 옮김 / 삼인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셀리그 해리슨을 처음 본 것은 우연히 시청했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모 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서였다. 사뭇 진지한 어조로 한반도 정세에 관해 논하는 그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美국무부의 관리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남의 나라 정세에 관해 훤히 꿰고 있단 말인가. 그가 1950년대부터 아시아에서 활동한 베테랑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안 건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이 책 코리안 엔드게임의 첫 장을 펼쳤을 때였다. 책 표지 뒷면에 있는 그의 프로필을 읽어보고 나서 나는 지체없이 이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셀리그 해리슨의 냉철함이다. 내용을 서술하면서 그가 제시한 논거들은 모두 사실(fact)이다. 그의 예측 또한 그가 경험한 사건과 수집한 사실들에 근거한 매우 조심스러운 시도이다. 북한에 대한 자신들의 편견이 얼마나 북한 내 매파들의 입지를 강화시키는지 또 이로인해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이 얼마나 어려워지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 관리들에 대해 서술할 때를 제외하고 그는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는 분석자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이 정도면 노기자의 뼈 속 깊이까지 배인 철저한 직업의식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절반 이상 읽고 나면 이 노기자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책에는 이러한 셀리그 해리슨의 냉철함과 대비되는 세 가지 요소가 눈에 띈다. 이것들은 북한 핵문제를 발생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차례대로 짚어보자.

첫째는 미국의 오만함이다. 1994년 체결된 제네바 북미 합의는 충분히 한반도 비핵화의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이 단시일내에 스스로 붕괴하리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제네바 북미 합의에 적시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북한은 이에 대해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을 거부하고 핵연료봉을 재처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미국의 이러한 안이한 태도 뒤에는 북한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다.

둘째는 한국내의 비이성적인 민족주의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유교적인 명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반미주의자들이 美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그들은 북한을 전술 핵무기로 공격할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이 실리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내몰고 친명반청의 명분을 분명히 했을 때 그들은 아마 자신들의 명분에 충실했다는 자족감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군이 쳐들어와 인조의 머리채를 잡고 삼궤구복의 치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이 복잡한 상황에서 명분에만 집착하는 비이성적인 민족주의는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셋째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리더로써 자리매김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일본의 바램은 과거사의 청산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일본의 이러한 태도는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수준의 핵 재처리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일본이 조립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적으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셀리스 해리슨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가로막고 있는 요소들을 빠짐없이 나열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가장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앨빈 토플러의 전쟁과 반전쟁의 서문에 있는 문구가 떠오른다. '우리는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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