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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들리에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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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하게 책읽는당_샹들리에 수록작 중 `미진이`


미진이. 친구 중에 한 명쯤은 저런 이름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소설 같지 않고 현실처럼 읽혔나보다.

처음에는 건방지고 철없는 중학생 딸과 생활에 지친 엄마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 이야기는 끊어질 듯 위태로운 `개인`의 이야기였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씌워도 무너뜨릴 수 없는 아슬아슬한 벽 같은 것이랄까. `나`라는 환상 속에서 살던 한 아이가 세상을 보고 관계를 보고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도록 만드는 성장통 같은 이야기랄까.

이야기는 미진이가 학원을 끊고 스타일 좋은 과외 선생님 밑에서 과외를 받기로 결심하는 데서 시작한다. 미진이는 평소 잘 써먹던 수법대로 엄마에게 과외 받는 일이 자신에게 무척 중요한 일임을 어필하려 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엄마가 좀 이상하다.






1

엄마의 반격



˝대체 너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당당하니?˝

이런 말을 들으면 나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미진이의 생각 속에서 엄마는 늘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하는 존재, 그리고 자식인 미진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미진이는 예전만큼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생활하지 않는 엄마에게 화가 난다. 그래서 과외 받고 싶다는 말을 마치 통보처럼 내뱉어버린다. 그리고 미진이의 통보에 대한 엄마의 반응은 이렇다. ˝너는 너를 무엇으로 증명해봤니?˝

미진이와 엄마의 이어지는 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불안하고 매우 슬펐다. 갑자기 변해버린 미진이의 엄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나의 엄마 사이에도 저런 대화가 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에게 자신을 증명할 만한 게 없다. 그런데도 늘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고 때로는 부모님을 무시하거나 미워하기도 한다. 부모 자식 사이는 그래서 절대로 공평한 관계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결국 하나의 관계이다. 내리사랑,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부모 자식 관계의 또 다른 이름들은 현실이면서도 사실 신화에 불과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부모님 앞에서 당당해지지 못하게 된 것은. 오래 전 중학생 때, 엄마가 깨질 듯이 식탁 앞에 앉아 우는 것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아, 결국 엄마도 한 명의 사람이구나. 언제나 벽 같아 보이기도 했던 나의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흔들리거나 상처 받기도 하는 사람으로서 살고 있구나. 그때부터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의식하기 시작했고 엄마라는 호칭 뒤편에 있는 한 여린 사람이 다치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늘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부모님께 많은 것을 해드릴 수 있는 효녀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마음의 짐이 있었다.

그래도 미진이의 엄마가 미진이에게 `죽여도 되냐`고 물어본 것은 절대 본심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변변한 결과를 내지 못하는 인간이더라도, 그게 내 자식이라면. 그러나 그런 반격에 딸인 미진이는 크나큰 충격을 받는다. 부모 자식 사이라는 고정된 신화를 빠져나오는 중이라 할만 하다.






2

넌 특별한 존재가 아니야



자식은 부모에게 언제나 특별하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자식들은 언제나 특별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나에게 ˝넌 특별한 존재가 아니야. 평범보다 한참 아래야.˝라는 말을 한다면? 은근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든 아니면 진짜 몰랐든 간에, 부모님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진이처럼 상처를 받고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미진이의 엄마가 미진이가 `특별하지 않은, 평범보다 한참 아래인` 이유를 말하는데, 읽으면서 굉장히 아프고 불편했다. 글을 읽고 있는 나 자신에게 직접 하는 말 같기도 하고, 풍요로움이 일반화되고 소비의 대중문화가 아름답고 멋진 것만을 보여주는 시대에서 나고 자라 눈이 높아진 90년대 이후 출생들의 철없던 시절을 꼬집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특별하지 않은 애를, 넌 특별하다 특별하다 하니까, 정말로 특별한 줄 알잖아. 자기 우물에서만 특별하지. 우물도 되게 얕으면서.˝

˝없어. 특별한 곳에 쟤 자리는 없어. 심지어 지가 무시하는 거리의 저 사람들, 그 속에조차 쟤 자리는 없어. 쟤는 알아야 해. 그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그런데 그런 모습조차 무시해. 건방이 도를 넘었어.˝

˝쟨 안 돼. 싫어. 건방 인형을 데리고 사는 것 같아.˝

˝정신 나간 애가 좋은 부모 만난다고 성인군자 안 돼. 성인군자가 정신 나간 부모 만난다고 미친놈 안 되듯이. 쟤 그나마 내가 키우지 않았으면 벌써 미친년 소리 들었어.˝

재능도 없는데 노력도 하지 않아.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도 몰라. 평범 아래이면서 평범한 사람들조차 무시해. 이 말들이 미진이를 넘어 나의 소녀 시절-그리고 어쩌면 지금도-까지 꼬챙이로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훨씬 더 아프겠지만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환상은 언젠가 깨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후에도 인생이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다시금 그런 환상에 빠져드는 때가 있다, 머리로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진이는 막 환상을 빠져나오는 중이다. 그리고 비로소 ˝나도 내가 형편없는 애일까 봐 매일매일 조마조마˝하다고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순간 사람은 현실을 딛고 제대로 노력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절망이 찾아온다. 미진이는 그 절망에 이끌려 가출을 한다.







3

내 편은 아무도 없어



미진이는 친구 보라가 사용하는 피아노 연습실에서 몰래 숙식을 해결하지만 곧 들키고 만다. 보라가 미진이를 보고 하는 말은 ˝근데 미진아, 너 여기 계속 쓰면 안 돼. 방 비밀번호 바꾸려고 했는데, 말하고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기다렸어. 너도 피아노 쳐 봐서 알잖아. 신경 쓰이면 연습 안 되는 거.˝다. 무슨 일이 있냐고도 묻지 않고. 친구가 어쩜 그리 야박하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미진이는 스스로 알고 있다. 친구도 아니라는 걸. 그저 어렸을 때 함께 피아노를 배웠던 사이에 불과하다는 걸. 보라에게 있어 자신은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집에 다시 들어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아빠는 엄마가 우울증에 걸려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가족인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했다고 이야기한다. 미진이는 그런 아빠에게 묻는다. 내 걱정은? 아빠는 했다고 한다. 단지 당분간은 친구가 옆에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미진이와 친하다고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미진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교과서적인 충고도 하지 않고 허락한다.

보라나 미진이의 아빠는 결코 나쁜 사람들도 아니고 부적절하게 처신했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진이의 시선에서 보면 미진이 자신을 외톨이로 만드는 사람들이 된다. 미진이는 세상에 자기 편이란 아무도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미진이의 자기중심적인 시선과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아렸다. 미진이는 여전히 누군가는 자신을 위로해주어야 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일 아니냐고. 나도 아프다고. 그렇지만 삶은 결국 그렇다. 정말로 중요한 순간에는 늘 곁에 아무도 없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돌보아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상처 받은 채로 있어도 잠시라도 세상이 눈감아주고 봐주는 일 같은 건 없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겪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이야기 속에서 미진이는 그걸 너무 아프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4

자야겠다,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결국 미진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생활하는 할머니 댁으로 향한다. 시골에서 할머니와 둘이서만 지내는 생활은 짜증스럽지만 집에 있을 때만큼 절망스럽지는 않다. 미진이는 비로소 자기를 돌아볼 만큼 냉정한 상태가 되고, 그 동안의 관계를 되짚어보며 한 명의 사람으로 엄마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도 아빠도 격려와 지지를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환경에서 `지금 꾸는 꿈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미진이 지금 꾸는 꿈은 ˝낡아빠진 이 집을 구석구석 칠하고 예쁘게 만드는 것이다.˝ 장날을 놓치지 않고 약콩을 팔러 갈 생각을 하고, 대문과 벽에 페인트칠을 할 생각에 미진은 바쁘다. 피곤하다. ˝충분히 피곤해서 앞일까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잠을 잔다.

이걸 희망에 찬 결말이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지금 미진이의 미래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한밤 중에 강에 나가 컴컴한 물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계속 그대로일지 바뀌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래서 조금은 더 설렌다. 설렌다는 표현이 결단코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인생 역시 그렇지 않을까. 투명하게 잘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폭우가 내려 탁해지기도 하고, 가문 여름날에는 흙바닥까지 보일듯이 말라붙기도 한다. 미진이의 앞날도 결국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생애를 살다갔다는 인물들도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상처 입고 흔들림을 느꼈을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여자든 남자든, 천재든 천재가 아니든, 자기 삶에 대해 행복하다고만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을 겉에서만 볼 수 있으니 그 사람의 삶에 대해 행복하다 혹은 불행하다라고 단선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자기의 내면에서는 계속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변화, 그 자체가 사람과 삶의 본질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그래도` 희망을 가지게 하는 우리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잇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잘 모르고 있겠지만.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는 것만으로도 미진이는 이야기의 처음보다 성장해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진이의 잠은 성장통을 견뎌내며 지금을 사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선물 같은 잠이다. 미진이는 그렇게 계속 변화하는 중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충격을 크게 받았을지라도 그것을 삶 안으로 훌륭히 끌어안고 나가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미진이의 `지금`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하루하루를 `지금`에 몰두하며 살다보면, 그래도 이게 확실한 자신의 흔적이고 선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 따듯하고 친절하게 끝나지 않아서, 그리고 미진이에게 누구 하나 도움 주는 일이 없어서 그래서 이 소설은 더 당혹스럽고 불편하면서도 더 와닿았다. 온통 미진이의 시선에서만 그려지고 재구성되는 인물들을 보며 `미진이`라는 이름의 혼자가 된 것 같아 읽는 내내 조금 쓸쓸했다. 평범한 여중생이 가진 생각의 흐름을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 풀어놓은 것도 약간은 야생적(?)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런 골치 아프고 우울한 이야기를 이렇게 발랄한 문체로 그려낼 수가 있나.

김려령 작가의 글이 가장 연약한 존재인 청소년들의-그리고 조금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연약한 존재인 어른들의-근원적으로 아픈 부분들을 점점 더 예리하게 파고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살코기와 뼈를 파헤치켜 분리해놓는 것 같은 그 움직임이 생각보다 아플 것 같아 미리부터 겁을 먹기는 했지만, 김려령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아, 물론 이 글이 실린 신작 소설집 `샹들리에`의 다른 작품들도.




※이 글은 창비 `단편하게 책읽는당`에 선정되어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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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앵무새는 쏘아 죽이지 말거라.`
읽고 나서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인지, 흑인들과 아서 래들리 아저씨에 대해서,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을 했다.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p.213- 


 아마 젬과 스카웃의 아빠인 애티커스 핀치는 자신에게도 들려주기 위해 이 말을 했을 것이다. 패배할 것을 시작 전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발걸음을 떼는 용기....... 그건 차라리 용기라기보다는 초연함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주 많은 시간의 기다림을 각오하며 먼 미래에 대한 그림을 확고히 붙잡는 것일 수도. 


 ˝좀 더 생각해봐.˝ 모디 아줌마가 계속 말했습니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어. 지난 밤에 난 현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지. 너희 모두가 인도를 따라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 사이에 이런 생각을 했단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변호사야. 그러면서 나는 또 이렇게 혼자서 생각했지.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p.399- 

 패배한 싸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절망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었다. 뒤이어 젬이 커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완수하겠다는 듯한 뉘앙스의 대화를 모디 아줌마와 나누는데, 맨 첫 장에 `모든 변호사들은 아이일 적이 있었다`라는 말이 적혀져 있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혹시 이 소설은 젬(과 스카웃)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권변호사 같은 것이 되는 계기에 관한 이야기를 써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되었다.

 인간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단지 내가 총을 갖고 있다 해서 쏘아 죽이는 것. 아무런 잘못 없는 인간을 인종으로, 집안으로, 나이와 성별로 구분 짓고 갈라놓고 공격하는 것. 그것이 곧 `죽이기`가 아닐까. 마지막에 스카웃이 아서 래들리 아저씨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과 경관이 애티커스에게 화를 내듯이 `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는 조사를 하고 형벌을 적용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책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선 이런 생각이 남아 마음이 텁텁해진다. 밥 유얼 역시 그가 남을 진심으로 헤치려고 마음 먹지 않았더라면 마을 사람들에게 줄곧 `죽임 당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마을 사람들에게 그가 받은 냉대와 악조건은 객관적으로 실재했던 것 아닌가? 물론 그가 지은 죄를 두둔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죄인`에 대하여는 결코 그를 `죄 자체`로 여길 수 없는 구석이 분명히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좋았던 점. 스카웃의 어린 시선에서 쓴 문장들이 감칠맛 난다. 그리고 젬도 스카웃도 딜도 참 어여쁜 아이들이다.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p.213-

"좀 더 생각해봐." 모디 아줌마가 계속 말했습니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어. 지난 밤에 난 현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지. 너희 모두가 인도를 따라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 사이에 이런 생각을 했단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변호사야. 그러면서 나는 또 이렇게 혼자서 생각했지.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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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느티나무 - 강신재 소설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1
강신재 지음, 김미현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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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연애소설 가운데 이 작품을 뛰어넘는 `첫 문단`을 가진 소설은 보지 못한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방긋 웃어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젊은 느티나무 中-



소설의 3박자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메시지+재미있는 스토리+인상적인 혹은 개성적인 문체라고 하면, 이 소설은 우선 문체, 곧 문장이 아름답다. 문장의 선명한 빛깔로 순수함을 흔함 속에 묻히지 않게 한다. 

만약 사랑의 씁쓸한 황홀에 젖어 오래도록 그 사람이 나올 듯한 하늘 밖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다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읽는 이 자신의 애정과 그만큼의 괴로움에 의하여 소설 속 이야기가 순수하게 마음에 젖어들어옴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문장의 마디마디마다 그 자신의 슬픔과 기쁨과 불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다. 


˝내 말을 알아줄까 숙희?˝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삶은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겠지? 내일이건 모레건 되도록 속히......˝
나는 또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그럼.˝
그는 억지로처럼 조금 미소하였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그래,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곤란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사랑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의 결론은 울릴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사랑인걸.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모습으로 내내 울릴 것이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형체 없는 감성을 언어를 통해 재탄생한 의미로 다시 자기에게 가져오는 데 있다고도 할 수 있으니까.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언어의 창은 분명 그만큼의 밀도를 필요로 하는 독자들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방긋 웃어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말을 알아줄까 숙희?"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삶은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겠지? 내일이건 모레건 되도록 속히......"
나는 또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그럼."
그는 억지로처럼 조금 미소하였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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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루 24번지 - 제6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5
손서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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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이 어떻게 종횡으로 세계 문학과, 혹은 세계 그 자체와 접점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 될 것 같아 기대됩니다. 때로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건 호의보다는 같은 농도의 상처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상처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뭉클하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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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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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장강명을 읽는 또 다른 방식.
읽는 내내 지금 흐르는 시간들이 소설의 장면 장면에 겹쳐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끝도 시작도 없는 둥그런 원 같은 이야기라는 점이, 그리고 그렇기에 어쩌면 더욱 더 이 세상의 진실성과 맞닿아 있는 모습일 수 있다는 점이 짙게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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