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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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 이승과 저승, 그리고 정열.
 
 정열의 순간적 초월을 쫓는 남자 주인공 마사키는 우연히 세 가지 인연을 만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인해 애초에 가려 했던 목적지를 지나쳐 왕산악까지 오게 된다. 날개에 붉은 점이 하나씩 박혀있는 기묘한 인연의 나비를 쫓아가다 길을 잃게 되고 밤이 첩첩산중으로 찬 산자락에서 뱀에 물리게 되는데.
눈을 떠보니 한 노승이 사는 암자에서 다친 다리가 나을 때까지 머무르게 된 마사키. 그는 달이 점점 차는 밤마다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뒷모습을 보인 채 목욕을 하는 한 여인이 뒤돌아보는 순간 꿈에서 깨는 것이다. 꿈속의 그녀는 평생을 기다려 왔다는 단 하나의 인연일까, 노승이 주의했던 병든 노파인 걸까. 하지만 문득 마사키는 그 산중에 여전히 쓰러져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환각을 보게 되고. 그럼에도 그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대체 내가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p.8   
 
 
 영화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들딸을 만나는 이곳이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토템인 팽이를 돌린다. 영화는 팽이가 다 돌아갈 때쯤 끝이 나고, 팽이가 멈추는지 계속 돌아가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표면적으로는 고풍스러운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하고 있는 『달』도 열린 결말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꿈인지 현실인지의 이분법의 세계가 아니다. 꿈과 생시를 넘어 이승과 저승까지도 고려해 봐야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어렵다. 적잖이 어렵다. 반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해하고 싶은 내 마음을 따라주지 않고 술술 읽어버리는 속도를 주체 못 해서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땐 상당히 빨리 읽었지만 재독은 어려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문체라니. 읽으면 읽을수록 이 소설에 빠지는 느낌이다. 이래서 일본에서 <히라노 신드롬>이 일었구나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 속에 나의 판타지 (스포 있음)
 
 
마사키는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다카다에서 구즈를 그냥 지나쳐버리고 후다미까지 왔던 일을 떠올렸다.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튕겨져 나와버린듯한 느낌. 기차 안에 잘못 날아든 나비가 기차의 이 칸 저 칸으로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날아다니는 사이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생전 처음 보는 땅에 떨어졌다는 느낌. p34
 
 처음에는 이 부분을 근거로 마사키는 계속 기차에 있었고, 그가 마음에 든 다카코가 그를 나비로 홀려내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든 주술이 풀려 마사키는 그대로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독서토론에서도 이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재독했을 때는 마사키가 산속에서 뱀에서 물려 죽어가며 보았을, 다카코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환상을 조금이라도 밀어내려 치면 생생하게 느껴지는 다리의 아픔, 입과 손에 차고 들어온 흙, 두견새의 울음과 계곡물 소리. 육체의 실제적 고통을 사랑으로 치환하여 이 편으로 정열을 이끌어내려는 다카코의 의지대로 마사키는 점점 그녀에게 정열의 광기를 내보인다. 
 
 
그 여인에 의해 죽는 것이 나의 바람이란 말인가? 스스로 물었을 때 마사키는 부정을 했다. 마사키는 죽음을 피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 오히려 치열하게 원하고 있다. 여인을 손에 넣고도, 그 이후에도 생이 계속 이어지다니. 그것은 마사키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여인과 죽음, 그 둘 다를 한 찰나에 반드시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그 정열을 모조리 쏟아부어 지금 여인 곁으로 가려 한다. 내 정열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다. 나는 기필코 내가 나이면서 내가 아니기를 간절히 원한다. p157
 
마치 눈 뜨고 있는 이 순간이 몽롱한 환각인 듯. 마사키 자신의 꿈을 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그가 꿈꾸어지기라도 하는 듯. p90
 
꿈을 꾸는 당신도 제가 꾼 꿈일 뿐.... 제게는 꿈도 현실도 같은 것.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답니다. 아아, 그러니 부디, 부디 돌아가주세요. p173
내 사랑은 단 한 번 휘두룬 검이오. p174
 
맹인의 세계는 바로 지금의 손끝에만 있다. 세계는 결코 예고되지 않는다. 손끝으로 만지는 순간, 세계는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p64
 
 
 
 
 모든 것을 연결하는 나비는 꿈과 현실,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여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단 한 줌의 백발이 돼버린 마사키의 육신을 다시 산속으로 옮겨다 놓지 않았을까. 마사키는 다카코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그 자신이 숙명적으로 지닌 '정열'의 감각으로 그토록 원했던 순간의 초월,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 뒤 한 번 안 돌아볼 치열한 충동의 체험을 갈구했기에 그 스스로 뜨겁게 녹아 반짝이고 져버린 나비가 되었다. 그에게 사랑은 정열로 포장된 죽음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다카코에게도 평생을 기다려온 단 한 번의 사랑을 마사키와 함께 한순간의 반짝임으로 허락하지 않았을까. 
 
 
 읽으면서 꿈이 환상이고 환상이 모두 꿈인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번 리뷰는 가장 큰 궁금증이었던 반전적인 결론에만 맞춰 글을 썼다. 하지만 다음 리뷰는 기타무라 도코쿠(일본에 실재했던 시인. 1894년 자살로 생을 마감함)를 소설의 근간으로 그를 전설로 만들기 위한 작가의 의도나, 전통적인 한체풍의 유려한 문장들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쓰고 싶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인『달』이 나오자마자 첫 번째 소설인 '『일식』은 천재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나도 이 천재의 걸음에 편승한 것일까. 이 소설을 손에 든 이상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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