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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의 항해 ㅣ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의 항해>의 주인공 모건은 서인도 제도의 섬에서 자라며 유년시절을 보낸 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바다를 건너와 영국에 도착한 젊은 여성이다. 모건에게 영국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땅이 아니라 모든 게 똑같아 보이기만 한 추운 도시, 지나온 무더운 섬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도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새어머니는 더 이상 모건을 양육할 수 없다고 얘기하고, 모건은 스스로 돈을 벌어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만 한다.
학교의 교육을 마치지 않은 젊은 여성이 자립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모건은 처음에는 순회 공연단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지만, 적은 돈으로 생계를 꾸리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던 모건에게 금융가에서 일하는 부유한 제프리스가 접근한다. 제프리스는 다정한 태도로 모건의 마음을 얻게 되지만 무엇에도 진심을 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모건은 오직 제프리스와 함께 있는 것만을 원하지만 제프리스는 곧 모건을 차갑게 저버린다. 제프리스의 후원이 끊긴 모건은 그 이후에도 흘러가는 대로 누군가를 만나며, 누구의 아이일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다. 에설이라는 여성을 만나 에설의 인도를 따라 일을 하게 된다. 에설이 제안한 일은 손톱을 관리하는 일이지만, 사실은 매춘과 유사한 일이다. 모건은 자신의 임신을 알게 된 후 아이를 낙태하고, 제대로 되지 않은 시술로 생과 사의 경계에 놓여 재수술을 기다린다.
가난한 젊은 여성이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곧 사랑에 실패하는 플롯은 자주 마주칠 수 있는 플롯이다. 그렇지만 <어둠 속의 항해>는 사랑에 초점을 맞춘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모건이라는 한 여성,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온 이 이방인 여성의 삶에 주목한 책이다. 살아야만 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방인이 되어 가난하게 사는 여성의 삶. 모건의 삶에서 중요한 일은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지, 사랑과 그 실패가 아니다.
모건이 떠나온 세계를 먼저 들여다보자. 책 속에서는 '서인도제도의 한 섬'이라는 설명 뿐 섬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섬은 모건의 기억을 따라 하나씩 모여들어 새로 만들어진다. ("이상하게도, 다른 무엇보다 이런 생각이 제일 많이 났다-거리거리에서 나는 냄새라든가 프랜지파이와 라임주스와 계피와 정향나무 냄새, 생강과 시럽이 들어간 과자 냄새, 장례식이나 성체축일 행렬 뒤의 향냄새, 우리 집 바로 옆 진료소 밖에 서 있는 환자들 냄새, 그리고 바닷바람 냄새와 육지에서 부는 바람의 또 다른 냄새.") 낯선 섬에 관한 정보를 조금씩 들으며 그 섬에 관해 상상하는 일은 퍼즐 조각을 맞추는 놀이와 유사하다. 이 섬에서도 모건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지는 못했다. 식민지 섬에서의 백인인 주인, 흑인인 하인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흑인이 되고 싶어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섬에 대한 기억은 모건의 모든 것이다. "(그 나라를 아는가? 물론 그 나라를 안다면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진다. 오렌지꽃 피는 그 나라를?)"
다른 세계(영국)로 넘어온 이후 모건은 떠나온 세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세계와 불화한다. 그는 낙원을 잃은 채로 살아가야 한다. 한 세계를 이미 잃어버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살아오는 동안 줄곧 알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두려워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런데 이제 그 두려움이 자라나 있었다. (...) 그리하여 그것은 나를 가득 채우고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두려워하던 일이 정말로 일어난 곳에서 모건은 존재해야 한다. 그런 모건에게 산다는 건 매 시각, 매 분마다 자신이 왜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주여, 이렇게 사는 건 이상해요. 주여,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나요?')
가난, 젊은, 여성, 이 세 가지는 모건을 사회의 정상(혹은 사회에서 정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범위) 바깥에 위치시킨다. 바깥에서 모건이 겪는 문제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가난한 젊은 여성이 겪어야 하는 문제들과 맞닿아있다. 사회의 소수자로서 모건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사람들은 왜, 어떻게 살아가는가? 삶은 벌써 모건에게서 한 세계를 빼앗았다. 불운한 일을 겪게 했다. 희망하라고들 말하지만 희망이 없고 원하는 게 없는 사람에게 삶은 무슨 의미인가. ("늘 희망하라, 그러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며, 그게 사람들이 이 세상을 계속 굴러가게 하는 방식이다. 개개인마다 품은 그토록 많은 희망, 더럽게 교묘히 허용된. 하지만 만약 네가 더 이상 희망하지 않으면, 네 허리가 부러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다음엔 어찌 되는가?)"
모건은 다가올 미래에도 가난한 여성으로서의 비참한 삶이 계속될 수도 있으리라 예감한다. 그렇지만 모건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다 알지 못하며, 알아가는 중이고, 끝끝내 알 수 없기 때문에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하루 이후에 다가올 내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니까. 매일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정확히 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 두 세계 사이를 오가는 항해를 하는 모건의 삶은, 우리에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항해하며 살아가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