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라는 이름의 성역
온형근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황대권님의 서평에 그는 못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그 못생김은 그의 섬세함과 짙은 서정성으로 상쇄되어 버린다. 그래서 황대권님이 그의 시를 읽고 다시 보면 그렇게 잘 나 보일 수 없다고 한 것 같다.

온형근님은 언제나 자연을 노래한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다. 자연을 통해 우리의 삶을, 관계를 또 우리의 '그러해야 함'을 얘기한다. 자연을 그토록 섬세한 눈으로 바라보고 즐기는 시주(詩酒)의 생활을 통해 슬픔이라는 성역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성역을 뛰어 넘어, 몸철학을 통한 자연과의 교감, 합일 그리고 사랑이라는 화두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는 언제나 몸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움직임의 의미, 움직임은 자연과 소통하는 하나의 길이다. 바로 행위를 통한 자연과의 소통이 그가 말하는 몸철학인 것이다. 자연과의 교감은 언제나 우리를 상기시키고 또 깨달음을 준다.

나뭇가지보다 더 큰 몸집의 눈이 흔들리는 바람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수직과 휘어짐과 튀어 오름과 가라앉음의 살고 죽음까지도 눈에게는 평면의 마음이 있다
   <눈에게는 평면의 마음이 있다> 중에서

그의 시에서 눈은 그 교감의 매개체로 많이 등장한다. 눈이 가진 평면의 마음은 자연의 마음이며 시인의 마음이다. 그 평면의 마음은 자연의 포용력이며 그것이 가지는 외유내강의 속성이다. 자연은 언제나 우릴 품어 주며 두 팔을 활짝 벌려 어서 오라고 소리치고 있음을 그는 얘기하고 있다.

긴 강을 건너며 젊은 시절의 완고함은 포용과 사랑으로 변화된다. 그리곤 미소짓는다. 그 미소는 삶의 경륜에서 나오는 타자에 대한 포용과 사랑이다. 그것이 바로 미소다. 그 미소의 원동력은 바로 자연일 것이다.

떠도는 구름한조각, 발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나는 새 한 마리, 고개 삐죽 내민 풀 한 포기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라고 우겨질 때
(중략)
나 아닌 나 이외의 모든 살아 있음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던 처절함까지도
이때쯤이면 어디에서부터 미소가 된다
                    <미소> 중에서

그의 역동적인 시주(詩酒)의 생활에는 언제나 재밋는(?) 일화들이 넘쳐난다. 때론 포복절도할 일들도 때론 영원한 이별의 강(?)을 건널 뻔한 웃지 못 할 일들도 많다.

처음에는 내가 술을 마시고
술은 어느덧 나를 마시고 어디선가 흔하게 들었던 말들이
사유의 지평을 건드리며 사고를 한다
술은 아주 가끔씩 독립하여
지친 영혼의 허튼 옆구리를 찌르며
예리한 촉각으로 후벼 파내는 사고를 한다
나중에 술은 거침없는 풍랑이 되어 좌초를 무릅쓰고
거느릴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어김없이 쓸어온다
술이 사고하는 날은 몸도 마음도 공유되지 않아
나를 죽여 나를 품어 내는 처절한 행보
                              <술도 사고를 한다> 전문

과음한 다음 날도 그는 여지없이 일어나 숲을 거닌다. 거미줄이 얼굴에 붙어도 저 먼 산과 얘기하며 새벽 숲을 걸어간다. 그 걸음걸음 속에서 삶을 회상하고 반성하며 또 자족한다.

더도 덜도 없이 만족스러워 자족하고 있으니
석부작을 위해 사다 놓은 제주 현무암도 웃는다
거울 앞 사내도 웃고 사내를 바라보는 돌도 웃는다
종일 웃을 수 있을 것 같은 사고의 정돈
국립국악원 별맞이터의 타악삼색도 방긋 웃고
적당한 일거리를 보물처럼 남겼다가 달려드니
데워진 찻잔으로 우전이 녹아들며 또한 웃는다
                                             <돌도 웃는다> 중에서

시인의 말처럼 봄처럼 설레이던 삶이 계속 봄일 수 없듯 뻔한 길인 줄 알면서도 또 뻔해 지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삶이며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은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그런 사랑으로 서로 쓰러 안고 살아간다. 우리를 둘러싼 성벽은 시인의 말처럼 아마도 허튼 층쌓기로 된 성일게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수많은 변수들이 거미줄 같은 조합을 이루며 엮어져 있는 것인 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 많은 조합들을 슬픔이라는 이름의 성벽 속에 묶어 놓았다. 그 성벽은 사랑이라는 기쁨이라는 생명이라는 또 슬픔이라는 성역을 지녔다. 자연과 함께 교감하며,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슬픔이라는 이름의 성역을 희망의 파랑새가 되어 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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