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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사랑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3년 1월
평점 :
무거운 주제는 이유없이 싫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가볍고 신나는 것만 좋은 것도
아니지만, 굳이 나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하면 무거운
쪽보다는 가벼운 쪽을 고르고 싶다.
메마른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인 책마저 나를 진지함
의 구렁텅이(?)에 밀어넣는다면 난 어디에서 스트레
스를 풀어야 하느냐 말이다.
제목 자체가 숨이 막혔다.
책꽂이에 꽂아두고는 복수의 그날을 의해 칼을 갈듯,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길 어언 6개월.
안 읽으면 그만이지 '아름다운 집' 시리즈(?)라는데.... 라는 미련은 또 뭐란 말인가.
결국 뽑아 들었더니 마르크스의 사랑 이야기다.
정의롭기가 하늘을 찌르고 까닭없는 사회적 책임감이 넘치던 20대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마르크스인데, 이 일을 어쩌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산책을 갈 때도 들고 가서 정자에서 읽다가 왔고(사진), 약수터에도 들고 가서 물 받으며 읽었다.
읽은 후엔, 나이에 맞지 않는 순진함으로 등장 인물을 죄다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ㅡㅡ;;
마르크스의 사상보다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손석춘은 이런 식이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사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 소설을 빌려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노동 해방과 사회/공산주의(작가도 해석에 의한 미묘한 차이때문에 병행해서 사용)라니.
완전 구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감히 구식이라는 생각을 가져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무거운 주제는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 의문과 고민들을 통해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됨을 안다.
사상과 이념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세대인 내게 '유령의 사랑'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수많은 숙제를 떠안고 '아름다운 집' 3부작의 마지막 '마흔아홉 통의 편지'를 읽으러 간다.
-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건 권력도 돈도 아니고 외면적인 화려함도 아니야. 바로 자기 자신을 완성하려는 노력이지.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 그것은 스스로 만족을 줄 뿐만 아니라 인류의 행복도 가꾸어준단다.
- 여성이 남성의 이기적 사랑을 배울 게 아니라 남성이 여성의 헌신적 사랑을 배워야 하오. 그게 성 평등이오. / 여성이라는 사실과 헌신적 사랑은 직접 연결되지 않아요. 여성의 본성을 모성이나 헌신이라는 말로 신비화함으로써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삼은 남성들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전략은 20세기에 들어와 여지없이깨졌어요. / 그 식민지가 해방된 다음에 여성은, 그리고 그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는 남성과 여성들의 어린 시절은, 그리고 그들의 삶은 무엇이 될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창백한 이기주의자 남성과 여성들이 합리주의를 내세운 타산으로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아가는 가족, 그것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질서가 가정까지 지배하고 있는 꼴 아니오?
<본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