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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소문으로만 듣던 고래를 드디어 읽었다.
책꽂이에서 누렇게 변해가던 녀석을 해방시켜주었으나 개운치 않음.
어마무시한 소설은 확실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찜찜함도 안겨주니
화제작이면서 문제작으로 다가온다.
< 재미있다 >
천명관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글자로 빽빽하게 채운 종이가 400장을 넘기는 장편이지만 책을 덮을 수가 없다.
구성이 탄탄한 소설, 대반전이 기다리는 소설이라 결말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되는 것과는 다른 속도감.
나도 모르게 읽고 있고,
더 읽고 싶고,
자꾸 책을 잡게 된다.
일일 연속극처럼 이어지는 사건의 반복과 새로운 등장인물의 어우러짐이
하나의 사건으로 전체를 끌고가는 기존의 장편 소설과 다른 맛을 선사한다고나 할까.
< 각종 법칙의 난무 >
초반엔 등장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이야기에 탄력이 붙는 순간부터 등장하는 각종 법칙.
천명관 특유의 비꼼 유머코드가 어우러진 법칙은 만들기 나름이니
만용의 법칙, 유전의 법칙, 알코올의 법칙, 플롯의 법칙, 토론의 법칙, 자본의 법칙, 사랑의 법칙, 지식인의 법칙........ 끝도 없다.
나는 "인연" 이나 "운명" 이라고 불렀을 상황에 등장하는 법칙은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 중간에 요행을 바랄 수 없는 불변의 것이다.
국밥집 할멈의 박색으로 출발한 사건은 금복을 거쳐 춘희에게 각종 법칙으로 이어진다.
한 번 시작되면 정해진 결말로 반드시 가야 하는 법칙의 힘 안에 그들은 그렇게 묶여 있었다.
< 여성의 삶에 대한 인식 >
성적인 묘사가 상당히 많다.
내가 가진 것이 몸 하나여서 잠자리로 보답(?)하겠다는 그녀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강제로 겁탈하려는 남자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여성의 몸이 밥벌이 수단이 되는 사회에 대한 고발, 비난일 수 있겠다고 이해했으나
읽는 내내 불편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받았던 상처로 남의 상처를 알아보고 품어주던 여장부 금복이
부와 권력을 얻어 남자가 된 후 세상의 부조리한 이들과 같아짐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의심할 뻔. ^^;;
< 고래가 갖는 의미 >
소설 고래에는 덩치 큰 존재가 셋 등장한다.
고래와 코끼리, 그리고 춘희.
금복은 고래를 보고 매료되는데 아마 큰 덩치에 반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체격이 좋고 힘이 좋았던 '걱정'을 사랑했던 것 같다고.
그 후에 등장한 코끼리에겐 큰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딸 춘희는 철저히 외면했지만 삶의 마감은 고래 뱃속에서 한다.
금복을 사로잡았던 고래는 인간에게 잡혀 살과 뼈로 해체되고
춘희를 사로잡았던 코끼리는 인간이 만든 자동차에 목숨을 잃는다.
돼지 품종인 바크샤로 불리던 춘희는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감성을 큰 덩치 안에 품었으나
그것을 부조리한 세상으로부터 지켜낸 것인지,
부조리한 세상에 의해 파괴된 것인지 여전히 판단할 수 없다.
덩치만 컸지 자기 몸 하나를 지켜내지 못했던 존재들.
세상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닳고 닳은 이들에게 관대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 마무리 >
4년 전 헤어진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부터 신화, 설화, 판타지의 요소가 충분한데
주제가 명확하지 않고
비유와 함축적 의미로 봐도 무방한 장치가 넘쳐
이야기나눌 것이 많아서 좋구나.
하도 칭찬을 들어 작품은 읽지도 않았는데 알아버린 소설가 천명관을 인정하게 만든 작품, 고래.
진중하게 리뷰를 쓰게 만드는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