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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ㅣ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표지부터 내용까지 모두 독특한 책이다.
읽기 시작하면 정신 놓고 재미나게 본다.
그런데 한창 읽다보면 내가 뭘 읽고 있는 지 모르겠는 이상한 책. ㅋㅋㅋㅋㅋ
한동안 에세이를 주구장창 읽으면서 에세이라면 토가 나오게 싫다고 말하는 중에도 "랩걸"은 거부감 없이 읽힌다.
에세이인데 소설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실험실과 연구와 박사학위와 교수직과 나무와 토양과 곤충 이야기가 한가득.
에세이지만 낯선 세상의 이야기는 신비롭고 재미난 법.
불쌍하고 처절한 일상을 위트와 자조 섞인 웃음으로 넘기는 건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100% 일치한다.
희망을 가져야지, 어렵지만 견뎌야지 따위의 교훈은 없다.
병원 가서 우울증 약이라도 받아오라고 하자 돈이 없고 시간도 없고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고 답하는 랩걸.
그럼 그 약을 받아서 니가 돈을 조금밖에 주지 않아서 집도 없이 사는 나한테 주라고 말하는 그.
돈이 없어 살 집이 없고, 그래서 창문조차 없는 연구실에서 사는데 새벽까지 잠이 안 온다고 전화질을 하는 너를 받아주는 나도 우울하지 않겠냐? 라는 뜻을 내포하지만 비난이 아닌 애정이 듬뿍 담긴 대화.
'힘 내자' 라는 말 따위 한 마디 건네지 않아도 지지리 궁상으로 그냥 전진하는 그들.
랩걸과 그가 연인이 되지 않아 더욱 애절한 로맨스처럼 보여 재미나다. ^^
그렇다면 랩걸은 로맨스 에세이일까?
랩걸의 저자 '호프 자런'은 2016년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 인에 선정된 여성 과학자다.
여성 과학자로는 유일하게 풀브라이트상을 세 차례나 받기도 했고.
지지리 궁상, 밝은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성장기와 나무의 성장을 묘하게 섞어서 쓴 글은,
제대로 된 목재(책의 표현을 빌어서)가 되어 가는 나무와 본인의 자서전이라 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나무는 맨 위쪽 이파리가 맨 아래쪽 이파리보다 작고 색도 옅은 초록색이라고 한다.
작은 이파리들 사이로 해가 들어 아래쪽 이파리가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크기가 작고, 아래쪽 이파리는 적은 양의 햇빛으로 양분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진한 초록색을 가져서 그렇단다.
주변 나무보다 성장이 더디면 다른 나무에게 양분을 빼앗겨 생존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 존재.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게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으로 나무는 자라야 한다.
나무를 공격하는 대상이 생긴다면 (텐트나방 애벌래 얘기가 나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파리에 독소를 만들어내고, 적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그 방법을 다른 나무에게 전달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땅속 신호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기 중의 무언가 (사람은 알 수 없는 유기 화합물을 만들어 공기중으로 보내는 방식이라고 말함) 를 통해서 말이다.
랩걸은 이 놀라운 나무(식물)의 세계를 연구하고 밝혀가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과학계의 여성차별,
자신과 빌의 관계를 라벨을 붙여 규정짓고 싶어하는 시선,
엄마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정신의 결핍,
해서, 엄마보다는 아빠 역할이 더 잘 어울릴 것이라 말하는 당당함을 스치듯 꺼내 놓는다.
랩걸 (Lab Girl).
연구실 소녀.
딱딱한 과학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네 삶과 밀접한 식물 이야기.
책을 덮으면 나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달라져 있음을 느끼리라.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라도 아껴서 쓰게 되리라.
그리고 하루를 그냥 열심히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