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내 어머니의 책
알베르 코엔 지음, 조광희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머니는 나의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꽃이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흔들며 어머니 시들어가는 시절에 나는 머릿속에 커다란 구름이 꽉 들어차고 있음을 느꼈다. 몽매한 시간도 이제는 더 남지 않고 흘렀지만 이따금 시절을 버린 꽃을 떠올린다.

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썼다. 두고두고 꽃을 보면 그는 납작광적처럼 한쪽으로 쏠려버린 어머니, 살아 아프던 기억의 눈동자를, 어머니 입에 넣어주고 싶은 대추알만큼, 없는 것 헤집으며 허전하였다, 허전하였다고 읊을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왔을 때, 나는 스물다섯 개의 방들이 따닥따닥 붙은 한 평짜리 방에서 아기에게 줄 젖을 짜고 있었다. 밤새 뭉친 젖무덤을 주무르며 울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주술을 걸었지만,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고 소식조차 배달되지 않았으며, 검은 얼굴의 그가 낡은구두가 되어 너덜해진 채로 드문드문 방문을 열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기의 방을 오가며 울고 웃었지만, 나는 알았다. 어머니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은 후회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지, 후회를 후회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가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지, 나는 알았다. 그러므로 유축기 한쪽에 놓여진 이 책은 그가 마음으로 건넨 책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나의 어리석음은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살아지는 것처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어오르는 새벽의 엄마'라고 명명된 고생대의 흔적처럼,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드러날까. 알베르 코엔의 '내 어머니의 책'을 빌어 벌받는 자세로 어머니를 기억하는 내가 산다. 부디 코엔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해와 멸시를 이기고 살게 하신 어머니의 이름으로 당신이 빗장을 풀고 나온다면, 그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 한자락 열어준다면, 나도 그렇게 어머니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길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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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내 어머니의 책
알베르 코엔 지음, 조광희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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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나의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꽃이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흔들며 어머니 시들어가는 시절에 나는 머릿속에 커다란 구름이 꽉 들어차고 있음을 느꼈다. 몽매한 시간도 이제는 더 남지 않고 흘렀지만 이따금 시절을 버린 꽃을 떠올린다.

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썼다. 두고두고 꽃을 보면 그는 납작광적처럼 한쪽으로 쏠려버린 어머니, 살아 아프던 기억의 눈동자를, 어머니 입에 넣어주고 싶은 대추알만큼, 없는 것 헤집으며 허전하였다, 허전하였다고 읊을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왔을 때, 나는 스물다섯 개의 방들이 따닥따닥 붙은 한 평짜리 방에서 아기에게 줄 젖을 짜고 있었다. 밤새 뭉친 젖무덤을 주무르며 울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주술을 걸었지만,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고 소식조차 배달되지 않았으며, 검은 얼굴의 그가 낡은구두가 되어 너덜해진 채로 드문드문 방문을 열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기의 방을 오가며 울고 웃었지만, 나는 알았다. 어머니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은 후회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지, 후회를 후회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가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지, 나는 알았다. 그러므로 유축기 한쪽에 놓여진 이 책은 그가 마음으로 건넨 책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나의 어리석음은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살아지는 것처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어오르는 새벽의 엄마'라고 명명된 고생대의 흔적처럼,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드러날까. 알베르 코엔의 '내 어머니의 책'을 빌어 벌받는 자세로 어머니를 기억하는 내가 산다. 부디 코엔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해와 멸시를 이기고 살게 하신 어머니의 이름으로 당신이 빗장을 풀고 나온다면, 그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 한자락 열어준다면, 나도 그렇게 어머니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길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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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요즘 시 어떻습니까?"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P.S.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의 날'은 5공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시인의 '작품' 같다. 이어령 선생은 노태우 정권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기억이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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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59)

이 해가 가기 전에 두 차례 더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연말에 책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지지만 않는다면). 그러니까 내겐 패 두 장이 남아 있는 셈이다. 조금 아껴둘까 했지만, 그 중 하나를 펴보이는 것은 순전히 패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 때문이다. 그녀의 선집이 첫번째 책들이며, 올해는 그녀의 사망 10주기가 되는 해이기에 선집의 출간은 좀더 의미 깊어 보인다.

 

 

 

 

이번에 선집으로 나온 건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민음사)을 포함해서 3권이다. 그 중 표제작은 올초인가 <세계의 문학>에 소개되었기에 출간이 임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3권이 한꺼번에 나올 줄을 몰랐다. 2003년에 <낯선 승객>(해문출판사)과 <태양은 가득히>(동서문화사)가 번역된 바 있기에, 제법 하이스미스 컬렉션의 꼴이 갖추어진 셈이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알랭 들롱이 주연했던 르네 클레망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많은 것이다(아찔한 영화 중 하나이다). 그리고 사실, 내가 접해본 하이스미스도 영화 <태양은 가득히>가 전부이다(그녀가 원작자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이고). 당신도 사정이 비슷하다면, 초급 하이스미스를 뗀 것이 된다.

 

 

 

 

중급 하이스미스는 <낯선 승객>이 히치콕의 영화 <스트레인저>의 원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그녀의 첫 장편인 <낯선 승객>은 "1950년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그게 얼마전 출간된 스포토의 <히치콕>(동인, 2005)에서는 <열차의 이방인>으로도 번역된 <스트레인저>(1951)이다. 그리고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지젝 등의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지젝이 자주 언급하며 높이 평가하는 현대 작가의 한 사람이다(덕분에 나로서도 친숙해질 수 있었던 이름이다). 이후 하이스미스가 1955년 발표한 <재주꾼 리플리>는 그녀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으로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로 두 번 영화화되었다. 이런 정도까지 카바하면 하이스미스 중급이 되겠다.

그리고 이제 고급 단계로 진입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건 이번에 나온 선집들을 읽는 일이다. 다시 소개를 옮기면 그녀는 "1961년 이후에는 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단편 작가로 활동했는데, 영어로 쓴 작품이 독일어로 먼저 번역.소개될 만큼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하이스미스는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두 사람은 112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정확히 같은 날, 같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 고국보다 유럽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로 기억하는 것이다. 위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최근간 포우 작품집, 포, 젊은 날의 하이스미스, 노년의 하이스미스이다. 젊은 날의 하이스미스는 패트리샤 카스 못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지만, 노년의 모습은 실례가 아니라면, <미저리>의 케시 베이츠를 떠올리게 한다(나이란 그런 것이다). 고급 하이스미시언이라면, 빔 벤더스의 영화 <미국인 친구>(1977)이 리플리 시리즈 중 한 편인 <리플리의 게임>(리플리스 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어야겠다. 얼마전 개봉되었던 존 말코비치 주연의 영화 <리플리스 게임>(2003)도 같은 원작의 영화(두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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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실련던 소개 기사를 잠시 발췌해 보면, "이탈리아 여성 감독인 릴리아나 카바니가 2004년 연출한 <리플리스 게임>은 리플리 시리즈의 후기작으로 선과 악의 통념에 대한 반기라는 점에서 감독이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왔던 관심사와 원작의 주제가 맞아 떨어진다. 여기에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이 귀족처럼 우아한 말투로 섬뜩한 범죄자 역할을 능란하게 해내는 좀 말코비치의 탁월한 연기다. 알랭 들롱, 브루노 간츠 맷 데이먼 등 역대 리플리들이 하나같이 독특한 매력을 보여줬지만 <리플리스 게임>의 존 말코비치처럼 배우의 카리스마에 많이 기댄 리플리도 없을 것 같다."(비디오는 언제 나오나?) 

한편, 클로드 샤브롤의 <올빼미의 울음>(1987) 등도 하이스미스 원작이라고 한다(아직 국내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이스미스의 소설들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인정받으며 유럽 감독들에게 인기가 더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겠다. 이 겨울의 추위가 덜 매서워 보인다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쿨한' 세계에 한번 빠져보시길...

두번째 책은 역시나 미국 작가 윌리엄 버로스(버로우즈; 1914-1997)의 <네이키드 런치>(책세상).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 의해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던 작품(1991)의 원작. 영화의 소개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몽환적 결합을 그린 환타지물"로 돼 있다. 마약과 환각 등을 소재한 걸로 아는데, 그러한 경향은 작가가 속했던 195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 문학(비트 문학)의 일반적인 성격을 이룬다(비트 세대의 대표적인 시인은 앨런 긴즈버그이다). <네이키드 런치>는 그 대표작이고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 소설에 뽑혔던 작품. 요컨대, <네이키드>는 (수치스럽게도!) 이젠 정장한 '클래식'의 반열에 들어간 작품이다.

 

 

 

 

세번째 책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급부상한 박찬욱 감독의 문집 두 권이다. 보다 관심을 끄는 건 <박찬욱의 몽타주>(마음산책). 같이 나온 <박찬욱의 오마주>는 소개대로 이전에 나왔던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삼호미디어, 1994)의 개정증보판이다. 나는 그 책을 10년쯤 전에 사서 읽은 듯하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이나 <3인조> 같은, (보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를 아주 '쿨'하게 만들었던 영화들을 찍은 '너무 아는 게 많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예리한 감식안의 영화마니아의 모습을 그 책에서는 읽을 수 있었다(정성일의 평문들보다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개정증보판이라고 하니까 이후에 더 쓴 내용들이 얼마나 포함된 건지 모르겠다.

<내 인생의 영화>(씨네21, 2005)에 실린 꼭지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박찬욱은 필력으로도 영화인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위인이다(<씨네21>에 칼럼을 연재했던 김지운 감독도 책을 낼 만한 위인이고). 그걸 나에게 각인시켜준 게 언젠가 한 신문에(경향신문이었던 것 같은데) 실렸던 그의 칼럼이었다. 이후에 나는 그의 칼럼/산문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길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생각보다는 빨리 충족되었다. 이 또한 <올드보이>의 힘이 아닌가 싶다. 나는 작년 11월말에 모스크바통신에서 <올드보이>의 러시아 개봉에 맞춰 이루어진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옮겨놓은 바 있는데, 혹 생소하신 분들이 있을까 해서 여기에 발췌해놓는다(<아피샤>는 러시아의 공연전문 잡지이다). 나의 군더기말들은 빼고.  

 

 

  

 

아피샤: 서구에서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천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찬욱: 나로선 자신에 대해 쉽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비록 내가 칸느에서 돌아왔을 때 나에 대한 주변의 태도가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팬사인회에 초청됐고, 대통령은 나에게 공로 메달(훈장)을 수여했다. 솔직히 말해서, 전작(<복수는 나의 것>)을 찍었을 때는 나를 죽이려고들 했으니까, 사정이 좋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아피샤: 누가 죽이려고 했는가?

박찬욱: 관객들이다. 물론 말로, 비유적으로 그랬을 뿐이지만, 어쨌든 유쾌하진 않았다. 

아피샤: 원작만화인 <올드보이>는 원래는 다른 감독이 찍으려고 한 걸 당신이 그 프로젝트를 가로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박찬욱: 처음 듣는 얘기다. 나는 만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올드보이>는 제작자가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준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찍도록 한 건 순전히 그의 아이디어이다.


아피샤: <올드보이>가 우연히 칸느의 경쟁부문에 올랐다는 게 사실인가?

박찬욱: 그렇다. 영화사에서는 일반적인 제작 절차에 따라 영화를 (칸느에) 보냈을 뿐이다. 경쟁부분에 오른 건 정말로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기쁜 일이었다. 알다시피, 나의 전작들은 (경쟁부문은커녕) 칸느의 비경쟁부문에도 오른 적이 없다.

아피샤: <올드보이>의 두 주인공은 거의 동갑내기이다. 하지만 복수자를 연기한 유지태는 희생자를 연기한 최민식보다 두 배 정도 어리다. 왜 그런가?

박찬욱: 그건 아주 특별하다. 눈에 띌 정도이기 때문에 너무 거친 설정인지도 모른다. 복수자의 경우 40은 확실히 넘었을 텐데, 실제로는 훨씬 젊어 보인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한 가지 목적에만 걸 경우 그렇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삶을 사는 게 아니므로 늙지 않는다. 복수자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아니며, 그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간주한다. 우리는 한 장면을 찍었었는데(최종 버전에서는 빠졌다), 거기서 복수자는 오대수와의 마지막 대화장면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제스처와 억양을 수정하고, 대화에서의 이런저런 화제 전환시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미리 준비한다. 이 장면을 이후에 잘라냈는데, 관객들이 마지막의 결정적인 대화장면에 대해서 미리 예측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기까지 한데, 왜냐하면 그 장면이 많은 걸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보통의 사람은 특히 극한적인 상황에서 유창하게 말하지 못한다. 우물우물거리거나 더듬거리고 같은 말을 10번은 반복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모르는 걸 알고 있을 때에라도 마치 시간을 지배하듯이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한 스웨덴 작가가(이름은 잊어먹었는데) 학교에 관한 단편을 쓴 게 있는데, 거기서 교사들은 학생들의 생활을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통제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신이 된다. 복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마치 감독처럼 자신의 희생자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사전에 알고 있다. 그래서 오대수가 복수자의 계획을 거스르고자 할 때 그는 신에게 반항하는 인간에 견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아피샤: <올드보이>는 원칙적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될 수 없는 영화이다. 그런데도 왜 해피엔드로 끝냈는가?


박찬욱: 그게 해피엔드라고 할 수 있는가.


아피샤: 하지만 주인공이 행복한 표정으로 웃지 않는가?

 

 

 

 

  

 

 

  

박찬욱: 그는 웃는다고 볼 수 없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프샤(*이 단어는 대문자로 돼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등장인물인가? 영화를 몇 번 봤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웃는 모습이 기억나는가? 그건 망각의 기쁨이다. 그에겐 아무런 좋은 일이 없다. 나는 관객에게 위안을 준다거나 영화의 끝에 가서 낙천주의를 주입시키고자 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 물어본 거라면.


아피샤: 당신이 영화를 찍을 때 모든 일을 아내와 상의한다는 게 사실인가?


박찬욱: 그렇다. 모든 단계에서 나는 아내의 의견을 반드시 묻는다. 아내는 매우 분별력이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고, 영화와는 아무런 관련도 갖고 있지 않다. 주부로서 그녀가 아는 건 생활이다. 때문에 그녀의 충고는 나에게 아주 소중하다. 감독의 일이란 건 신의 일과 닮은 데가 있어서, 일에 몰입하다 보면 정말로 자신을 신이라고 자만할 위험이 있다. 감독들은 종종 유머감각을 잃고 아주 바보스런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아내는 내가 이런 걸 피하도록 도와준다.

아피샤: 아이들이 몇 살 정도가 되면 <올드보이>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박찬욱: 당신의 아이는 몇 살인가? 나의 딸아이는 지금 10살이다. 아이가 15살이 되면, 반드시 보여주겠다.

 

아피샤: 서구의 비평가들은 당신의 영화에서의 물리적 폭력이 강한 인간적 감정의 비유(=은유)라고들 쓴다.


박찬욱: 그건 헛소리다. 영화가 마음에 들면, 비평가들은 문화론적인 설명을 시도하려고 애쓴다. 만약에 그게 잔혹한 영화라면 그들은 아무리 환영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일지라도 자기 사회의 도덕적 표준과 일치하는 어떤 걸 가져와서 그걸 희석시키려고 애쓴다. 사회는 폭력을 단죄한다. 때문에 그들은 폭력이 비유라고 쓰는 것이다.


아피샤: 당신이 비평가였을 때에는 같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


박찬욱: 아니다.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나는 정직한 비평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아피샤: 당신은 <올드보이>의 미국판 리메이크를 찍을 저스틴 린을 만나 보았는지?


박찬욱: 나는 리메이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와 제목에 대한 판권을 샀을 뿐이다. 나는 저스틴 린의 영화를 한편도 본 적이 없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아피샤: 미국판의 주연도 최민식이 맡는다는 소문이 있다.


박찬욱: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벤 에플렉이나 누군가 미국에서 인기 있는 배우를 고를 것이다.

아피샤: 당신은 정말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라면 납치가 그렇게 나쁜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박찬욱: 나에 관한 무슨 인터뷰를 읽어봤는가? 아마도 내 말을 잘못 번역한 것 같다. 종종 내 말이 잘못 옮겨지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 거다.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을 납치한다면 그게 아주 무용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 자기인식과 개인의 어떤 예기치 않은 능력의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아피샤: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에서 당신은 자본주의 일반과 그 한국적 모델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했었다.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박찬욱: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 특정한 결함들을 들춰낼 뿐이다.


아피샤: 그 말은 당신이 예술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믿는다는 것인가?


박찬욱: 물론이다. 예술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의 한국에 대해서 성급하게 폭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비교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1992년까지 우리에겐 독재정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최초로 선출된 민간 대통령에 의해서 우리 나라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때서야 나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한국 감독들은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갖게 됐다.

 

아피샤: 타란티노는 한해 내내 <올드보이>의 광고만 하고 다녔다. 어딜 가든, 어디에서건 이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라고 열변을 토했다. 물론 당신이 그의 찬사에 대해서 응답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킬빌>을 보았는지? 두 사람의 영화가 아이디어상으로 서로 가깝다고 느끼지는 않는지?


박찬욱: 나는 1부만 보았다. 매우 아름다운 영화이다. 하지만, <올드보이>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아피샤: 어떻게 아직까지 <킬빌2>를 볼 수 없었는지?


박찬욱: 나는 대체로 영화들을 많이 보지 못한다. 일이 너무 많다.

 

아피샤: 그럴 만하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 생각엔 어째서 당신을 포함해 타란티노와 라스 폰 트리에 등 몇몇 거장들이 거의 동시에 복수에 관한 이런저런 영화들을 찍었다고 보는가?

박찬욱: 복수란 건 촉매이다. 그 속에서 인간이 멋지게 드러난다. 거기에는 언제나 한 인간을 파괴한 어떤 객관적인 원인, 사건이 선행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가장 솔직하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문명사회는 악에 대한 응징의 수단으로서 개인의 복수를 부정한다. 하지만, 복수에의 열망이 그 때문에 없어지는 건 아니다.


아피샤: 복수에 관한 당신의 3부작 중 마지막 편은 언제 나오는가?

 

박찬욱: 지금 막 찍기 시작했다. 생각에는 2월말이나 3월초까지는 끝내려고 한다. 이번 영화는 한 여자의 복수에 관한 것으로,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의 모티브와 플롯을 합금한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한 여자가 15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그리고 풀려나서는 그녀가 겪은 일에 책임이 있다고 간주한 남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아피샤: 3부작을 끝낸 뒤의 작업에 대해서는 이미 정해두었는가?

 

박찬욱: 뱀파이어에 관한 영화이다. 제목은 <살아있는 악>이 될 것이다.

 

아피샤: 자신의 영화의 주제(혹은 플롯)에 대해서 아주 빨리 고안해낸다는 것이 사실인가?


박찬욱: 그건 비교의 문제이다. 가령 김기덕은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작업한다. 그와 비교한다면, 나는 스탠리 큐브릭이다.

 

아피샤: 당신은 큐브릭을 좋아하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감독들은 누구인가?


 

 

 

 

 

 

   

박찬욱: 한국 감독 중에 김기영이라고 있었다. 백과사전에는 그가 한국 쓰레기 영화의 왕이라고 씌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아주 대담하고 훌륭한 영화들을 찍었다. 그는 용기있고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였다. 영화를 찍을 기회를 잃게 되었을 때, 그가 살던 집에는 화재가 일어나고 그는 불길에 타 죽었다.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닮고 싶지는 않다.

 


 

 

 

 

 

 

 

아피샤: 그럼 당신이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박찬욱: 가능하다면, 마르 베르이만을 닮고 싶다...

 

 

네번째 책은 박찬욱 감독도 좋아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를 해설하고 있는 홍대화의 <도스또예프스끼>(살림)이다. 박찬욱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유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유머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면서 그의 문학적 교양을 인정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아나키스트들의 집단 살인 장면은 <악령>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감독은 고백한 바 있다(말이 나온 김에 장석원의 첫시집 <아나키스트>도 신간이다). 참고로, 발레리 카프리스키가 주연한 안제이 줄랍스키의 영화 <퍼블릭 우먼>(1984) 또한 원작은 따로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주된 모티브로 하고 있는 영화이다. 줄랍스키는 그 이듬해에 소피 마르소를 주연으로 하여 <격정>(<성난 사랑>으로도 출시돼 있다)을 찍었는데,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고전으로 치자면, 세르반테스의 <돈끼호떼>(창비사)가 민용태 교수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됐고, 작년에 서거 100주년을 맞았던 안톤 체홉의 <4대 장막전>이 실제로 작품을 국내 무대에 올렸던 연출가 전훈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이 번역의 의의는 레제드라마가 아닌 공연텍스트로서 '체홉'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겠다). 그리고 20세기 영국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인 E. M. 포스터 선집으로 나온 두 권 <전망 좋은 방>(열린책들)과 <모리스>.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들과 함께 컬렉션을 만들면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오랜만에 출간된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책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조르부 바타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 지배 바깥의 공동체, 즉 조직, 기관, 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 장-뤽 낭시의 논문 '무위(無爲)의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진 모르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와 그에 대한 낭시의 재응답인 '마주한 공동체'를 함께 싣고 있다. 중심의 부재 또는 빈 중심으로 현시되는 역설적이고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내재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는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을 프랑스 철학계의 두 거목이 함께 모색하는 이 책은 20세기 이후 '공동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며 멀리 나아간 논의를 담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지만, 정치제도와 공동체라는 화두는 내년에 새삼/새롭게 숙고되어야 할 중요한 테마이다. 블랑쇼/낭시의 책은 우리의 사고를 점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 블랑쇼에 대해서는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가 유용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레비나스가 쓴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 2003)이 소개돼 있다(사진은 두 사람, 블랑쇼와 레비나스이다). 그의 비평서로는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0/1998)과 <미래의 책>(세계사, 1993)이 번역/소개돼 있다. 소설로는 <죽음의 선고>, <알 수 없는 사람 또마> 등이 금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었다. 한편, 2003년 블랑쇼의 죽음 이후에 한 대학원신문에서는 블랑쇼 특집을 꾸미기도 했었는데, 그때 이번에 출간된 책의 역자가 쓴 글을 잠시 옮겨본다.

 

-자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장례식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블랑쇼의 장례식(그의 사망 나흘 후인 2003년 2월 24일)에서도 장문의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어떻게 바로 여기서, 이 순간에, 이 이름, 모리스 블랑쇼를 말하면서 떨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로 시작하는 추도문은 블랑쇼를 읽었던 많은 독자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느꼈을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블랑쇼는 단순히 한― 아마도 위대하다고 불러야 할 ― 철학자도, 작가도, 문학비평가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어떤 문예, 사상의 사조와 흐름을 주도하는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목소리였다. 벌거벗은, 초라한, 무력한, 사라져 가는 그러나 그래서 찬란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언제나 어떤 과거보다 더 먼 과거로부터 들려왔지만 또한 어린아이의 속삭임이기도 했고, 또한 절규이기도 했다. 같은 헐벗은 어린아이들, 즉 삶과 사회체제의 잔인함에 고통 받는 타자들의 숨결을 듣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없는 절규….

-블랑쇼는 살아 있을 때, 은둔 때문에 오히려 ‘알려진’ 작가였다. 각종 매체(신문, 방송,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를 문학이 비켜 나갈 수 없게 된 시대에, 각종 매체에 의존해 얻을 수 있는 선전효과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블랑쇼의 은둔은 오히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의 은둔은 그의 사상을, 그의 글쓰기, 그의 작품을 신비화시켰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 신비화 가운데 그의 작품이 오해될 것이라고, 그리고― 다음의 말을 어떠한 감정의 과장도 없이 쓴다 ― 그 신비화에 블랑쇼가 저항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블랑쇼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 1인칭 ‘나’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거리 아무데나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자들, 하지만 ‘헐벗은 어린아이들’로서의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들,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들, 어떠한 1인칭의 권력도 소유하지 못한 자들, 다만 헐벗음으로만 그 권력을 거부하고, 그 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던 자들. 필요하다면 결국 자신의 사라짐·지워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제 3자들, 3인칭의 인간들, 다시 말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타자들. 

-블랑쇼가 거부하고자 했던 1인칭의 권력(그 권력을 그가 의도 가운데 원했을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은둔을 통해, 나타나지 않음으로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을 그에게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신비화된 1인칭 블랑쇼로부터 그의 작품을 읽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다만, 단순히, 그의 작품에서 3인칭의 인간들, 타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에, 작품으로부터 그를 이해하는 데에, 작품으로부터 한 개인 블랑쇼의 은둔·지워짐이란 3인칭이 말하기를 원했던 그에게는 바로 글쓰기의 실천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단어들, 문장들 사이로 사라지기를 원했고, 이제, 그의 죽음 이후로, 그 사라짐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과제는 그의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블랑쇼는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중 아무나, “‘그 누군가’가 죽는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 말은, 정확히 하이데거에 반대해, 죽음으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의 본래성을 회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나‘를 이름 없는 자의 비본래성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죽음으로의 접근, 즉 ‘나’아닌 타자가 되기, 비인칭적 실존에 기입되기, ‘내’가 통제할 수 없는―의미로, ‘나’의 존재의 ‘의미’로 포착할 수 없는― 익명의 실존으로 되돌아가기. 그렇게 귀결되는 블랑쇼의 죽음에 대한 사유와 그 자신의 죽음 사이에 어떤 연결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블랑쇼가 마지막으로 써서 출간한 작품에 붙인 제목은 <나의 죽음의 순간>(1994)이었다. 거기서 그는 나치의 총구와 마주한 그(또는 나)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를 대신해 이 가벼움의 감정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갑작스럽게 다가온, 물리칠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죽는―죽을 수 없는. 아마도 황홀경. 차라리 고통 받는 인간성에 대한 연민의 감정, 죽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 그때부터 그는, 은밀한 우정으로, 죽음과 맺어졌다.” ‘나’의 죽음, 심각한 것이 아님, 정확히 말해 심각할 수 없음―수동성으로서의 죽음의 체험―, ‘가벼움’ 또는 아니면 ‘행복감’. 우리들 중 누구도 블랑쇼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의 옆집에 살던 한 대학생이,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언론·방송에 그의 죽음을 알렸고, 그에 따라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을 뿐이다. 

-위대한 한 작가의 죽음인가? 그의 죽음은 의미심장한 것인가? 아마, 다만, 단순히, 우리들 중 아무가 죽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 안에 있는 ‘내’가 죽어나간 것이고, 한때는 ‘나’(지금 쓰고 있는 필자, 내가 아니라 그의 독자 중 아무나 될 수 있는 ‘나’)를 스쳐갔던 시간이 이제 결코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아니 죽어버린 것이다. 결국 블랑쇼의 죽음이 전해주는 감정은 ‘나’의 어떤 부분이 도려내어질 때 다가오는 통렬함이다. 그러나 그 통렬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내’가 잘 아는, ‘나’와 가까운 자였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가 결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무엇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통해 전달되는 우정으로, ‘나’로 하여금 ‘우리’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의 글쓰기’ 또는 ‘우정의 글쓰기’, 그 글쓰기를 그의 죽음과 별개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나마 다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 가장 깊이 몰입했던 한 비평가의 죽음은 또한 그의 새로운 삶이기도 하다. 텍스트로서의 삶. 우리에게 그 삶이 주어졌고, 우리에겐 지금 그걸 읽을 '자유'가 있다...

 

05. 12. 06. 

 

P.S. 개인적으로 바타이유와 블랑쇼 읽기는 내년의 과제 중 하나이다. 그의 책들이 '고아원'에 보내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내년엔 아마 벤야민이나 들뢰즈만큼 이들의 이름을 자주 들먹이게 될 것이다. 책이란 게 도대체가 읽어치워야지만 버릴 수라도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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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60)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로는 올해의 마지막 연재가 될 듯하다(그러길 바란다). 지난 3월에 31번째를 썼으니까 10개월 못되는 기간에 30편의 페이퍼를 썼다. 그 정도면 어지간하다고 생각한다(내년까지 100회 정도를 채우고 방향전환을 모색하든지 해야겠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단연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이다. 2월초 러시아에서 돌아오자 마자 한 지인에게 물어본 것이 <트랜스크리틱>의 번역 유무였을 정도로 나로선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다. 작년에 나온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에 이어서 거르지 않고 올해도 그의 주저가 번역/소개된 것이 반갑다. 일어본은 저자가 여러 차례 개작을 했으며, 영역본도 올 5월에야 MIT출판사에서 나왔다(정확하게는 2003년에 나왔다. 올 2005년에 나온 건 페이퍼백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당연이 이 페이퍼백이고. 한편, 영역자는 <은유로서의 건축>과 마찬가지로 사부 고소이다. 내가 알기에 고진의 책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포함해 3권이 영역돼 있는 듯하다). 그 책을 나는 지난 가을에 주문해서 서가에 꽂아두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트랜스크리틱>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책이다. 지금껏 이렇게 두꺼운 책을 쓴 적이 없으며, 또 이렇게 시간을 들여 쓴 적도 없다. 나는 거의 10년 동안 이 책에 몰두했다. 고치고 또 고치기를 거듭한 결과, 40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에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해서, 이 책은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어찌 독서를 주저할 수 있으랴!

부제가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인 데서 알 수 있지만, 고진의 책은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는 "모든 고정관념(외형)이나 과거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텍스트(주로 <자본론>) 속에서 마르크스를 읽는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투철한 통찰이고, 그 통찰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쉽게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소개의 말을 좀더 옮겨오면, "그는 경제학자들이 <자본론>을 단지 경제학 책으로만 본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 <자본론>에서의 '비판'이 자본주의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의 욕동(欲動, drive)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고, 나아가 그 근저에서 교환행위에 불가피하게 따라다니는 난점들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은 자본주의로부터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쉬운 출구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을 밝힘으로써 오로지 자본주의에 대한 실천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냄으로써 실천 가능성을 시사하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인데,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가 마르크스와 칸트를 결부시킨 이유이다."

즉, 그는 "자본주의 경제나 국가에 대한 계몽적 비판이나 문화적 저항에 머물러 있는 데 만족할 수 없었고, (...)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하는 일"에 나선다. 우리의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이 놀랄 만한 책은 현대 자본 제국에 대한 대항의 철학적/정치적 기초를 다시 주조하는 가장 독창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라는 꽉 막힌 상황을 타파하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현실성을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지젝의 종종 과장하는 버릇을 감안하더라도 고진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한 셈이다(참고로, 올해엔 '문화이론의 엘비스' 지젝에 관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미지는 영화의 포스터이다. 조만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고진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이것은 모험/실험을 감행하는 주장이며 그러한 '위험' 자체에 의의가 있기도 하다(오직 하이에나류의 비평가들만이 '안전한' 말들만을 늘어놓는다). 그가 책에 만족감을 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위험'과 관련될 것이다. 여하튼 고진 비평의 진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니 연초의 휴가를 물건너가서 라운딩하며 보낼 수 없는 이들에게도 진정한 '트랜스'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선사해줄 책이겠다.   

 

 

 

 

물론 이 책은 고진의 우려대로 일반독자가 읽기엔 좀 어렵다. 해서, 사전에 예비적으로 몇 권 읽어두는 게 좋겠다. 내가 고진에 입문하게 된 책은 <탐구1>(새물결, 1998)이었는데, 역시 <트랜스크리틱>의 역자 송태욱씨의 작품이다(그는 최강의 고진 번역자이다). 아주 쉽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윤리21>(사회평론, 2001)을 권하겠다. '트랜스크리틱'의 아이디어가 이미 제안되고 또 시험되고 있는 책이다(이 역시 역자는 송태욱). 물론 난해하지 않으며 죽 읽어나갈 수 있다. 두 가지 책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트랜스크리틱>을 바로 손에 집어들어도 좋겠다. <일본 정신의 기원>(원제는 <일본정신분석>),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은유로서의 건축> 등은 옵션이다(<마르크스>만을 아직 나는 안 읽었다. 참고로, 고진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윤리21>과 <일본정신의 기원>을 같이 참조해줄 것을 권했다).

만약에 이런 책들이 너무 난해하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게다가 재미마저 없다고 하면 당신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걸출한 비평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겠다(너무 크게 유감스러울 건 없다. 덕분에 지출이 많이 줄어드니까). 하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트랜스크리틱>을 '소장용'으로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두시길 바란다(그래야 양서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이상에서 이미지로 나열한 책들은 번역자 송태욱씨가 올해 <트랜스크리틱>을 제외하고도 낸 번역서들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그린비)뿐이지만(저자는 고진 사단에 속한다), 이러한 번역량 또한 경탄에 값한다. 내가 무슨 권한이 있다면 올해의 인문서 번역가상이라도 주고 싶다. 교양과학서에서 이에 견줄 만한 번역자는 이한음씨이다. 그가 올해 번역한 책들이 알라딘에서 12종 가량이 검색된다(얇은 책들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주요한 책들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도킨스의 책 <악마의 사도>와 <조상 이야기> 두 권을 옮긴 것만으로도 이한음씨 또한 올해의 번역가로서 손색이 없다. 나의 격려가 무슨 보탬이 되지는 않겠지만, 연말에 즈음하여 올 한해 두 번역자의 활약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들이 신뢰할 만한 역자들의 솜씨로 번역돼 나오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흔하진 않다(반대로 그런 책들이 엉터리 역자들을 만날 경우의 끔찍함이라니!).

  

두번째 책은 윤성우 교수의 <해석의 갈등>(살림). 부제는 '인간 실존과 의미의 낙원'이다. 알다시피 올해 타계한 철학계의 최고 거물이 폴 리쾨르(1913-2005)인바, 해석학의 권위자로서 그의 주저라 할 만한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의 해설서가 출간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해석의 갈등'은 '해석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란 뜻이다). 리쾨르 전공자인 저자는 리쾨르의 삶과 <해석의 갈등> 전후 시기의 철학을 정리줌으로써 리쾨르 입문서를 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리쾨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이기도 한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동문선,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윤교수에 따르면, "번역상의 몇몇 혼란이 옥의 티로 남았지만 리쾨르의 자전적 삶과 학문적 삶에 대한 연구서로는 더 이상의 책은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책이다. 이와 함께 읽어볼 만한 입문서로는 윤교수의 <폴 리쾨르의 철학>(철학과현실사, 2004)가 있다고.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1969)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과 함께 현대 해석학의 최고 업적으로 간주되는 고전이다(비록 논문집이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아쉬운 건 <진리와 방법>이 아직 우리말로 완역되지 않은 사실이다(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진리와 방법>의 불어본 출간을 주도한 사람이 리쾨르이다. 불역본도 완역본은1996년에야 나왔다고 하니까 한국어본이 지체되는 건 얼마간 이해가능하다. 참고로, 영역본은 두 차례 나왔다). 거기에 비하면 10권 가까이 번역돼 있는 리쾨르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교수의 번역 용례에 따라) <생생한 은유>나 마지막 주저 <기억, 역사, 망각>(2000) 등은 곧 번역되었으면 싶다(이미지들은 영역본의 것이며 후자는 일부가 올해 계간 <세계의 문학>에 소개된 적이 있다. <기억, 역사, 망각>의 러시아어 완역본은 작년에 출간됐다). 리쾨르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철학적 작업의 결산 내지 종합"이라고 규정했다는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1990;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 제목으론 'Oneself as another')도 조만간 소개되었으면 싶고.

 

 

 

 

여하튼 <해석의 갈등>에 포함된 논문 몇 편을 나는 겨울방학에 읽어볼 듯하다(나에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 있는데, 러시아어본은 완역본이 아니다). <해석의 갈등>과 함께 리쾨르의 후기 주저로 꼽히는 건 1983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시간과 이야기>(전 3권) 시리즈이다. <존재와 시간>이 20세기의 책이라면, <시간과 이야기>는 21세기의 책이 될 것이란 예언도 있을 정도인데,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후설 현상학에서 출발한 리쾨르의 여정이 '이야기(내러티브)'에 이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두 저작의 커넥션을 '존재-시간-이야기'로 묶고, 하이데거의 못다한 이야기가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상상하길 좋아한다. 시간이 곧 이야기인 이상 존재의 해명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우 문학은 철학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먼 장래를 위해 남겨놓은 나의 숙제이다.

 : Imagination and Chanc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hought of Ricoeur and Derrida (Suny Series in Intersections : Philosophy and Critical Theory)

여담 한마디. 작년에 타계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5)는 1960년대 초반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서 리쾨르의 강의 조교를 했었다(윤성우 교수의 책에는 데리다의 생년이 192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리쾨르보다 일 년 먼저 세상을 떠난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학생이던 1953년에 <에스프리>지가 주관하던 세미나에서 리쾨르를 처음 만났다. 데리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세미나에서 '역사와 진실'이라는 주제로 리쾨르의 발표가 있었는데, '명확하고 우아하고 논증력이 있고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권위가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의 참여를 보여주는' 발표였다고 한다."(69쪽) 데리다의 '제자' 박이문 선생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에는 이 시절 '강의조교' 데리다의 지도를 받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나의 스승 데리다'란 추모의 글에 실려 있다. 영어권에서 나온 연구서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철학을 비교한 <상상력과 우연: 리쾨르와 데리다 철학 간의 차이>(1992)도 출간돼 있다.

 

 

 

 

세번째 책은  들뢰즈와 레비나스 철학의 전문가인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민음사). 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책은 <차이와 타자>에 실려 있는 '아이와 초월' '일요일이란 무엇인가?' 두 편의 글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즉 일상적인 것들에 철학적 담론의 육체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읽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보다 적합한 제목은 '일상의 철학적 구원'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붙인 부제 자체가 '태어나 먹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이기에 더욱 그렇다(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을 나는 이미 여러 잡지들에서 읽었었는데, 본문의 장들 가운데서 제목을 고르자면 '셰익스피어의 유령학' 정도가 어떨까 싶다. '일상의 모험'이란 제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지만, 주제를 알자면 나는 저자가 아니라 그저 한 독자일 뿐이다!).

저자가 '모험'이라고 이름붙인 건 내가 보기엔 일상성 자체가 갖는 모험성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범박한/세속적 일상을 철학적으로 담론화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그러한 시도를 '모험'으로 간주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한편으론 저자는 모범적인 철학적 담론 바깥으로의 모험은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들은 단정하고 정연하다. 그래서 결코 '탈'나지 않는다. 가령 니체 전공자인 김진석 교수의 문장들과 비교해 보라).

그러한 시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일상(quotidien, Alltaglichkeit)'라는 식으로 우리말 '일상'에 불어와 독어의 일상을 병기해놓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저자의 작업이 일상에 대한 독어와 불어식의 철학적 사유를 우리식 일상에 번역해오는 과정이라는 걸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럴 때 우리의 일상은 '보편적' 일상으로 격상되는 것이기도 하고. 당연히 책은 철학논문 못지 않은 각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가장 먼저 나오는 각주는 M. Heidegger, Zein und Ziet,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독어본의 쪽수이다. 두번째 각주는 메를로-퐁티의 <눈과 정신> 불어본 쪽수이고. 자신의 '일상'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은 별 매력을 주지 못하겠지만(그 일상이 '철학적 일상'이 아닌 이상), 자신의 '교양'이 궁금한 독자라면 기꺼이 읽으며 경탄해볼 일이다. 저자는 동시대 젊은 철학자들 가운데 최고의 철학적 교양을 자랑하므로.

 

 

 

 

레비나스(과거엔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됐었으나 '에마뉘엘 레비나스'로 표기가 바뀌었다. 이 또한 '교양'에 속한다) 전공자로서 서동욱 교수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란 역서를 갖고 있는데, 우연찮게도 그의 은사이자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의 역자인 강영안 교수의 레비나스 연구서도 이번에 출간됐다. <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이 그것이다. 책에 실린 몇 개의 논문을 역시나 잡지들에서 읽은 바 있는데, (레비나스 철학의 강력한 소개자이자 옹호자인) 저자의 레비나스 연구를 한번 결산하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전문서 범주에 속할 듯하지만,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독해 볼 만한 책. 부록으로 레비나스의 저작과 2차문헌, 그리고 국내의 연구현황 등을 개관하고 있기에 연구자들에게는 아주 요긴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론 레비나스에 관한 책들을 준-전공자 정도의 수준으론 갖고 있는데,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하는 책은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과 알랭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이다. 두 권 다 어렵지 않으며 읽기 편한 책이다. 레비나스의 대담으론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이 번역돼 있고, 리처드 커니의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도 참조할 수 있다.  

 

 

 

 

네번째 책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 이장욱의 첫 비평집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사)이다. 그가 올해 낸 책들이 이로서 이론서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을 포함해 세 귄이 된다. 이런 부지런한 저자를 친구로 둔 덕에 나는 지난 주말 한 모임의 뒷풀이 자리에서 저자로부터 사인된 책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시, 소설, 비평, 연구 가운데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우문에 그는 '시'라고 답했다. 그는 내 기억에 언젠가 현대시 동인상을 받은 '유력한'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책은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란 부제를 달고 있으니 '시인의 시읽기'인 셈인데, 저자에 따르면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에세이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책은 요즘의 추세와는 다르게 단 한 개의 각주도 달고 있지 않다). 나는 몇 편의 글을 잡지나 시집 해설 등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한데 모아놓으니까 보기에 즐겁다(제목과는 달리 결코 우울하지 않다!). 책에 대한 리뷰는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겠지만(김춘수의 시 한편을 다룬 '구름과 장미의 나날들'에 대한 글이 가장 먼저 씌어질 듯하다) 얼핏 받은 인상은 그의 비평 혹은 에세이들이 매우 몽타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라는 지시 형용사나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아주 자주 사용한다. 그걸 종합하여 말하자면, 그의 글들은 산책자 혹은 여행자의 즉물적인 인상들의 기록처럼 읽힌다. 그 인상들이 개념어들을 통해 반추될 경우에도 그 과정은 산책자/여행자의 보폭과 리듬을 유지한다. 그는 멀리 지나가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시와 시구들을 말하고 있는 것(책갈피에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저자의 스냅사진이 실려 있다). 그게 내가 받은 인상이다.     

 

 

 

 

시인 이장욱만큼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비평가 권혁웅 교수가 '신화에 숨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란 부제를 단 신간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문학동네)를 출간했다(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권혁웅의 가장 좋은 책이다). 지난번에 낸 비평집 <미래파>를 내가 아직 다 읽어보기도 전의 일이다(내가 읽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책을 써내는 이들이 나는 싫다!). 비평가 이장욱이 '다른 서정'이라고 부르는 최근 시의 경향들에 대한 비평가 권혁웅의 호칭이 '미래파'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지는 책은 '태초에'라니!

저자에 따르면, "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 모든 신화는 사랑이다. 한 사람의 꿈을 움직이는 힘, 한 편의 시를 추동하는 힘도 그렇다. 이것은 사랑의 산화가 아니라 신화의 사랑에 관한 책이다. 신화에 숨은 몸의 논리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신화에 관한 정신분석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간은 '정신분석서'로 분류되어야 하겠다. 서동욱 교수의 책과 같이 나란히 서재에 꽂아놓으면 '일상과 신화'라는 그럴 듯한 풍경이 완성될 듯하다. 정신분석이란 말이 나온 김에 참고로 지적하자면,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정신분석>(민음사, 1999)의 원제가 'Au Commencement E'tait L'amour', 즉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이다. 신간의 제목을 거기서 빌어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지막 다섯번째 책은 강유원의 서평집 <주제>(뿌리와 이파리)이다. 소개에 따르면, "'회사원 철학박사'로 잘 알려진 강유원이 그간 써온 서평들을 여섯 주제로 묶어 펴낸, 본격적인 주제서평집이다. 저자의 세 번째 서평집이기도 한 이 책은 다른 일반 서평집들과 달리 단순한 서평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길 안내에 특히 중점을 둔 서평집이다."  

데뷔 서평집인 <책>(야간비행, 2003) 이후 이제 2년 남짓 가량 되었지만,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혹은 '교양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군더더기의 말은 불필요하겠다. 한데, 이번에 나온 <주제>가 세번째 서평집이라면, 두번재 서평집은 <책과 세계>인가(아니면 <몸으로 하는 공부>)? 사정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분명히 내 돈 주고 산 책인 <책>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러시아에 다녀온 이후로 보지 못한지라 나는 <책과 세계>(살림, 2004)에 대한 몇 마디 적어본 전력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주제> 또한 읽을 만할 거라고 짐작한다(몇몇 글들은 그의 블로그 등에서 읽은 듯하다).

다시 소개의 글을 옮기자면,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교양이란 '앎과 삶의 일치'에 있다.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주제서평의 '주제'는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을 천착하고 있다." 즉, 그의 저작 혹은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진정한 교양인' 되기이며 그 권고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했지만, 그건 다른 말로 앎(머리)과 몸의 일치이기도 하겠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뜻하는 바가 그게 아닐까? 이때 '몸'은 추상적인 몸이 아니다. 그가 '근육질적인' 문체를 갖고 있다고 언젠가 적었지만, 그의 사유를 담고 있는 문장들은 잘 단련된 바디빌더의 몸을 연상시킨다. 주로 뼈와 물렁살로 이루어진 나와는 다른 차원의 글이고 몸인 것. 한데 이로써 형성되는 '교양인의 자세'는 김규항의 'B급 좌파적 자세'이면서 동시에 영화 <공공의 적>에서 뱃살 늘어진 형사 설경구가 아닌 근육질의 냉혈한 이성재를 더 닮은 자세이기도 하다. 그 또한 자본주의의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Money talks!)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철저하게 견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류적' 앎이고 진리라면, 그와의 차별화를 위해서 당연히 요청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결단코 타협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 그게 근육질의 교양이며 혁명적 교양이다(강유원의 글쓰기가 고압적인 태도를 동반하는 것은 그러한 '교양'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비록 강유원의 서평들에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바탕이 물렁한 데다 평소 운동과 인연이 없는 나로선 그냥 <말랑말랑한 힘>과 <물렁물렁한 책>들에 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빵들을 나는 좋아한다. 언젠가는 그 '말랑말랑한 빵에게' 바치는 시도 썼으니 이런 식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먹어보면 안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살짝, 그렇다, 살짝 구워진다는 !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밀은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는다, 살살 녹아난다. 비밀은 사랑스럽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여기저기서 주무르고 달군다. 더러는 태우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살짝, 그렇다, 살짝 미쳐간다는 !

그것이 또한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침내 말랑말랑한 빵이 구워졌다.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내가 아직까지 믿는 것은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이다. 가령 티베트의 수도이자 라마교의 성지 라싸의 사원을 향해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그러니까 몸의 다섯부분(五體) 즉 이마, 오른쪽 팔꿈치, 왼쪽 팔꿈치, 오른쪽 무릎, 왼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수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리는 여정을, 하지만 환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감내하며 걸어가던/던져가던 티베트 어린아이들의 발걸음 같은 것 말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하지만, 삶은 앎의 극한이다. 앎은 삶의 궁극적인 모순에 가닿기엔 너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것을 앎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해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는 이래저래 멀고도 멀다. 강유원의 길이든, 티베트 아이들의 길이든 말이다. 그저 오늘도 읽고 또 읽을 따름이다...  

05. 12. 20.  

 

 

 

 

P.S. 올해의 마지막, 더불어 최악의 스캔들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황우석 스캔들'이다. 조만간 그가 과욕을 부린 국민 과학자였는지 희대의 사기꾼이었는지는 밝혀질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사태 때문에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면, 단연 <골렘>(새물결)이다. 원제는 'The Golem: What You Should Know about Science'(1993), 그러니까 '과학에 대하여 당신이 알아야만 하는 것'. 소개에 따르면, "골렘은 유대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온순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언제라도 미쳐 날뛸 수 있는 존재이다. 저자들은 과학은 골렘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흥미진진한 일련의 사례들을 통해 이런 구축 - 관측과 실험 - 이론의 확증이라는 전통적인 과학상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친다."

보다 구체적으로 "책은 과학적 연구 결과의 수용과 검증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던 7가지 사례들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사례 중에는 상대성 이론 검증 실험 같은 유명한 연구에서부터, 상온 핵융합처럼 신문의 과학면에서 봤음직한 연구 등 다양한 사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과학의 '뒷골목'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인문학의 '지적 사기'를 크게 떠들어댄 과학자도 있었지만, 돌이켜보건대 인문학의 사기는 '과학적 사기'에 비할 바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래저래 인문학은 과학에 미달이다. 모자란 것들 같으니라구!.. 

 

 

 

 

P.S.2. 내친 김에 개인적으로 꼽은 2005년의 책 다섯 권을 골라둔다. 기준은 기억해 둘 만한 책들 가운데 내가 갖고 있는 책으로 읽었거나 읽고 있는 중인 책으로 한정했다. 도정일, 최재천 교수의 <대담>, 가라티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은 최근에 내가 '지지'를 표명했던 책들이다. 김윤식 교수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이나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는 내가 좋아하는 '생애전'들이다. 두 사람의 생애는 각각 문학과 철학으로 변형되었다. 문학으로서의 삶, 철학으로서의 삶.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걸 새삼 한번 더 기억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루소의 자전적 <고백>. 물론 한번 언급한 바 있듯이 복간본 번역이다. 많은 고전들이 올해 번역돼 나왔지만 지금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건 이 <고백>이다. (어줍잖은) '픽션'에 대한 선호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면(하물며 판타지라니요!) 확실히 늙어가는 모양이다(곧 가속도가 붙을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그런가?..

P.S.3. 거기까지 쓰고 집에 가는 길에 <트랜스크리틱>의 서문을 읽었는데, 부실한 교정이 눈에 띄어 적어둔다. 역시나 생몰연대에 관한 것. 16쪽에서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생몰연대가 '1908-65'로 돼 있는데, '1809-65'의 오타이다. 오타야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왜 체크가 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19쪽에서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의 생몰연대가 '1924- '라고만 돼 있는데, 그는 이미 지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일어본에 오기돼 있는 걸까?). 좋은 번역은 좋은 교정을 수반할 때 더욱 빛이 난다. 좀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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