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내 마음에 불꽃 하나
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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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때 내 짝꿍은 글씨를 참 잘쓰는 아이였다. 나는 짝꿍을 따라 허리를 펴고 앉아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짝꿍처럼 금세 내 공책에도 선생님의 별 도장이 다섯개 찍혔다. 중학교때 내 앞에 앉은 친구는 영화광이었다. 명화극장은 물론이고 EBS 세계의 명화까지 섭렵하고 있어 나는 매주 일요일이면 텔레비전 영화를 보았고 다음날 우리는 영화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대학교때 친구 역시 나보다 월등한 글쓰기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등을 보며 서툰 다짐을 하곤 했다. 나도 글을 쓰리라. 결국 나는 졸업작품을 제출했고 호평을 받았다. 그렇게 수많은 친구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던 목록을 내게 나눠주고 사라졌다.

매일 2등만 하던 화자가 1등을 하던 친구 P를 이국땅에서 재회한다.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P는 승승장구하는 삶이었다.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 없었을 만큼 P는 천재적이었다. 화자는 현재 작가주의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얻고 있고 P는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접고 북유럽 작은 마을에 기거중이다. P는 화자가 흠모했던 여자의 남편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화자는 P의 천재적인 생활 이면을 보게 된다. 그는 알콜홀릭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한 여자에게 그늘일 뿐이다.P가 1등을 유지하기 위해 남몰래 숨통을 조이고 알콜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이면은 화자에게 아픔이다. 몰랐으면 좋았을 뻔한 그림자다. P가 있었기에 어쩌면 자신의 삶도 지탱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외롭고 쓸쓸하다. 친구들이 내게 물려주고 떠난 곳에 나는 혼자 있다. 어떤 점술가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더 뛰어난 사람은 나의 언니였노라고. 매일 책을 보는 언니를 따라, 매일 음악과 글 쓰는 것을 즐기던 언니를 따라 하던 나는 지금도 음악과 글에 몸달아 한다. 자신이 꿈꾸는 욕망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이 꿈꾸던 욕망을 빼앗아 살아가기도 하는 인생이란 오묘하기 그지없다. 참 쓸쓸한 제목의 <밤이여, 나뉘어라> 는 한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쫓는다. 욕망은 인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한다. P가 비록 알콜홀릭이나 러브피아 라는 신약을 개발하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대목은 마지막 장면과 대조된다.

정미경의 소설은 참 독했다. 정미경의 독한 문체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비유들에 매료되어 나는 그녀의 팬이지만 나와는 다른 반찬과 주식을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다른 나라 사람인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미경은 이제 독하고 살벌한 문체가 아닌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문체와 사유로 수상작을 지었다. 그런 작가들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노련하기만 하고 변화가 없는 작가들이 있다. 하지만 정미경은 또 하나의 다른 실패를 틀고 있다. 그 실패에서 뽑은 글들은 어렵지도 독특하지도 않다. 한 쪽 한 쪽 넘기면서 정미경이 쓴 것인가 하여 다시 앞장에 이름을 확인하곤 했다. 언젠가 대상 수상자가 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다.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작품을 참 오랫동안 떠올릴 것만 같다.

윤성희의 <무릎>의 정원사가 된 소년이 비로소 옹기종기 가족의 무릎을 떠올리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러나 만약, 중학생인 내 조카가 이 얘기를 들려달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이야기를 모아서 말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뭉뚱그려 얘기하는 재미보다 문장 하나하나의 재미가 있는 소설. 기억해둘만한 문장이라기 보다는 레고 블럭을 쌓듯 개별적인 문장들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는 독서지도사인 화자가 7년동안 사귀었던 여인을 독서로 치료하는 이야기다. 후반부의 서사는 전반부에 보여줬던 패기 대신 지루하고 헐거운, 작가의 독서 편력을 자랑하다 끝나버린 것 말고 더 뭐가 있나 하는 허무함만이 남는다. 싸이월드와 삼순이가 꼭 나와야 했을까?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느낌은 김경욱의 딜레마인 것 같다.

구광본의 <긴하루> 는 독특하다. 혼령이 되어 CCTV에 앉아 편의점에 들어오는 행인과 나를 반추한다. 소외와 소통의 당대를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구나 싶어 참신했다. 함정임의 <자두> 는 자두의 모양같은 심장을 자두로 치환하고 있다. 의미를 깊숙이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아 잘 읽히지 않았는데 독자가 변변치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김영하의 <아이스크림>은 참 씁쓸하다. 아이스크림 하나로 번듯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작가이겠지만, 김영하의 날렵한 감각에 옹골찬 의미들이 쑥쑥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은 고무적이다. 김영하도 나이를 먹는구나, 라는 감상은 너무 진부할까? 어떤 문제에 대해 해결하기 보다는 많은 대가로 보상해주는 방식을 취한 빙과 회사와 그 대리인인 김부장.  부부는 여전히 석유 냄새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는 기분이다. 문제를 파고들어 해결하기 보다 은폐하고 조작하고 입 다물라는 식의 현대사회의 병폐는 냉장고를 이탈하면 금세 녹아 없어져버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경린의 <야상록> 은 찬찬히 읽힌다. 조요한 가운데 핀조명 하나만 켜진 무대에 배우가 혼자 서 있다. 배우의 호흡, 발소리는 섬세하게 잘 들린다. 객석에서 기침 소리를 내는 것 조차 침을 삼키는 소리 조차 배우에게 방해가 될 것처럼 관객도 예민하게 된다. 그런 호흡이 절로 나오는 소설이었다. 아비의 삼우제날 유부남 애인을 만나 정사를 치루고 돌아온 금조. 이름도 참 희한하고 특이하지. 발을 내린 별당에서 아이를 재우듯 어미의 한숨은 또 얼마나 지극한지. 관능, 도발, 섬세, 독특한 분위기가 압권이다.

수상자인 정미경의 문학적 자서전은 기대했던 것 만큼 작가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는 않았다. 은유하지 않고 직접적인 서술로 들려주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독자로서 조금 아쉽다. 하지만, 더 많이 알아봤자 다 기억할 수도 없다. 나는 늘 정미경의 소설을 읽을 것이며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한곳에 모아놓은 수상집으로서 올해의 이상 문학상 수상집은 별 네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하는 독자의 사치는 누릴 수 없었다. 왜? 하는 의문만 품게 되는 아쉬움. 소설은 정말 무엇일까? 어떻게 써야할까? 현대 소설이라고 하는 요즘 소설들이 우리의 현실이며 이게 다 인것일까? 자꾸 내 시선은 현대 소설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간다. 가슴으로 읽혀지는 소설이 간절히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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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imji > 박라연,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自序

  데뷔 전후
  우리집은 책장이 겨우 두 개였다
  지금은 거실, 안방, 침실까지도 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데뷔 전후에
  쓴 詩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쓸쓸하다
  내 연민에 빠져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흘린 눈물이 내게 다시 흘러와
  내 가슴을 적실 때 그 때에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1996년 11월
                      박라연


언제나, 시집을 펼쳐드는 것은 우연이다. 가끔가다 그 우연은 더욱 기막힌 우연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박라연의 시집이 오늘 나에게 그러한 시집이 되었다. 책을 후루룩 넘기다, 나는 승차권 하나를 발견한다. 2001년 12월 22일로 적혀 있는 그 승차권에는 나에게 익숙한 지명이 적혀 있다. 출발시간은 18시 10분. 2001년 12월 22일 오후 6시 10분에 나는 그 차에 올랐을 것이고, 그 차에서 이 시집을 읽었을 것이다. 승차표가 꽂아 있는 페이지는 34페이지. 그 페이지에는 '치사량의 毒, 그리고'라는 시가 있다.


치사량의 毒, 그리고

지독한 꿈의 냄새에 취해버린 몇 년
夢死할 수 없어 깨어난다
누운 채로 밤새워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그 길에서 만난 세월
이름 모를 분홍색 꽃잎 사이사이
검은 나비가 꽃잎을 빨고 있다
내 몸 가득한 꿈의 냄새가 빠져나간다
한 아비의 마당에
한 어미의 옷섶에 뚝 신문 떨어지는 소리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송이들
너희가 우리를 취하게 했구나

삶은 때로 진부해서 살 만하고
꿈은 때로 지독한 제 몸 냄새로 죽음을 밀어낸다
허약한 일상들은
꿈의 갈비뼈 사이에서 잠이 들고
초 분 시간을 따라 송이송이 꽃이 된다
누군가의 미숙한 사랑이 되고
지상의 하루가 되고 前生이 되고 全生애가 된다
치사량의 毒, 그리고


기억난다. 나는 그날 터미널에서 이 시집을 샀다. 그리고 너에게 가는 길에 이 시집을 읽었고, 너와 헤어져 오는 길에도 이 시집을 읽었을 것이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나는 그렇게 무수히 너에게 가고, 너에게 멀어지면서 수많은 시들을 읽었을 것이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ㅡ 박라연,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문학과지성사, 1996


시집을 펼쳐두고 시를 옮겨 적는 동안, 쿰쿰한 먼지 냄새 맡아진다. 그동안 나는 이 시집을 펼치지 않았는가보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그 오랜 시간의 먼지가 온통 이 시집에 모여 있었구나. 나는 툭, 떨어진 승차권을 다시 34페이지에 넣어두고, 승차권이 숨겨진 이 시집을 다시 책장에 넣는다. 내 손에 먼지 냄새 배어 그 지난 시간까지 배게 그냥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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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불우노인에게 사랑을
듀안 마이클 - 열화당사진문고 9
듀안 마이클 / 열화당 / 1986년 5월
평점 :
절판




1. 아주 더운 여름 날이었다. 책도 재미가 없고 따분하기만 했다.




2. 누군가가 문 틈으로 봉투를 밀어넣었다.






3. 봉투 위에는 뭔가 이상한 말이 적혀 있었다.






4. 봉투 안에는 초록색 알약이 들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약 한 알을 삼켰다.




5. 그는 마치 바람이 새어나가는 풍선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그의 키는 엄지 손가락 여섯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6.문이 삐거거리며 열리더니, 그가 이제껏 본 어떤 여자보다 큰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7. 가까이 올수록 그 여자는 더욱 커졌다. 이내 그녀는 그의 위에 와서 섰다.

8.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키에 넋이 빠져버렸다.

9. 그러나 그녀가 자기 위로 앉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의 흥분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10. 엄청나게 큰 엉덩이가 그의 위로 덮쳐 내리는 사이에 그는 도망치려 허둥댔지만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그의 연약한 다리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11.그는 흥분에 휩싸였다. 어마어마한 음부는 점점 더 가까이 덮쳐내려왔다.

12. 그녀가 그 위로 걸터앉았다.

13.14.15. 놀랍게도 그 어둠 속에서 눈덮힌 후지산의 정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열화당 사진문고는 스무 살의 나를 절망하도록 만들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두려웠는지. 새로운 것들에 대한 갈망과 새로운 것들에 대한 질투 사이에서 나는 늘 혼란스러웠다. 어렸으니까. 듀안 마이클은 즉물, 사물의 즉물적 존재를 드러내는 셔터의 막에 시간이라는 공간을 끼워넣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그의 시리즈는 장 모로에게서 느껴지는 사건과는 다른 시간성을 상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사물의 두 가지 측면을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으로 끌어올린 그의 작품은 그래서 말하기의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영화를 보면서 가끔 느끼지는 지루함은 모른 것을 설명하려는 그 엮임에 있다. 소설을 읽으며 답답해지는 것은 소통을 가로막는 작가주의 미학과 그것에 의해 엮어진 재미없는 상상력 때문이다. 억지스러움, 대개 형식은 그것을 방관하고 또 제약한다. 풋사과 냄새가 나는 시절의 나는 그것으로부터도 새로움을 찾고 싶었으나 아직까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진을 다 싣고 싶지만 거의 10년 가까이 친구가 되어준 사진집이 주는 시간성 또한 잃고 싶지 않으므로 스스로 무단복제를 검열한다.

아, 요즘에는 이미지편집이 자유로워서 듀안 마이클의 이러한 사진기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책장을 넘기며 방금 전 눈에 담았던 이미지를 계속 뒷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그 수작업은, 버튼 하나로 휙휙 넘어가는 편집된 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변하면 예전엔 새롭게 느껴지던 것들이 구부정하게 허리 굽은 채로 나이를 먹어, 주변 것들 다 떠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불우노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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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내 어머니의 책
알베르 코엔 지음, 조광희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머니는 나의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꽃이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흔들며 어머니 시들어가는 시절에 나는 머릿속에 커다란 구름이 꽉 들어차고 있음을 느꼈다. 몽매한 시간도 이제는 더 남지 않고 흘렀지만 이따금 시절을 버린 꽃을 떠올린다.

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썼다. 두고두고 꽃을 보면 그는 납작광적처럼 한쪽으로 쏠려버린 어머니, 살아 아프던 기억의 눈동자를, 어머니 입에 넣어주고 싶은 대추알만큼, 없는 것 헤집으며 허전하였다, 허전하였다고 읊을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왔을 때, 나는 스물다섯 개의 방들이 따닥따닥 붙은 한 평짜리 방에서 아기에게 줄 젖을 짜고 있었다. 밤새 뭉친 젖무덤을 주무르며 울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주술을 걸었지만,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고 소식조차 배달되지 않았으며, 검은 얼굴의 그가 낡은구두가 되어 너덜해진 채로 드문드문 방문을 열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기의 방을 오가며 울고 웃었지만, 나는 알았다. 어머니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은 후회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지, 후회를 후회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가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지, 나는 알았다. 그러므로 유축기 한쪽에 놓여진 이 책은 그가 마음으로 건넨 책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나의 어리석음은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살아지는 것처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어오르는 새벽의 엄마'라고 명명된 고생대의 흔적처럼,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드러날까. 알베르 코엔의 '내 어머니의 책'을 빌어 벌받는 자세로 어머니를 기억하는 내가 산다. 부디 코엔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해와 멸시를 이기고 살게 하신 어머니의 이름으로 당신이 빗장을 풀고 나온다면, 그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 한자락 열어준다면, 나도 그렇게 어머니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길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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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내 어머니의 책
알베르 코엔 지음, 조광희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머니는 나의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꽃이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흔들며 어머니 시들어가는 시절에 나는 머릿속에 커다란 구름이 꽉 들어차고 있음을 느꼈다. 몽매한 시간도 이제는 더 남지 않고 흘렀지만 이따금 시절을 버린 꽃을 떠올린다.

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썼다. 두고두고 꽃을 보면 그는 납작광적처럼 한쪽으로 쏠려버린 어머니, 살아 아프던 기억의 눈동자를, 어머니 입에 넣어주고 싶은 대추알만큼, 없는 것 헤집으며 허전하였다, 허전하였다고 읊을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왔을 때, 나는 스물다섯 개의 방들이 따닥따닥 붙은 한 평짜리 방에서 아기에게 줄 젖을 짜고 있었다. 밤새 뭉친 젖무덤을 주무르며 울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주술을 걸었지만,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고 소식조차 배달되지 않았으며, 검은 얼굴의 그가 낡은구두가 되어 너덜해진 채로 드문드문 방문을 열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기의 방을 오가며 울고 웃었지만, 나는 알았다. 어머니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은 후회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지, 후회를 후회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가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지, 나는 알았다. 그러므로 유축기 한쪽에 놓여진 이 책은 그가 마음으로 건넨 책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나의 어리석음은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살아지는 것처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어오르는 새벽의 엄마'라고 명명된 고생대의 흔적처럼, 한 천년쯤 흐르면 우리가 있었던 한 시절이 보일까. 드러날까. 알베르 코엔의 '내 어머니의 책'을 빌어 벌받는 자세로 어머니를 기억하는 내가 산다. 부디 코엔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해와 멸시를 이기고 살게 하신 어머니의 이름으로 당신이 빗장을 풀고 나온다면, 그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 한자락 열어준다면, 나도 그렇게 어머니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길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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