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kimji > 나는 이미 늙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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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도 늙었나봐'
   후배와 박민규 소설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들은 소리였다. 나는 갑자기 '늙었나봐'라는 말에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건 나의 진부함과 고리타분함에 대한 질책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왜 그 얘기가 나왔더라, 아, 그래. 박민규 소설을 읽고서 내가 그녀에게 '나는 왜 시끌벅적한 게 싫지? 얌전하지 않은 것도 싫고. 튀는 게 싫은가봐.' 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던 참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랬던 것이다. 
   '언니가 늙은 거에요. 나는 그게 좋기만 한데.'

   따지고 보면 박민규 소설이 극성스럽게 유난하거나, 가독을 저해할만큼 도드라진 구성이나, 그리 난해하지도 않은데. 이야기는 재미있고, 진술력은 유쾌하며, 나름대로 명확한 결론에, 따스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애도 느껴지고, 게다 시사성도 있는데.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무규칙 이종 소설가'라는 타이틀이나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주먹보다도 더 큰 멋진 안경을 쓰고 있는 외모 때문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새삼스럽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그의 두 편의 장편에 대해 지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던 독자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편의 단편은 익히 알고 있는 박민규 스타일,에 한 치의 오류도 없이 무난한 작품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좋아 박민규 소설을 흔쾌히 읽은 독자였는데도 말이다. 고작 독특한 행간 나누기 스타일 때문이라는 이유는 이제와서 너무 구차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나는 '심드렁하게', '싫다'라는 표현을 했을까. 주저없이 별 다섯 개를 줄 것이면서도 말이다.

   나는 어느 고3 학생을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고, 장래희망은 서점 주인인데, 대학교는 문창과에 가고 싶어한다. 문창과에 입학하기 위해서라면 실기 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 학생이 실기 연습을 위해 연습하는 습작을 읽을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어디선가 읽었을 법한 범죄와 실종사건, 살인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며, 러시아의 음습한 숲, 일본의 어둡고 좁은 골목, 때로는 목욕탕으로 개조된 비밀 실험실 등 종횡무진 상상을 뛰어넘는 곳이 습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탐정이나 외계인, 사냥꾼도 거침없이 등장하고, 주인공인 봉제인형이 자신의 주인과 대화를 하는 화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가독성도 높은 데다가 아주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어디에도 현실은 없다. '나'도 없도 '당신'도 없다. 현실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문학이 가져야 할 삶의 보편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카프카의 '변신'을 읽혔다. 그랬더니 '카프카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돼요?' 하며 자신의 환상과 판타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그 환상성과 비현실성이 현실에서는 훌륭한 의미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지. 벌레로 변했다, 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벌레로 변한 당위성, 그러니까 그 벌레 자체의 의미가 소설 속에도, 그 소설을 읽는 독자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먹힐 수 있다는 상징이라는 거야.
   그래도 그 학생은 이해를 못한다. '그러니까, 네 습작에서 보이는 환상과 판타지는 그저 상상력의 표출일 뿐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문제지.' 그러자 학생이 입을 앙다문다. 아무래도 이해를 못했거나, 아무래도 불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 나도 무기력해졌다. 그래, 어쩌면 내가 늙었는지도 몰라.

   박민규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삽화들, 인물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사고체계를 넘겨 본다. 환상과 비현실이 얼마나 잘 상징성을 구축하고 있는가,를 따져본다.
   냉장고에 모든 것을 넣는 행위는 무슨 상징이지?(카스테라), 너구리의 존재와 너구리 출현의 의미는?(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플랫폼을 걷고 있던 그 기린은 무엇이지?(그렇습니까? 기인입니다), 개복치와 지구와의 관계는(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의 경유지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 걸 작가가 폭로한 건 아닐까?(아, 하세요 펠리컨), 변비환자들(야쿠르트 아줌마)-외계인(코리언 스텐더즈)-대왕오징어(대왕오징어의 습격)-헤드락(헤드락)의 정체는?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도 잘 모르겠다. 혹, 너구리 하나쯤은 - 혹, 농작물을 엉망으로 만든 외계인 하나쯤은 - 혹, 변비환자들 하나쯤은 알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쌓이다 보니 머리가 아프다. 그 비밀을 풀기가 귀찮아진다. 너무 많이 밀려 있는 생각의 숙제가 오히려 포기를 종용한다. 분명한 건 내가 게으르거나 무지하거나, 혹은 늙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민규 소설을 함부로 '시끄럽고', '튀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이해를 못했음에도 가독성과 재미에 동해서,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언어와하는 작가의 기술적인 능력에 눈이 멀어, 그저 작가의 소설이 좋다고, 그래서 박민규라는 작가를 좋아한다고 외쳤던 것처럼.

   그렇다면 나는 그리 훌륭한 독자는 아니었나보다. 박민규 소설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노력을 등한시 했기 때문이다. 어련히 알아서 잘 썼겠지, 라는 안일함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물론, 내가 평론가가 아닌 이상 속속들이 소설에 대한 칼질을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다만, 내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고민은, 이 새삼스러운 고민은, 기존의 믿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고루해진 사고체계에 때문인가, 내가 정말 고리타분해진 것인가, 에 대한 자문과 상호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민규 소설의 흥미는 단순한 재미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의 불합리와 그 불합리에 대처하는 방법의 다양성, 그 다양성을 만들어야 하는 왜소한 인간에 대한 연민, 그 연민에 대한 의미 탐구라는 것도 알겠다. 그러므로 왜 굳이 이런 형태, 이런 형식, 이런 구성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그건 작법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식의 발로이기 때문일테니까.  
   그러니, 어쩌면, 카프카의 벌레와 고3 학생의 봉제인형과 박민규 소설의 너구리는 어쩌면 모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왜 벌레여야 하고, 왜 봉제인형이어야 하고, 왜 너구리여야 하는지. 나비가 아니라, 팽이가 아니라, 수달이 아니면 안되는가,라는 질문은 창작자의 사고체계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소설이란 세계와 나의 소통을 돕는 구조로 작용한다고 믿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민규 소설에 대한 찬사는 나마저도 혹은 나까지는 할 필요는 없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평론가들과 매스컴과 독자들의 신뢰는 이미 이 작가에 대한 입지를 굳건히 만들고도 남을만큼 넘쳐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그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욕망은, 내가 늙지 않았음에 대한 항변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오히려 늙음에 대한 깨끗한 인정을 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처럼, 어느날 갑자기, 내가 키우는 페릿 샤샤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안녕, 아줌마. 나도 아줌마를 사랑해.' 라 말하며 내 품으로 기어들어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때야 비로소, 나는, 카프카와 고3 학생과 박민규의 벌레와 봉제인형과 너구리에 대해서, 그제야 정말 완벽히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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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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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온 날은 비가 올 것같은 날이었다.
엎드려 조금씩 읽고 있는데, 중반에 이르러
잘 읽히지가 않았다. 몸도 힘들고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쏴아아아...

자고있는데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신경쓰여 새벽에 살짝 눈을 떠보니
읽다 놓았던 책위에 매끄러운 피부의 확실한

두꺼비가 있었다.

'꽤애액...'
등판에는 무수한 점박이와 만지면 미끌미끌한 피부를
가진 두꺼비가 나지막히 말을 걸어왔다.'꽤애액...'
두꺼비가 꽈리를 틀고 있는 책은 축축하게 물이 적셔져있었다.
저 놈이 어디서 왔을까.
"미안, 먼저 다 읽어버렸는데"
응? 그런거야 상관 없다고 말했다.
"세상이 참 빨리 변하는거 같아."
두꺼비는 능청스럽게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소주병의 당당한 모델이었어.
모두가 독한 소주를 마시던 시절이었지.
헝그리 정신으로 막소주를 먹던 시절이었어.
오늘 주종은 두꺼비라면 대학생들이 무서워할정도였지.
독두꺼비의 입김처럼 그 당시의 소주는 알콜향이 싸아
하게 났었으니까 말야.
그런데, 세상이 급변하더라고.
어느샌가 독한 소주는 인기가 사라지고
소주 회사들은 다양한 브랜드와 도수가 약한
소주를 만들기 시작했지. 그리고,
내 대신 대나무가 그려진 소주가 나오기 시작했지.
짤린거지. 내가 팔아준게 얼만데.XX"
이 자식 소주 한잔 하고 온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한 숨을 내쉬더니 계속 이야기 했다.
"내가 살고있던 두꺼비집도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져 간다. 두꺼비집만큼 가정에서
중요한게 또 어디있냐말이지. 너 휴즈 갈아본적 있냐?"
그래도, 두꺼비집이라면 모래사장에 많이 있지
않냐고 말을 해줄려다가 녀석이 너무 심각해서 참았다.
이 녀석은 비에 젖어 소주 한 잔 마시며 우울하게
과거를 회상하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각한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물었다.
그건 그렇고 말야, 그 책은 어때?
"이 책? 흠, 넌 말야.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면
몇 곡이상이 좋아야 좋은 앨범이라고 생각해?"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다니 예사롭지 않은 놈이다.
흠. 보통 3곡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난 2곡만 좋아도 본전 건진다고 봐.
어차피 좋은 노래 2개만 계속 들어도 되잖아."
두꺼비의 계산은 수수께끼같이 알 수 없었다.
녀석은 그딴소리를 하고는 말없이
수채구멍으로 사라졌다.
이 자식아,

너 땜에 책 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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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optrash > 안녕, 경찰서

나 역시 한때는 경찰서를 집으로 알았다. 물론 그곳은 홈 스위트 홈 따위는 아니어서, 걸레를 빨던 쫄병시절부터 팬티마저도 파란 경찰서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국방색 깔깔이를 입고 소일거리를 하던 쓰레기시절까지 나는 그저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아 경찰서 바깥 풍경을 보며 뻐금뻐금 연기를 내뿜곤 했다. 마치 답답한 어항에서 헐떡이는 금붕어처럼. 곧잘 넘곤 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담벼락 보다도 낮은 담의 바깥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세상'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결코 넘을 수 없었다.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은, 그냥 꼼짝없이 담배만 필 뿐이었다. 경찰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테마모텔'에 들락거리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언제나 후일담은 아름다운 것이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즐거운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이 불편하다. 너도 나도 군대 이야기를 할 때에야 때때로 그에 걸맞는 에피소드 한 두 개쯤은 꺼내 놓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은 내 안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기억들을 나는 다락방처럼 어두운 곳에 몰아 넣었고, 당연히도 그 문을 다시 열기는 힘들다. 문에 손을 대는 순간 와락, 하고 쏟아져버릴지 모르니.

경찰서에 있을 때부터, 그러니까 상황실이니 지령실이니 하는 사무실에 앉아서 인터넷을 뚜닥 거릴만큼 '짬'이 된 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결국 지금에야 읽었다. 별로 읽고 싶지 않았던 책들도 꽤 많이 읽은 것을 보니 기회가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단지 그럴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겠지. 그렇다고 지금이 그럴 때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 작가의 소설을 읽고보니 한 번쯤은 정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바로 그 때 부터였다. 물론 그 전까지 끄적여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나는 무엇인가를 끄적이는 사람이었지만, 구체적인 결심은 그랬다. 4월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12사단 훈련소를 나온 후 옮겨 간 충주 경찰 학교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러니까 스스로, 포돌이가 그려져 있는 노트를 산 일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곳에 하드 보일드 SF 소설의 시놉을 적어 내렸다. 뭔가 문학적인 이유였겠지. 편지를 굳이 쓰고 싶은 친지가 별로 없었다던지 하는.

물론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서 검문을 하던 쫄병 시절에는 잠시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맑스 베버니 하는 것을 읽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이도 국 간이 안맞는다거나 밥이 되다거나 할 때면 어김없이 손을 들었다. 손에 펜을 잡고 무엇을 쓴다해도 근무일지나 검문검색일지요, 컴퓨터를 친다해도 주민 조회이거나 조서 작성 뿐이었으니, 애초에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검문을 하고, 지문을 확인하고, 때때로 기소중지자나 무면허 운전자를 잡았으며 매일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가끔씩은 부엌 냉장고에서 사놓고 남은 콘 하나를 바지 춤에 숨기고 쓰레기 장 앞에서 먹기도 했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이 채 막바지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짧은 초소 생활을 마치고 경찰서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백여 명의 기소중지자와 그보다 조금 적은 무면허 운전자를 잡은 후의 일이다. 그곳은 지난 몇 년간 전국 초소 실적 1, 2위를 다투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때론 맞고, 10차선 고속도로 중앙 입초대 위에서 춤도 추었으며 무전기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때때로 쉬어가는 대형 화물차의 운전석에 난입해 초소를 들이받아 버릴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형 면허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유난히 나를 괴롭히던 고참이 있었다. 모두 두 명이었다. 그리고 역시, 모두가 그렇듯, 그 중 한 명과는 친구가 되었고 그 중 한 명과는 원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세명이 길을 가면 한 명은 반드시 나의 스승이다'라는 옛말을 '세명이 길을 가면 한 명은 스승이고 한 명은 개새끼다'로 바꾸어 믿었다. 이것은, 황금율이다. 진리고 아니고를 떠나서 구조적인 완결성이 있다.

경희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그 친구는 사소한 일들로는 때리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하에서. 휴식 시간에 내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내게 자신의 옛 사진을 보여주고, 그 중 단발머리를 하고 나시티를 입은 그의 프로필 사진에 내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을 때에도, 따라 웃으며 그저 대가리박기만을 시켰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적절한 예는 아니다. 어쩌면 코메디 배우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게 발령 한 달 만에 나는 처음으로 웃었다.

언젠가 그는 상경 정기휴가를 다녀온 뒤, 나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애들 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같이 새벽 근무를 서던 그는 나에게 화가 났다. 그럴만도 했다. 그때 나는 라면 국물을 너무 많이 혹은 적게 넣었거나, 파 마늘 양파 등의 양념을, 라면 봉지 뒷편에 써있는 조리법과 달리 그의 기호를 무시하고 내멋대로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사답게 자신의 말을 지켰다. 대신에 나를 초소 옆의 테니스장으로 끌고 갔으니, 그때 시간이 새벽 2시. 팬티만 입은 나는 테니스장에서 코트를 수백 바퀴 '선착순'으로 돌고(어째서 혼자 뛰는데 선착순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대가리를 박고, 팔굽혀 펴기 및 앉아 일어나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피티 팔번 따위를 셔플로 반복했다. 그가 비로소 나를 용서하기로 한 것은 해가 뜰 무렵이었다. 단순히 팬티만 입은 내 모습이 창피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면 바지런한 화물기사들이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던 것이다. 테니스장의 담은 높았지만, 화물차도 역시 높았으니.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차렷을 시켰다. 팬티만 입은 나는 차렷을 했다. 그렇지만 내 다리는 O 다리였고, 당연히 차렷 자세의 기본인 '무릎과 무릎을 붙인다'가 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조차도 '내가 너를 다리 휠까봐 몇 번 업어주지도 않았는데, 너는 어찌 이러냐'라고 하실만한 다리였으니, 그가 좋아했을리 없다. "어쭈? 이게 차렷이야? 장난하냐?"라는 그의 말에 나는, 구조적 결함들을 눈부신 의지로 극복해온 선조들을 본받아 붙을리 없는 O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더이상 펴지지 않으려는 뼈와 어떻게든 붙이려는 힘줄이 충돌해 다리는 그저 제자리에서 덜덜 떨릴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떠냐? 왜, 무섭냐?" 태어나서 그처럼 강렬한 살의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와는 같이 발령을 받았다. 같이 경찰서로 온 그는, 경찰서에 줄줄이 깔려있던 고만고만한 고참들 때문에 더이상 실세는 아니었고, 늙고 힘빠진 영감쟁이가 마누라 찾듯 나와 친해졌다. 발령 후 그는 수염뽑힌 고양이처럼 조용히 지냈는데 다만 밑의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 팔굽혀 펴기를 100개씩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물로 내 팔도 쑥쑥 두꺼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나 역시 슬슬 중간 짬밥이 되었을 때 나는 다른 고참과 팔굽혀 펴기 내기 탁구를 해서 체력 단련장에서 팔굽혀 펴기 100개를 해야만 했다. 다시 돌아간 내무실에서 그는 나를 활짝 반기며 "야 이제 팔굽혀 펴기 해라. 다 모여"라고 말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하며 내 팔 상태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그는 마치 연장 10회에도 선발 염종석을 고집하는 강병철처럼 나에게 팔굽혀 펴기를 요구했다. 나는 마치 돈도 못버는 주제에 잠자리에서만 괴롭혀대는 남편을 둔 부인의 심정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씨발, 전생에 무슨 팔굽혀 펴기 귀신이 붙었나..." 생각보다 그의 귀는 밝았고,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 나는 맞지도, 그렇다고 팔굽혀 펴기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쩐지 짬이 먹을 수록 점점 성인군자가 되었고, '이순'의 경지에 올랐다. 그 후로 단지 한 일주일 정도만 나와 말을 섞지 않았을 뿐이다.

개새끼는 맑스 베버를 읽던 역시 경희대 사회대인가 뭐시긴가를 다니던 놈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똑똑한 새끼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대충 그 무렵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사건이 있은지 일주일 후, 어느덧 봄에 눈녹듯 응어리를 녹인 그가 내게 말했다. "아 씨발 나는 이제 제대하면 뭐하나 싶다. 너는 임마 아직 그런거 모르지? 너도 다 제대할 때 되봐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극영화가 다니신다 아님까." "그래서?" "보아하니 배우는 아닌거 같고, 감독할꺼 아님까?" "(꿈틀)... 야 씨발 그게 쉬운줄 아냐? 걔네들은 다 천재야 천재. 감독은 천재만 되는거야." "그럼 어떡함까?" "그러니까 씹새야..." "뭐 잘하는 거 있슴까?" "(발끈)... 씨발놈아 그러는 너는 뭐 잘하냐?" "저 국문과다 아님까." "그래서?" "저 글 잘씀다." "씨발 그래 잘났다. 너 그럼 어디한번 소설이나 써와봐라." "소설 말임까???" "그래 소설." "에이, 제가 그걸 어떻게 씁니까. 소설 쓰는 애들도 천잽니다 천재." "개새끼 너 글 잘쓴다며? (정색) 지금 고참 갖고 논거야?" "일주일 후에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습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근무시간 내내 쓴 것은, 사소한 일이 비탈 굴러 산사태 되듯 커지는 그런 소설이었다. 처음 일주일 동안 원고지 150매 분량을 정말 재미있어하며 썼고, 도저히 끝이 안나서 일주일의 기한을 더 얻어 쓴 나머지 120매는 어쩐지 귀찮아져서 대충 썼다. 플롯이고 교훈이고 뭐고 없는, 말빨로 이루어진 유사 커트 보네것 (혹은, 이때는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더글러스 애덤스) 류였다. 그 후로 그는 나에게 진로에 대해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돌고 돌아 그것을 읽게 된 우리 분대장이었던 김경장이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니는 씨발 소설을 쓴대는 노미 이게 뭐고? 거 왜 있다아이가, 가스나들이랑 한판 하고. 뭐 그런거 없나? 이런걸 누가 읽겠노."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것도 그 곳의 부산일보였고, 되도 않는 경장편을 쓴 것도 그곳을 나오기 직전의 일이다. 뭐 그랬다. 그곳에서 나는 닭도리탕과 제육볶음을 배웠으며, 매운탕에는 간장을 넣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생선의 껍질이 까지지 않게 굽는 법과, 계란 후라이 노른자를 터트리지 않고 동시에 4개까지 하는 법을 배웠다. 파와 양파와 마늘을 다루는 법을 알았으며 국 간을 맞췄다. 훈육의 힘. 내가 제일 자신있던 것은 북어국이었다. 간단했고, 쉽게 맛이 났다. 물론 그것들은 내 팔이 도로, 아니 전보다 더 얇아짐에 따라 내 머리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 시절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그의 잡다한 소설을 읽으면서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다시 말해 그의 소설은 잡다하다. 고만고만한 등장인물들이 때로는 30명 씩이나 등장하는 단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니, 잡다할 수밖에. 사람 사는 이야기는 잡다할 수밖에 없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추릴 수 있는 것은 영화나 소설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좋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구수하게 물씬 풍겨서 좋았다. 비록 경찰서의 생리나 그 중에서도 검문 초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덜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다. 나쁜 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다. 개 같은 초소장(경찰)도, 나름대로 윤리적 삶에 대해 고민하는 대원(전경)도,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단한 삶을 위안하기 위해 섣불리 '적'을, '타인'을 규정하는 일과는 사뭇 다르다. 잘못된 것은 언제나 구조이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조 안에 적을, 타자를 규정해버리고 모든 잘못을 그에 돌리는 것은 그래서 나쁘다. 물론 그렇지만 여전히 개새끼들은 존재하고 그 중의 누군가는 맑스 베버를 읽겠지만.

사람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순하다.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위험하다. 너무나 직설적으로 경계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그렇게 분리되고, 2년 동안 나라를 위해 국방의 의미를 충실히 수행한 애국자들은 그대로 국가 경제의 중추가 되어 권력을 얻는다. 여자들이 괜히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김종광은, 그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모든 경계를 무화시킨다. 그러니까 개새끼들아 군대 얘기하면서 그렇게 지랄하지 좀 말란 말이야, 라고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래도 같은 전경 출신의 작가라고 은근 반가운 것을 보면 그 '공감대'라는 것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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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에 관한 페이퍼를 두어 번 올린 바 있는데, 관련기사가 눈에 띄어 다시 옮겨둔다. 하던 일이니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모종의 책임감에 떠밀려서. 일단,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란 제하에 오르는 무대 소개.

한국일보(06. 03. 23)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무대에 오른다. 27일 대학로 라이브소극장에서 열리는 ‘제1회 문학 나눔 콘서트’. 새로운 시 세계를 선보이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강정, 황병승, 김민정씨가 나와 자신의 삶과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인디록밴드 ‘모레인’이 이들의 시와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연극연출가 박정의(극단 초인)도 배우들과 함께 시를 테마로 한 퍼포먼스를 선뵐 예정이다. 진행은 소설가 이명랑씨가 맡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이버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문학 작품을 책 바깥으로 끌어내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첫 회 참가 시인들은 서정과 서사, 뚜렷한 시적 메시지 등 전통적인 시의 소통 구조를 배격하는 대신 내면에 밀착된 언어에 천착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두고 시인 강정은 “그들은 애당초 공공의 광장이란 걸 믿지 않”으며 “그 허물어진 공간을 제 멋대로 부유하며 (바퀴벌레들처럼) 자신들만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놀이에 전념한다”('한국일보' 12월12일자 ‘강정의 나쁜 취향’)고 말한 바 있다. 첫 회 제목은 그의 이 언명에서 차용됐다. 공연은 무료이며, 모든 관객들은 시인들이 서명한 작품집을 받을 수 있다. 4월에는 소설가 김종광 이기호와 황신혜밴드, 5월에는 젊은 서정시인 문태준 손택수 신용목이 참여해 무대를 꾸밀 예정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리고 참고자료로서 '젊은 바퀴벌레'의 명명자이자 그 자신 '쇠잔한 바퀴벌레'이기도 한 강정 시인의 기고문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무비위크> 199호).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자리에 갔다가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지인 몇몇이 모여 단촐하게 한잔하는 자린 줄 알고 밍밍하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모인 사람들의 수와 면면에 새삼 놀란 것이다. 시집출판기념회가 그토록 ‘뻑적지근’하게 펼쳐진 건, 내 기억으론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그 잊혀진 10년 사이, 내가 시의 바깥에 있었거나 시가 나의 바깥에 있었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어떤 독립적인 삶의 거점처럼 여겨졌다.


-고종석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이른바 ‘시인공화국’이다. 인구 대비 시인의 숫자를 봤을 때도 그렇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시인 모시기’를 봐도 그렇고, 아주 가끔 특정 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기이한 독서풍토를 봐도 그렇다. 출판사 입장에서 봤을 때 시집 출간은 숫제 시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가깝다. 이윤은 고사하고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늘 소위 정통문학을 표방한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시인을 배출하고 시집을 출간한다. 시를 문학의 본령이라 여기고 숭상하는 풍조가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 시인공화국은 여전히 번성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가을에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유독 많다.


-기형도의 죽음 이후, 대략 15년 동안의 무관심과 침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최근 젊은 시집들의 득세는 심상찮은 기미가 있다. 이들의 연령대를 훑으면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걸치지만, 나이와는 무관하게 이들의 시 세계는 개인의 경험을 환상적 이미지와 자폐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음악과 영화, 컴퓨터 문화에 대한 탐닉 등은 이들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가 될 만하다. 과잉되거나 뒤틀린 자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유약하면서도 섬세한 어조로 삶의 스산한 비의를 읊조리는 이들 감수성의 촉수는 외부세계로 뻗어있기보다는 자아의 심부를 향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소통불능의 자폐적 진술로 흐르지만, 그 자폐는 의외로 고집스럽고 사나워 역설적인 자기과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시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시가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예민한 성감대’라느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시는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기 보다는 한 개인의 아픔과 고뇌를 세상 전체의 아픔으로 변용시키는 힘을 ‘때때로’ (자주 쓸 수 있다면 그건 힘이 아니다)가졌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삶의 무미한 디테일들을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스스로의 내구성을 다지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엿보이는 자폐적인 이기성을 나는 존중한다. 동시에, 천성적인 유약함을 내밀한 읊조림으로 치환하여 스스로의 껍질을 두텁게 하는 그들의 타고난 ‘비사교성’에 더 강퍅한 지지를 보낸다.

 

-대의에 얽매이거나 시류적인 일반론의 강박에서 벗어난 그들의 ‘사적 언어’는 한 개인의 편협한 광증과 무기력함이 편의와 실용으로 무장한 21세기적 속도의식에 맞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경우, 시란 세계보다 먼저 가는 게 아니라 세계보다 늦게 가거나 아예 가지 않음으로써 저 혼자 아득바득 빛나고 저 혼자 용케 신성하거나 철없이 솔직하게 만드는 특별한 자기치장술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하지만, 그 왕따는 시를 씀으로써 선점하게 된 특출한 고독이나 진배없다. 그 고독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언정, 적게나마 목격한 이들에겐 일방향의 삶을 근원부터 다시 살피게 하는 끈끈한 설득력을 지녔다. 따라서 나는 시인들의 언어가 좀 더 거칠고 생경하고 느리고 육감적이길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첨단의 주방 귀퉁이에 알을 슨 바퀴벌레처럼 느닷없이 악명 높아지길 바란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일말의 악의 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미련하게 잠든 세상을 가끔씩 놀래켜 주는 것. 그게 시의 존재의의고 시의 존재방법이며 시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자기방어이다. 시인공화국은 시의 궁창이자 시의 궁전이다.

 

이어서 시인 강정의 신작 시집을 소개한 연초의 기사. <시인 강 정 “나를 뒤집는 전복의 힘으로 시를 쓰지요”>란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국민일보(06. 01. 08.) 지난해 12월말 시인 강정(35)은 홍대 앞 모처에서 인디밴드 ‘모레인’과 특별한 공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비롯한 올드록 넘버 세 곡을 부르고 자신의 시 두 편을 즉흥연주에 맞춰 낭송했다. 시와 음악과 산문을 아우르는 그이기에 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강정이 10년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2006)은 거친 록 사운드에 실려 전해지는 공연장에서의 그의 격렬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낭송했다는 ‘들판을 달리는 토끼’의 한 대목을 소리내 읽어본다.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쪽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에 발표했을 때부터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시다. 찢어진 눈이며 껑충한 귀며 강정을 본 순간,어쩌면 우리가 찾던 토끼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까운 친구인 시인 이준규가 제목의 영감을 주었는데,30분만에 써내려갔지요. 제목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만든 르네 클레망의 작품에서 따왔어요.”

 

 

 

 

 

 

 

 

 

 

 

-30분만에 무려 80행을 써내려간 그의 머릿속 열기가 훅 끼쳐왔다. 스무 두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처형극장’을 내놓은 이래 그의 탐미적인 언어는 시를 떠나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채로운 영역을 종횡하며 날카로운 감수성의 표창을 날려왔다. 2000년대에 등장한 황병승 장석원 김행숙 등 젊은 시인이 이른바 ‘미래파’로 지칭되기 전,말하자면 그는 10년전부터 미래파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한 연재글에서 스스로를 ‘한 쇠잔한 바퀴벌레’라 칭하는 한편 이들 미래파 후배 시인들을 ‘바퀴벌레’라 호칭하며 이들의 약진에 지지와 옹호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낡은 공간을 부식시키고 냄새를 풍기지요. 이 친구들의 존재 방식은 사물을 흉물스럽게 바라보는 느낌 그 자체에 있는데, 일상적이지 않고 낯설다 뿐이지 실은 그들의 시에 새로운 세계의 총체성의 기미가 꿈틀거리고 있어요.”

 

-표면에 떠 있는 감정들을 슬슬 건드려주는 정도의 신서정 계열의 시편들은 비록 대중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진검승부를 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결핍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단이 되어야 해요. 자기가 써왔던 것,했던 것을 까뒤집는 전복이 필요하지요. 요즘 들어 이성복 시인을 제외하고는 선배시인 가운데 그런 전복의 힘을 본 적이 없어요. 근래의 서정시들은 거개가 ‘자기가 눈 똥을 보고 이쁘다’고 자평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요.”

 

-이번 시집 가운데 표제시는 빼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강정의 시적 매커니즘은 우주와 몸의 대비에 있다. 빛까지 빨아들이는 우주의 카오스처럼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혼돈성,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들,성적이고 관능적 환상들,끝까지 규정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색…. 그는 언어가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 감각의 허물을 벗어던진다. “우리 시보다 외국의 번역시를 읽을 때 언어를 뛰어넘는 느낌을 받아요. 언어를 삐딱하게 놓는 행위랄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들,뒤섞여 나오는 것들…. 사람도 잡종이 더 이쁘잖아요. 시를 쓰면서 모국어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마음의 모국을 떠나 외계를 발견하는 우주인,그게 시인이지요.” 강정은 우리 시단의 블루칩이다. 

 


 

 

 

 

 

 

 

시인의 마지막 발언에서 시인/평론가 이장욱이 이 '바퀴벌레 시인'들을 다룬 글의 제목을 '외계인 인터뷰 - 시적 윤리와 질문의 형식'라고 붙인 이유가 절실하게 드러난다. 지구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이 시인들이 굳이 국적에 연연하겠는가?!..

 

06. 03. 23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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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낸시 랭과 탈승화의 예술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아티스트' 낸시 랭에 대해 몇 자 적는다. 그녀를 만나본 적도, 그녀의 전시회에 가본 적도 없지만,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눈에 띄는 (미혼의) '여성 아티스트'로 소개하는 코너를 우연히 본 적은 있다('콘트라 섹슈얼'이란 프로그램). 그리고,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세계를 목표로 한다는) 그녀는 (적어도) '전국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TV광고에 나오는 건 물론 토론프로그램 패널을 거쳐서 케이블채널의 진행자까지 되었다고 하니까 가히 연예인 뺨친다(혹은 예술의 연예화?). 

미술계에 계시는 분들의 말씀으론 작품 또한 최근에 가장 잘, 가장 많이 팔리는 축에 든다고 하니까(한편으론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겠다) 소위 '성공하는 예술가'의 한 전형으로서 손색이 없다. '문화현상으로서의 낸시 랭'에 미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 만한 이유이다. 여기서는 몇 개의 인터뷰/기사를 따라가면서 나의 의견을 보태도록 하겠다.    

먼저, "상큼한 매력의 요정 "세상의 권태여, 가라" 기분 좋은 파격과 긴장의 화신, 편견 깬 신세대 행위예술가"란 제하에 막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던 재작년(2004년) 5월 낸시 랭의 퍼포먼스를 취재한 주간한국의 소개기사. 자신을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전시할 줄 아는 이 '앙큼한' 아티스트에 대한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YOU LOST! 내게 무릎을 꿇어! 나른한 봄날 오후, 식곤증에 시달리는 당신, 방심하다가는 이 앙큼한 고양이에게 당할지도 모른다. 당신 품에 와락 안겨 윤기 나는 하얀 털로 당신의 가슴을 간지럽히는 럭셔리한 고양이가 대뜸 하는 말, YOU LOST! 당신은 아직까지 근엄한 얼굴로 허허, 웃겠지만 이 고양이를 쉽게 보았다간 큰 코를 다칠지도 모른다. 온갖 끼와 잠재된 재주로 당신의 이성을 흔들어 놓을 애교의 메신저! 당신은 곧 그녀가 만드는 폭탄주를 마시고 견고한 이성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둘 것이다. 큐티, 섹시, 키티, 낸시, 구호를 외치는 당신을 발견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것이 낸시랭이다."

"아담한 키에 앳된 얼굴, 틴에이저로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섹시한 몸의 그녀는 이른바 ‘몸짱’, ‘얼짱’, ‘애교짱’이다. 벌써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가질 만큼 자신의 분야에서 신세대 유망주로 떠오른 아티스트다. 20대 후반의 이 행위예술가는 예술가에 대한 편견을 단박에 깨부순다. 타인을 만나자 금세라도 품에 안길 듯 달려와 자신의 소니 소형 캠코더에 인사를 시키는 그녀."(*요컨대, '큐티, 섹시, 키티, 낸시'가 그녀의 컨셉/구호이며, '몸짱' '얼짱' '애교짱'이 무기이다.)

-첫 대면부터가 그녀의 초미니 스커트만큼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거부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낸시와 함께 있는 공간은 그녀가 만든 ‘이상한 나라’였다. 하늘의 구름이 갑자기 리라빛으로 변하고, 나무들이 춤을 추기도 하는 이 신기한 나라에서 호기심으로 가득찬 얼굴로 캠코더를 보며 인사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안녕? 낸시! 난 오늘 널 만나러 왔단다. 낸시 랭이란 여자아이가 순진무구 애교 덩어리란 소문을 듣고 왔어. 넌 누구니. 후 아 유?”

-초록의 계절, 푸르른 숲이 주위를 뒤덮어 권태롭기까지 한 계절에 서프라이즈한 퍼포먼스가 있었다. 위엄으로 가득찬 예술의 전당 지붕 아래, ‘SFAF(서울파인 아트 페스티벌) 한국 미술 열흘 장’ 오프닝에서 ‘싱싱 Sing’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낸시랭의 세 번째 퍼포먼스. 단발머리 낸시는 까만 선글라스에 발목까지 오는 버버리를 입고 한 손엔 잉글리시 콕스파니엘을 산책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여자로 분한다. 궁금증과 긴장으로 혼합된 그 순간에 버버리를 벗어 던지는 낸시. 그러자 비키니 차림의 싱싱한 몸이 노출되고, 순간 로비는 해변가로 변한다.

-베이비 오일을 바르고, 자신의 몸을 훔쳐보는 관객을 향해, 손을 뻗어 ‘오일을 발라 주세요’ 라고 애교를 떨다가, 성큼 다가오지 못하는 관객을 비웃기라고 하듯, 싱싱한 육체를 뽐내며 신문과 잡지로 도배된 기계 앞으로 다가간다. 언뜻 보아 권위와 보수로 똘똘 뭉친 신문과 잡지다. 껍질을 벗겨내듯, 옷을 벗듯, 훌러덩 벗겨내니, 노래방 기계가 나오고, 상큼한 요정처럼 ‘보랏빛 향기’ 를 부른다. 관객은 어느새 그녀에게 동화된다. 그녀의 하이힐과 빨간색 비키니 만큼이나 도발적인 퍼포먼스였다.

-이 여자가 바로 낸시 랭. 미국 국적 취득 전 한국이름은 박혜령. 한국인이면서 미국 국적을 지닌 낸시는 18세까지 이중국적으로 두 가지 삶을 살아왔다. 지금은 누가 보아도 낸시 랭이란 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자다. 낸시의 퍼포먼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베니스의 비엔날레에서 낸시랭은 초대받지 않은 예술가였지만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이라는 주제로 개막식 날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색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에 하이힐을 신고, 얼굴은 가부키를 연상시킬 만큼 허옇게, 어릿광대 마냥 페인팅을 한 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물론 낑깡 낑깡.(*내가 케이블 TV에서 본 프로그램에서도 이 퍼포먼스는 자세히 소개되었다.)

-낸시가 내는 불협화음은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표현해낸 것이었다. 비엔날레의 주제, ‘꿈과 갈등’과 딱 들어맞았다. 세계 여러 잡지에서는 이 어린 동양 여자아이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낸시의 데뷔작은 평범치 않게,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지나가는 서양인들이 낸시를 보고 하는 말, “You looks sad!"

-예사롭지 않은 낸시가 내뿜는 마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낸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기니가 이런 의문을 풀어준다. 요기니는 바로 낸시 랭 자신이다. 천사와 악마의 중간자적 존재로 인간과 신 사이의 영적인 메신저 역할을 하는 요기니에 타부를 개입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요기니를 탄생시켰다. 낸시는 요기니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 상처와 극복을 보여준다.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함께 지닌 요기니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여서 어쩐지 슬퍼 보이고 고독해 보이지만, 잠재된 파워와 끈길긴 생명력을 지녀 끊임없이 부활하는 영적인 존재다. “호랑이는 강한 동물이지만,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고독한 영웅이잖아. 강한 것 같지만 늘 혼자 있는 외로운 동물. 내가 그렇다니까!”

-낯선 이의 팔짱을 쉽게 끼고, 가벼운 스킨 십으로 벽을 허물고, 친근감 있게 말을 트고, 허스키 코맹맹이 소리로 언니, 오빠, 선생님을 부르는 낸시. 버릇없어 보이기보다 타인에게 쉽게 문을 열어 오히려 불안할 정도로 순진해 보인다.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던 어머니를 둔덕에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로웠던 유년시절, 용돈을 모아 산 천체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던 낸시는 공상의 나래를 꿈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낸시의 공상은 우주로 뻗어 나갔고, 자연스레 공상 과학 만화의 상상력은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예술의 전당 지붕아래서 열리는 다섯 번째 개인전의 타부 요기니 시리즈는 기생의 가채머리를 한 동양 여성의 얼굴에 몸체는 로봇인 여전사가 등장한다. 낸시의 작품속 요기니는 대부분 잔다르크적 이미지의 여전사가 대부분이다. 여전사는 그녀와 닮은 그녀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낸시의 어머니는 낸시가 당신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기보다 영화관에 가면 중간 줄에 앉은 관객처럼 평범하고 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낸시에겐 꿈이 있다. 요기니를 통해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과 이상이다.

-너, 아직도 꿈을 꾸니? 나는 묻는다. 응, 나는 꿈을 자주 꾸어. 하늘을 나는 꿈. 바다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꿀 때가 가장 행복해.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같잖아.

-긴장이 풀어지는 봄날 오후, 꿈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이 여자를 조심하라. 자신의 분신 타부 요기니 시리즈로 낸시가 말하려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혼자놀던 외로운 아이는,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시켜줄 요기니를 탄생시켰지만, 결국 요기니를 통해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리고 오늘자(2006. 04. 09) 인터넷판 세계일보의 기사(여타의 많은 기사들도 대동소이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고 대통령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악수를 나누는 사람, 낸시 랭(27·한국명 박혜령). 연예인인지 디자이너인지 사람마다 아리송한 ‘답안’을 내놓는 이 사람, 요즘 TV만 틀면 여기저기 나온다. 초고속통신망 광고에서 머리에 깃털을 달고 고양이 캐릭터와 탭댄스를 추고, 패션브랜드 광고의 지폐뭉치 속에서 웃고 있다. KBS의 ‘파워 인터뷰’에 고정패널로 나와 몇 차례 돌출발언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더니 슬며시 사라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케이블 음악채널 M.net에서 지난 3일부터 월∼금요일 오후 6시30분 ‘낸시 랭의 트렌드 리포트 必’에 진행자로 매일 저녁 나오며 카메라 앞에서 퍼포먼스도 하고 토크쇼도 한다. 본인 말대로 “연예인에게 오는 CF, 영화 등의 섭외는 다 들어온다”는 이 사람의 정체는 무얼까.



◆그녀에 대한 오해: 낸시 랭이 광장에 나온 건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거리 퍼포먼스. 초대받지 않은, 가난한 아티스트 낸시 랭은 얼굴에 분칠을 하고 란제리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바이올린을 켰다. 이름하여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 : 터부 요기니 시리즈’. 이 파격적인 공연 이후 그는 2000년대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논쟁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퍼포먼스를 한 건 단지 돈이 없어서였다”고 설명한다.

-그를 만났을 때 가장 묻고 싶었던 말, 지난해 11월 KBS ‘파워 인터뷰’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을 때의 문제의 발언을 되짚었다. 당시 그의 발언, “(천정배) 장관님도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보셨나요?” “저 엘리트 너무 좋아하거든요” 등은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큰 오해를 낳았다. “엘리트는 누구나 되고 싶어하는 거잖아요. 많이 가진 만큼 베풀지 않는 한국 엘리트의 현실이 문제이지, 엘리트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전 명품도 좋아해요. 루이 뷔통부터 크리스천 디올까지, 좋아하는 순위별로 댈 수도 있죠. 누구나 원하는 걸 제가 굳이 숨기지 않은 게 잘못인가요.” 그녀는 ‘파워 인터뷰’에서도 “패널이 아닌 아티스트 낸시 랭으로 출연한 것뿐”이었다며 얼굴을 붉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지 않으면 불안해해요. 튀어나오면 못박고 싶어하죠.”(*나중에 다시 지적하겠지만, '누구나 원하는 걸 굳이 숨기지 않는 것', 그게 '낸시 랭'표 아트의 핵심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필리핀에서 보낸 국제고등학교 시절 “전략적으로” 변호사를 사서 바꾼 이름이 낸시 랭(본명 박혜령)이다. ‘랭’은 그가 “비주얼과 타이포그래피, 국제성까지 감안해 만들었다”는 성이다.

◆걸어다니는 팝아티스트 낸시 랭: 아티스트 낸시 랭은 요즘 매일 출근을 한다. 매일 그가 아트디렉터로 있는패션브랜드 쌈지에 출근을 하고 M. Net 아이디어 회의와 녹화도 병행한다. 4월 말 출간 준비중인 책과 개인전, 또 최근 쌈지가 후원하는 입주 프로그램 작가로 선정돼 활동도 벌여야 한다. 도대체 언제 그 많은 일들을 수습할까. “꿈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는 침대 머리맡, 화장실, 핸드백 곳곳에 노트를 놓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놓는 ‘기록광’이라고 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낸시 랭’ 상표의 옷과 가방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가 디자인한 핸드백 안쪽엔 ‘메이드 인 차이나’ 대신에 ‘메이드 인 헤븐’이라고 씌어진 상표가 붙어 있다. 드라마 ‘궁’에서 윤은혜가 들었던 알루미늄 하드케이스의 핸드백 ‘매직박스’도 그의 작품. 대중의 기호를 따라가면서 아티스트 고유의 세계를 지키는 일이 가능할까.“국내에서 아티스트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을 통째로 맡는 건 처음이죠. 팝 아티스트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건 자연스런 작업인데도 말이죠. 방송을 통해 트렌드를 만들고 전달하며 재해석하는 아티스트 낸시 랭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줄 겁니다. ”

-“낸시 랭은 비즈니스를 예술과 접목시키는 걸 즐기는 사람이”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는 “미술가도 잘 되는 것 보여줘야 다른 분야처럼 관심과 투자를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낸시 랭은 오는 6월 대대적으로 자선 기부파티를 벌일 계획도 털어놓는다. 작품 대신 계획서를 받아 13명의 젊은 예술가들을 뽑은 후 그들을 후원해 주겠다는 생각이 낸시 랭답다.

 

 

 



-그가 꿈꾸는 예술가는 피카소, 달리, 앤디 워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천재적 재능과 다작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부와 명성을 ‘일찍이’ 누렸다는 거죠. 고흐는 싫어요. 우울하고 고통스럽게 살며 명작을 남겼지만, 사후에야 유명해졌잖아요?”

-작품보다 작가가 유명해지는 것에 불만은 없을까. “지난해 말 쌈지에서 낸시 랭 개인 전시회할 때 사람들이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다 들어왔어요. 쌈지 전시장 개장 이후 그렇게 성황인 건 처음이라 그러던데요.” “나르시시즘이 내 작품 키워드 중 하나”라는 그녀의 무한한 자신감과 솔직함이 부러워졌다.

'우리시대의 팝아티스트' 낸시 랭의 '아트'에 대한 나의 의견은 간단하다. 그녀의 이런저런 '아트'가 보여주는 것은 '탈승화의 예술', 혹은 '예술 이후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술 이후의 예술' 혹은 '탈역사 시대의 예술'에 대해서는 미국의 철학자/비평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는데, 단토의 '예술종말론'의 영감은 낸시 랭의 우상이기도 한,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에서 비롯됐었다. 

 

 

 

 

단토가 워홀의 작품에서 끌어내는 문제의식은 상품으로서의 '브릴로 박스'와 지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과연 어떻게 (여전히) 예술일 수 있을까였다. 그러니까 예술과 비예술간의 '지각적 식별 불가능성'의 문제가 '예술(시대)의 종언'을 이끌어낸 화두였다(덧붙이자면, 단토에게서 '예술의 종말'은 비극적인 음조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예술 다원주의'의 개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는 낸시 랭의 '아트' 또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본인 말대로, “연예인에게 오는 CF, 영화 등의 섭외는 다 들어온다"고 할 때, 우리는 겉으로 봐서는 그녀가 아티스트인지 연예인인지 식별하기 어렵다(그녀에겐 매일 출근하는 '직장'도 있다). 즉, 여기서도 '지각적 식별 불가능성'이 개입하는 것.  

 

 

자본주의/대중문화 시대의 아티스트/연예인은 다 같이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각자의 장기와 재능을 상품화함으로써 인기와 부를 획득한다. 애교와 끼가 '예술'인 낸시 랭은 노래와 댄스가 '예술'인 채연, 혹은 연기가 '예술'인 한고은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모두가 팝(pop)에 호소하는, 그럼으로써 한몫잡는 아티스트들 아닌가?(요즘은 '돈벌이'도 아트에 속한다.) 그렇다면, 단토가 앤디 워홀과 더불어 예술(미술)이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낸시 랭과 더불어 예술가의 종말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예술가의 종말' 이후에도 고흐처럼 "우울하고 고통스럽게 살면서 명작을 남"기는 예술가들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가는 '예술가 다원주의' 시대의 한 유형 정도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탈승화의 예술'인가? 프로이트를 참조하자면, 예술은 기본적은 '승화'의 과정이자 결과물이었다. 할 포스터의 정리를 따라가보자: "프로이트는 예술을 승화의 과정이며 본능을 포기하는 협상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예술이 탈승화의 프로젝트라거나 문화가 금지하는 사항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했다."(<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31쪽, 번역 일부 수정) 승화(Sublimation)라는 건 리비도의 (비사회적) 욕망을 예술적 창조행위처럼 사회적으로 수용할 만한 양태로 치환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낸시 랭의 기원이라 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의 퍼포먼스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은 승화의 전형적인 예이다. 다시 옮기면, "개막식 날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색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에 하이힐을 신고, 얼굴은 가부키를 연상시킬 만큼 허옇게, 어릿광대 마냥 페인팅을 한 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물론 낑깡 낑깡. 낸시가 내는 불협화음은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표현해낸 것이었다. 비엔날레의 주제, ‘꿈과 갈등’과 딱 들어맞았다."

거기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어릿광대의 불협화음 바이얼린 연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승화이다(그러니까 낸시 랭은 적어도 베니스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였다). 혹은 낸시 랭의 이러한 말: "너, 아직도 꿈을 꾸니? 나는 묻는다. 응, 나는 꿈을 자주 꾸어. 하늘을 나는 꿈. 바다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꿀 때가 가장 행복해.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같잖아."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혹은 현실과 타협해 가는 과정, 그런 게 프로이트가 생각했던 예술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예술을 탈승화의 프로젝트로 보는 입장에 반대했던 것이다. '탈승화(Desublimation)'란 자아의 중개/제약 없이 리비도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낸시는 요기니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 상처와 극복을 보여준다"라고 할 때 그 '극복'은 억압되지 않은 리비도의 자기 분출/표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탈승화는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던 어머니를 둔덕에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로웠던 유년시절"의 유산이기도 할 것인데,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그녀의 '낑깡 낑깡'은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라, 한시적인 모습이었을 뿐이겠다).

가령, 이런 기사는 어떠한가? 데일리 서프라이즈(2006. 01. 01): "한국사회에 혜성처럼 등장해 이미 그녀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화 되어버린 아티스트 낸시랭(한국명 박혜령)의 파격 행보는 지금껏 우리 머릿속에 각인돼온 전통적 아티스트의 단상을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미술 잡지나 공모전, 아트페어가 아닌 <바자>나 <엘르> 같은 패션지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던 낸시랭은 누구보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는 솔직한 아티스트다."

여기서, 전통적 아티스트에 대한 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그녀가 '예술가 종말' 시대의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며, '솔직한 아티스트'라는 것은 이 '나르시시즘의 예술가', 혹은 '공주병 예술가'가 자신의 욕망과 따로 타협하지 않는 '탈승화의 예술가'라는 걸 암시해준다. 예컨대, 그녀는 명품중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그대로 퍼포먼스의 주제로 삼는다.

다시 데일리 서프라이즈: "신드롬이라 부를 만한 예외적 상황들을 끌어내며 한 해 동안 대한민국 현대미술계의 이슈 메이커가 되었던 그녀는 자신에 대한 극단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미술계의 핵심부로 다가서고 있다. ‘아이 러브 루이비통’을 외치며 예일 로고를 작품에 등장시키는 철저한 세속성과 싱싱한 육체를 이용한 섹스어필한 퍼포먼스는 이중성을 벗어던진 홑겹의 재현 방식으로 음습하지 않은 경쾌함 마저 전해 준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고립감에 빠져 무게에 짓눌린 현대미술계의 핵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중성을 벗어던진 홑겹의 재현방식'이 암시적으로 뜻하는 것 또한 그녀가 리비도(이드)와 자아 간의 타협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우리시대의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이다. 혹은 그녀의 예술적 주체는 초현실적 주체이다. 대부분 잔다르크적 이미지의 로봇 여전사인 그녀의 대표 아이템 '타부 요기니'처럼. 나는 그녀의 로봇-요기니가 욕망과 타협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가 대놓고 말하는 자신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다작"을 통해 "부와 명성을 ‘일찍이’ 누리는 것"이다. 우리시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런 걸 바란다고 해도, 적어도 '현실'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대놓고 돈을 밝히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낸시 랭의 '현실'은 우리의 '초현실'이다(혹은 우리시대는 이미 '탈승화의 시대'인가? 하긴 '부자되세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06.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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