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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안 마이클 - 열화당사진문고 9
듀안 마이클 / 열화당 / 1986년 5월
평점 :
절판




1. 아주 더운 여름 날이었다. 책도 재미가 없고 따분하기만 했다.




2. 누군가가 문 틈으로 봉투를 밀어넣었다.






3. 봉투 위에는 뭔가 이상한 말이 적혀 있었다.






4. 봉투 안에는 초록색 알약이 들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약 한 알을 삼켰다.




5. 그는 마치 바람이 새어나가는 풍선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그의 키는 엄지 손가락 여섯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6.문이 삐거거리며 열리더니, 그가 이제껏 본 어떤 여자보다 큰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7. 가까이 올수록 그 여자는 더욱 커졌다. 이내 그녀는 그의 위에 와서 섰다.

8.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키에 넋이 빠져버렸다.

9. 그러나 그녀가 자기 위로 앉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의 흥분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10. 엄청나게 큰 엉덩이가 그의 위로 덮쳐 내리는 사이에 그는 도망치려 허둥댔지만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그의 연약한 다리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11.그는 흥분에 휩싸였다. 어마어마한 음부는 점점 더 가까이 덮쳐내려왔다.

12. 그녀가 그 위로 걸터앉았다.

13.14.15. 놀랍게도 그 어둠 속에서 눈덮힌 후지산의 정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열화당 사진문고는 스무 살의 나를 절망하도록 만들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두려웠는지. 새로운 것들에 대한 갈망과 새로운 것들에 대한 질투 사이에서 나는 늘 혼란스러웠다. 어렸으니까. 듀안 마이클은 즉물, 사물의 즉물적 존재를 드러내는 셔터의 막에 시간이라는 공간을 끼워넣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그의 시리즈는 장 모로에게서 느껴지는 사건과는 다른 시간성을 상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사물의 두 가지 측면을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으로 끌어올린 그의 작품은 그래서 말하기의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영화를 보면서 가끔 느끼지는 지루함은 모른 것을 설명하려는 그 엮임에 있다. 소설을 읽으며 답답해지는 것은 소통을 가로막는 작가주의 미학과 그것에 의해 엮어진 재미없는 상상력 때문이다. 억지스러움, 대개 형식은 그것을 방관하고 또 제약한다. 풋사과 냄새가 나는 시절의 나는 그것으로부터도 새로움을 찾고 싶었으나 아직까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진을 다 싣고 싶지만 거의 10년 가까이 친구가 되어준 사진집이 주는 시간성 또한 잃고 싶지 않으므로 스스로 무단복제를 검열한다.

아, 요즘에는 이미지편집이 자유로워서 듀안 마이클의 이러한 사진기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책장을 넘기며 방금 전 눈에 담았던 이미지를 계속 뒷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그 수작업은, 버튼 하나로 휙휙 넘어가는 편집된 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변하면 예전엔 새롭게 느껴지던 것들이 구부정하게 허리 굽은 채로 나이를 먹어, 주변 것들 다 떠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불우노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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