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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 꽂힌 책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장정일은 책은 지문 묻을까봐 손을 씻은 뒤 읽으며, 초판만 읽지 재판을 읽지 않으며, 책에는 볼펜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한 번 본 시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한다고 내게 얘기했다."
-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살림

 글쎄. 나는 장정일처럼 손을 씻고 책을 읽지도 않으며, 초판이든 재판이든  아무 책이나 읽으며, 책에 볼펜으로 줄을 치지는 않지만 꽤나 많은 연필 자국과 색연필 자국을 남기는 사람이다. 저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애서가, 장서가라고 부르는 사람들. 나는 애서가도 아니고 장서가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그만큼 잘도 버리고 잘도 주고, 잘도 산다. 그냥  나는 애독자 쯤으로 해두자.

책이라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정신 세계라는 것이 무형의, 손으로도 잡히지 않고 눈으로는 더더욱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책은 그것을 고스란히 담아둘 수 있는 그릇이다. (물론 언어라는 체계는 헛점이 많으며, 아주 성긴 그물이라는 것은  덮어
두자) 그런데 책을 물리적인 무엇으로 보자면 그것은 그다지 재미없게 생긴 물건이다. 어떤 책이든 종이 뭉텅이를 하나로 묶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저마다 다른 디자인의 표지와 각각 다른 장정을 하고 있지만, 종이 뭉텅이를 묶은 것이라는데서는 차이가 없다. 그리고 그 종이들에는 글자들이 인쇄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 종이들은 침묵하고 있다. 책은 침묵하고 있는 말들이다. 읽어주기까지는 어느 글자도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한다.

그 종이 뭉텅이라는 것을 담아두는 곳을 우리는 책꽂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우리는 책의 아랫마구리가 밑으로 가고, 책등이 앞으로 나오도록 책을 꽂고, 책등에 쓰여진 제목들을 보고 책을 뽑아든다. 하지만 아무도 책꽂이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아무도 도서관의 책꽂이가 철재인지 목재인지, 목재라면 무슨 나무로  만든어진  것인지 기억하지 않는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서점에 가서 그 서점에서 책을 비치해두는 책꽂이의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책들은 '보이지 않는 책꽂이' 위에 둥둥 떠 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 '보이지 않던'  책꽂이를 어느 날 불현듯 발견한다. 서재에거 책을 읽다가 눈을 들어 눈앞의 책꽂이는 봤는데, 그것이 어떻게 오늘날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나  궁금해지더라는 것이다. 그 작은 물음은 책의 탄생까지 그를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왜 책이냐고? 더구나 왜  책꽂이냐고?  지구 저편에서 터진 테러사건이 옆집 부부 싸움보다 생생하게 중계되는 오늘, 책꽂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책과 그와 더불어 자고 있는 책꽂이 얘기는 너무한 거 아니야? 책꽂이야 아무려면 어때. 하지만 책꽂이가 '테크놀로지' 라고 답한다면 뭐라고들 대답할까? 웃음이 터질지 몰라. 그깟 책꽂이가 무슨 '테크놀로지'람. 하지만 그것은 테크놀로지다. 책꽂이가 없다면? 그건 홍수가 나서 다리가 끊어지는거랑 똑같고, 어느날 저녁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전기가 나가는 거랑 똑같은거다. '일반적으로 테크놀로지란 다 그렇다. 없을 때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책과 서가의 이야기가 새천년과  관계없는  낡고 불가해한 주제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문명의 기본적  자료로서, 오늘날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테크놀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단, 또
미래의 테크놀로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줄 것이다. 사실 미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현재나  과거를  많이 닮는다.

테크놀로지는 유물론적인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유물과 함께 해왔으며, 계속 진화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 역시 유물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고, 역사도 그렇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물건에 압도당해  그
것에 끌려 다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신을 역행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유물을 통해 그것의 진화 사례를  연구한다는  것은 좀 더 구체화된 문화의 진화를 연구한다는 것과 같다. 오히려 좀  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책의 탄생에서부터 그에 따른 책꽂이의 진화,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대중화된 책들을 보관하기 위한 도서관의  발달과 더불어 서점과 개인 서가, 더 나아가 미래의 책들의 모습까지 전망하고  있다그곳에서 문제되는 것은 언제나 책꽂이에 대한 것이다. 중세의 책꽂이는 귀하디 귀한 책들을 사슬로 묶어두는 책들의 '감옥'이었으며, 지금은 넘치는 책들을 보관해주는 책들의 '집'이다. 책을  어떤  방식으로꼽아둘 것인가, 조명이 없던 시절의 책꽂이 배치와 채광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도서관 설계에 영향을  미쳤는가 등등의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다. 군데 군데 삽입된 그림들도  재미를 배가시키고, 뒤에 부록으로 나온  <서가의 책 정리>는  귀엽기까지하다.

소설가 이인성은 그의 산문집 <식물성의 저항>에서 "소설이냐 자살이냐"라는 산문을 통해 소설의 소멸, 또 책의 소멸에 대해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문자의 선조성'이 '실감각의 다중성'을 이용하는 다중 매체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그는, 이 두 매체의 평화로운 공존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책만의 고유  영역은 파괴될 것이며, 가상 공간에 의해 인간의 실존마저 위험해질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인성의 이런 다급한 목소리에 비해 책이 책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앞으로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미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현재나 과거를 많이  닮는다'라는  페트로스키의 말은 너무나도 낙관적인게 아닐까. 책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박물관에 놓일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아이언퀼의 말은 너무나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책보다 오래 사는 구조물을 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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