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 - 아빠의 방목 철학
이규천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12월
평점 :
중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저자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머리가 좋았음에 분명해보이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상고를 가고 야간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에서 교수가 된다. 거기까지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생이구나 싶었다. 우리 아버지 생각도 나고..
하지만 대단함을 넘어서 놀랍다고 생각한 지점은, 그렇게 어렵게 얻은 교수 자리에서 대학 비리 재단 문제를 고발하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 학교에서 핍박당하다 파면에 이르게 된 지점이다.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단식하고 싸우다 납치 당하고 학교에서 부당해고에 이른 지점이다.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한 30대에..
어렵게 공부해서 얻은 자리, 혼자 힘으로 이룬 자리, 아내와 두 딸을 키우는 한 가정의 밥벌이가 될 자리, 그 자리를 내놓고 싸우는 용기(혹은 무모함). 학교는 파면당하면 다른 학교에 재취업도 힘들다며 회유했지만 저자와 저자의 아내는 한마음으로 싸웠다. 파면당하고 지리한 법정다툼에만 3년의 시간을 보냈고, 결국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얻어냈지만 남은 건 빈털털이 상황이었다. 궁금함에 이런저런 검색어를 쳐보니 부당해고로 학교와 싸워 승소판결을 받은 단신 한두줄이 나왔다.
이 책은 내게 교육법도, 교육철학보다는 치열한 인생을 산 한 사람의 이야기다. 엄마는 내게 때때로, 부모가 열심히 힘들 게 산 모습을 본 자식은 잘 자랄 수밖에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 증거가 이 저자의 삶이다. 저자는 방목을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자발적 방목이라기보다는 인생을 치열하게 살면서 어쩔수없이 선택한 교육법이 방목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88년 십이월 말 나는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유학이라는 단순한 목표 하나만 들고 덜컥 낯선 곳으로 향했다. 지나고 생각하니 나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안전과 미래를 인질로 무모한 도박을 한 느낌이다.
메트로폴리탄이 아닌 미국의 보통 생활 방식을 전혀 알지 못하 나는 공항에서 차를 빌리거나 옐로우 택시를 잡는 것에도 여러 절차와 조건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나는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일곱 개의 가방을 안전하게 책임지는 데 필요한 것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울컥한 부분은, 저자가 파면교수가 되어 법정다툼 끝에 승소했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두 딸을 데리고, 돈도 없이. 무모하다 싶긴하지만, 모 아니면 도, 인생 마이웨이, 느낌이랄까.
우리 세대에는 유명한 가수 이소은은 알파벳도 모르고 가게된 미국에서 실어증 비슷한 상황까지 이르다 적응을 하고, 그의 언니 피아니스트 이소은은 지역 대학에서 무료로 가르쳐주는 피아노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미국 생활에 적응을 한다. 저자는 장학금을 달라고 대학에 요청해서(역시 무모함...) 장학금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늦은 공부를 이어간다.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인생 키워드인 '정의'에 대한 공부를.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저자처럼 무모한 선택들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아이를 이렇게 믿어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아무래도 저자처럼 살 수는 없겠다. 몇가지 배웠다면, 이소은이 도자기를 깼을 때 순간 저자가 했다는 생각인 "도자기가 귀하다 한들 내 자식만 할까"라는 생각. 도자기를 그 자리에 둔 자신의 잘못이 더 컸다는 생각. 이소연이 연주회에 나가 상을 받지 못했을 때 진심으로 과정에서 배운 점이 크니 괜찮다고 딸을 위로하는 자세.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고, 최고의 환경을 주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기 힘들겠지만, 이 책 속 저자의 딸들은 결핍 속에서 꽃피운 것만은 확실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