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버스 정류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1
가오싱젠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각자의 개성을 살려서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들춘「버스정류장」도 환상적이지만 야인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의 이기성과 과학의 허구성등을 폭로한「야인」 도 좋은 작품이었다. 「독백」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주제성이 확연하게 살아있다.

「버스정류장」은 각자의 개성적 인물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키고 있는데, 나는 끝부분의 멘트가 마음에 들었다.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하면서도 그들 모두의 이야기의 결론은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것, 주제형상화능력에 있어 뛰어난 것 같다.

「야인」은 다성부라는 형식의 희극이다. 한데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다. 배우는 멋대로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생태학자는 그것의 연구 때문에 부인과도 결별하고, 생태학자와 여러 등장인물들, 즉 야인 반대론자나 미국인들은 세모를 끼고 야인은 없다니 있다니, 서로의 주장을 일삼고, 세모는 그 가운데서 짜증을 낸다. 결국 과학으로 밝혀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과, 그 과학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화시켜왔는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사 봐도 후회하지 않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 자신을 알라’ 외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 그래서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고르게 되었다. ‘악법도 법’ 이란 말은 와전된 것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악법을 수긍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죽은 것이다.

「파이돈」은 처형되기 직전의 소크라테스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성을 갖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성을 가진다. 죽기 직전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긴 담론에서 그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아 정말 놀랍다. (아마도 플라톤의 창작이기에 그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겠지만, 그의 사상을 계승한 그가 스승의 뜻에 어긋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행복하게 죽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는 말이 어디 쉬운 것인가? 아니다. 죽음을 아무리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하는 자도 이별은 슬픈 것이다.

철학자는 항상 죽을 연습을 하는 자들이다, 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매사에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그들의 생각으로 바람직한 사람이 아니다. 비록 ‘철학자’라는 말을 썼지만, 그들 일부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를 처형하고자 했던 사람들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된다. 의심이 많았던 케베스가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재논증을 해달라는 말에 ‘삶이 있다면 죽음이 있다(혹은 여러 가지 개념엔 그 반대가 있고, 죽음이 없다면 삶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논리를 말하는 것도 그렇다. 진정한 쾌락은 ‘육신의 쾌락’ 보다는 ‘정신적 쾌락’이고, 육신적 쾌락을 추구 할수록 육신에 매달려 처절한 타락의 길로 가게 된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실 그들을 미워했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은 자들이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며 망가지는 모습에 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를 계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자네들이 마법으로 그 두려움을 쫓아버릴 때까지 매일 마법사가 주문을 외도록 하세.”

하지만 그들은 마법사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의 답변에서 드러난다. ‘당신이 죽고 나면 어디서 훌륭한 마법사를 찾을 수 있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 소크라테스는 그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쫓을 수 있는 ‘마법사’로 여겨진다. 그 정도의 두려움 없음을 사람들이 알아줄 턱이 없다.(차라리 그것은 무모함이라 불린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그 곳에서는 항상 배운다. ‘정체성을 세우라,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담대하라’ 등 수많은 말들을 배웠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인 것은 그의 모습이 기독교적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신비주의자들(유대교로 짐작됨)의 말을 일부 수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식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교회가 선전하는 구호를 보면 믿음 외에 철학이나 그 어떤 수단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수긍한다. 내 시선으로 보면 최대한 인간의 중심에서 변명을 했지만, 어딘가 조금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파이돈」은 인간의 수준으로 최대한 할 수 있는 죽음과 인간과 영혼의 존재에 대한 ‘변명’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의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한 지식은 상기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 조금 공감했다. 나는 습작하는 시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직도 숨겨진 옛날이 많으며, 그 안에서 배울 것이 많다. 시도 그렇게 쓴다. 하지만 과거에 매이지는 않는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향해 뛰쳐나가는 온고지신, 이라는 말을 다시 새기게 한다.

지금까지 나에게 소크라테스는 그저 인상 깊은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파이돈」과 「변명」을 읽은 나는 그에 대해 엄청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자 하면 사람들과 괴리되어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기 쉽다. 하지만 그것들 중에는 유토피아처럼 불가능한 것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은 무조건 그렇지는 않고 우리 안에 있다. 「논어」나 「맹자」같은 것도 전부 대화이다. 현실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철학의 반영이다. 철학을 너무 딱딱하게 생각했던 나를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책 뒷면도 인상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디에도 있다, 라는 말은 참 인상 깊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신념을 위해 핍박받거나 목숨마저 위협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글은 작자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철학(혹은 신념)이 없는 것 또한 빈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흐트러져 있던 나의 가치관을 바로 잡고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