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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ㅣ 세계사 시인선 42
강연호 지음 / 세계사 / 1994년 6월
평점 :
품절
「비단길 2」를 징하게 우려먹는구나 싶을 정도로, ‘잘못된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시구가 이 책의 自序에서부터 허리까지 아주 깊숙하게 관통하게 있다. 그 시는 다음 시집에도 똑같이 실려 시집의 제목이 된다.(분명 가슴 찡한 시구임에는 분명하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를 먼저 봤었다. 송하춘 선생의 평에 이렇게 적혀있는 것이 참 놀라운 점이었다. ‘요즘 강연호의 시가 부쩍 생각이 깊어졌다’ 라고, 그럼… 이 시집에 생각이 그다지 깊지 않다는 얘기일까?
내가 아는 선배 형님은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는 비추천하고 『비단길』이 제일 좋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비단길』을 사보았다. 왜 그런가 해서.
이 시집에는 과거에 대한 감상주의가 아주 깊숙이 박혀있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비단길 2」를 보면,
제대만 하면 세상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욕망의 신록이 지금 때절어 쓸쓸한데
길 잘못 들수록 오히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도
그만 한풀 꺾였는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저기 또 한 고비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구릉이여
이제는 눈앞의 고비보다 그 다음 줄줄이 늘어선
안 보이는 산맥도 가늠할 만큼은 나이 들었기에
내내 웃목이고 냉골인 마음 더욱 시려오누나
따숩게 덥혀야 할 장작 하나 없이 어떻게
저 북풍 뚫고 지나려느냐,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아니더냐고 세상의 賢者들이
혀를 빼물지만 나를 끌고 가는 건 무슨 아집이 아니다
한때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잘못 든 길
더 이상 나를 철들게 하지 않겠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비단길 2」 중에서
추억에 얽매여 있지만 엄청나게 좋은 시다.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등의 시어에서 보이듯이 그의 혈기는 넘쳐나고 있다. 4―50대 쯤 되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시어. 하지만 그도 나이는 들었던 고로 이런 시를 썼다. 그는 완전히 늙지도 않고 딱히 젊지도 않았음이다.
그런데 한 가지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고 여겨진다. 한사람의 생은 그다지 길지 않다. 김명리의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에는 거시적인 삶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반면, 이 시는 삶에 대한 생각이 뭔가 허전하다는 데 있다.
그러고 보니 월동준비 튼튼하다고 해서
겨우살이 따뜻한 게 아니더군요
해 바뀌면 산에 들에 다시 꽃피는 거야
―「편지」 중에서
해가 바뀌면 과연, 산에 들에 다시 꽃필까? 그의 생각대로라면 ‘잘못된 길의 지도’는 무엇일까? 꽃도 한 번은 죽었다 사는 것이다. 그가 늙고 난 다음이면 잘못된 길의 지도를 계속 들춰봐도 소용없는 노릇이다. 이미 길은 한참 잘못 가 있는데, 즉 순천을 가야 하건만 부산을 가놓고 계속 따져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아마 다시 피는 꽃은 그의 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꽃이다. 월동준비가 튼튼하다고 해서, 산에 들에 다시 꽃핀다고 해서 오류는 반복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믐밤 골라 그대
어두운 시절의 탯줄을 이빨로 끊고 울어보시지
첩첩산중 밀봉된 세월을 적시는 바람 소리뿐
―「거울」 중에서
시인은 한술 더 떠, 이빨로 끊고 울어보라고 약 올리듯 말한다. 누구도 이 사슬을 끊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늦지만 않았다면 돌아갈 수야 있겠지만 Rewind 시킬 수는 없다. 비단길이란 것이 원래 무작정 가는 길 아닌가.
이 시기 그의 시는 젊은이 티가 너무 많이 난다, 엄청나게 발랄하기도 하고, 뭔가 덜 익은 듯한 느낌도 들고, 최루탄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실천문학 쪽 시의 느낌도 난다. 역시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가 나은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