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날 그후 - SF거장 14인이 그린 핵전쟁 그 이후의 세상
노먼 스핀래드 외 지음, 마틴 H. 그린버그 외 엮음, 김상온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이 이야기들은 거개가 5,60년대(그 이전도 이후 것들도 있다만)에 발표된 작품들로,
그 속에서 그리고 있는 핵전쟁 후의 이야기는 2008년 현재를 살고 있는 내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었다. 워낙 많은 영화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했고 이미, 핵을 겪은 나라에서 발견된 여러 증례들로 간접 경험을 해 왔었기에.  
하지만, 뻔한 얘기가 아니냐 해도 난 이 책이 무척 좋았다. 신선한 소재가 재미를 주는 책들이 있는 반면, 다 아는 얘기라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가슴에 울림을 줄 수 있는 거니까 말이다.
책을 읽으며 놀라웠던 점은, SF작가들이 예언자가 아닐까 하는 거였다. 40년대 50년대에 그린 미래의 모습이란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와 흡사한 모습이 많았다.
그런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핵전쟁에 대한 경고는 섬찟하고 가슴을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14편의 단편 대부분이 좋았지만 '세상을 파는 가게', '현대판 롯', '바퀴', '내일의 아이들', '누가 상속자인가', '부드러운 비가 올거야', '시카고 어비스 역으로' 가 가장 좋았다. 

 이 중에서도 '시카고 어비스 역으로'를 읽으면서는 엉엉 울었다.
역시 핵전쟁 후, 사람들은 피폐하고 궁핍하다. 한 노인이 벤치에서 풀잎을 말아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는 남자에게 다가가 옛 추억을 이야기한다. 담배는 어떻고, 진짜 오렌지는 어떻고.. 아마 이건 듣는 남자에겐 소위 '염장지르는 내용'이었을 테고 노인은 남자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았다. 남자는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경찰을 부르러간다. 이 노인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남자가 자신의 집으로 몸을 피하도록 도와주고 귀한 식사까지 대접한다. 사실, 이 남자는 노인을 그동안 찾고 있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노인이 꽤 유명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이 사건 이전에도 꽤 오랫동안 그 근방에서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돌아다녀왔고 그게 입소문이 꽤 나 있는 상태였던 거다. 노인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여 사람들을 자극하는 바보짓을 하는지 묻자 노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걸 잊어가는 세계에 내가 줄 수 있는 게 뭘까? 그건 바로 내 추억이었던 거요.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바로 비교의 기준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거요. 젊은 사람들에게 한때는 어땠는지를 얘기해줌으로써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거지. 게다가 추억하려고 애쓸수록 더 많은 기억이 살아나는 게 아니겠소!....중략.... 한 번은 어떤 남자가 캐딜락의 대시보드에 어떤 계기들이 있었는지 기억하느냐고 묻습디다. 그래 자세하게 말해줬지. 그 남자는 가만히 듣더니 비오듯 눈물을 흘리더구만. 기뻐서 운 건지 슬퍼서 운 건지는 지금도모르겠지만, 난 그저 추억할 뿐이라오."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파트 주변이 술렁인다. 바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들은 모두 노인을 보려고 모여든 것이다. 사람들은 한 두 사람씩 조용히 들어와 앉았다. 그 장면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주인 남자가 문을 열고 밖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파트 주민들이 한 두 사람씩 조용히 들어왔다. 마치 예배당이나 교회, 혹은 영화관이나 자동차 극장으로 알려진, 일종의 성전으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 오후 늦은 시간, 밖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곧 저녁의 어둠이 내릴 터였다. 그리고 실내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 하나가 켜지고 노인의 음성이 들릴 것이었다. 그러면 청중들은 서로 손을 잡고 그의 말에 빠져들겠지. 그 옛날 영화관 객석의 어둠 속에서. 어둠에 휩싸인 자동차 안에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말과 기억들, 팝콘, 껌, 청량음료, 캔디......


노인은 이후 남자가 준 기차표를 받고 시카고 어비스역으로 간다. 남자가 노인에게 너무 유명해져 버렸으니 1년 정도는 말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경고를 해주었고 노인은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충실히 지켜낸다. 그런 그를 남루하고 야윈 한 소년이 말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몇 시간이 흘러도 객차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도 노인과 소년은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다.
노인은 조용히 얘기하기 시작한다.

"쉬, 얘야. 이름이뭐지?"
"조지프요."
"조지프......" 노인은 말을 아꼈다. 소년을 향해 몸을 굽힌 노인의 눈이 상냥하게 빛났다.
얼굴에는 창백한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어딘가 먼 곳, 뭔가 숨겨진 것을 보는 눈이었다. 노인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을 만큼 상냥하게.
"그래, 조지프." 노인이 속삭이며 부드럽게 손가락을 들었다.
"옛날 옛적에 말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노인과의 만남은 소년에겐 참 행운이었을 거다. 현실은 시궁창이더라도 소년은 이제 꿈을 꿀 거리를 갖게 되었으니까.

덧. 이 책에서 그려낸 핵전쟁 후 인간군상은
1. 폭력 투쟁을 통해 야만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2.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3. 약빠르게 현실에 적응하고 대처해나가는 인간
4.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예전방식을 고수하다 도태되는 인간

이런 정도로 그려져 있는데, 상상도 하기 싫지만 난 저 중에 몇 번에 속할까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나라면 아마 4번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도 현실감각은 별로 없는데다 해가 갈수록 적응능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고 있으니까. 현재가 평화로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쨌건 정말 정말 이런 세상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 책을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읽고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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