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호텔에 있을 때의 일이다. 단골 한 분이 일본에서 복 요리를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어떤 곳인지 가서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곧바로 일정을 맞추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비행기 삯에 식사 비용까지 모두 손님 부담으로 다녀온 일이 있다. 친한 친구에게도 베풀기 힘든 호의다. 한 손님은 일본에서 먹은 김밥이 너무 맛있어서 싸왔다며 보여주셨다. 이미 상해서 먹을 수는 없지만 들어간 재료를 보고 개발을 해보라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지금 ‘효마키‘라고 부르는 알록달록한 대형 김밥이다. 어떤 손님은 자기가 먹은 쌀이 맛있으면 그걸로 초밥을 만들어보라며 쌀을 사서 보내주신다. 또 해외에 갔다가 소금의 맛과 향이 특이하면 그 식당에서 조금 얻어 오시거나 사다가 갖다 주시는 분들도 있다. (39)
일본 식문화가 항상 뚜껑을 덮는데 마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선물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도 있다. 뚜껑을 열었을 때 어떤 풍경일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봄에는 뚜껑 안쪽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서 이슬이 맺힌 것처럼 표현을 한다. 아침에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신선한 감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성이 많이 들어간 요리라는 게 느껴지고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69)
그러나 내 정신을 후려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들에게 식재료는 바다나 들에 나가면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에 처음 보고 평생에 마지막으로 만난 보물처럼 다루었다. 생선 껍질을 벗길 때도 우리는 휙 잡아당기는데 그들은 심기일전, 온 정성을 기울였다. 생선을 도마 위에 놓을 때도 우리는 툭 갖다놓는데 그들은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작은 충격에도 깨쳐버리는 유리그릇을 놓듯 조심스러웠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함부로 다루면 다룰수록 생선은 살이 깨지거나 멍이 든다. 그러니 유리그릇 다루듯 하는 게 이치에 맞다. (238)
생선을 곱게 다루는 건 생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내 요리를 먹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정성을 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손님들에 대한 정성이 일에 대한 정성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내 인생에 대한 정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손님들의 정보를 수첩에 빼곡히 적어 외우고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직업은 뭐고 직책은 무엇인지, 어떤 초밥을 좋아하며 밥알은 큰 걸 좋아하는지 작은 걸 좋아하는지 외워나갔다. 나아가 그의 아내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언젠가 같이 왔던 아들이 어떤 초밥을 좋아했는지 일일이 기록해 머릿속에 넣었다. 그렇게 오밀조밀 정리한 손님들에 대한 정보가 노트 2권에 가득 찼다. ... 언론에 소개되는 분들도 많아서 신문이나 잡지를 꼼꼼히 보면서 좋은 일 하신 것, 축하할 만한 일이 있는 것은 꼭 기억해두었다가 인사를 했다. 30대의 주제가 무엇인지, 40대는 무엇이 관심이 있는지 알아두었다가 어떤 연령대의 손님이 오더라도 대화가 될 수 있게 하고 법조계든 경제계든 일반적인 내용을 숙지하기 위해 애썼다. (241)
다행히 1998년 4월, 3수만에 합격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 합격 소식을 아는 사람은 김 원장님과 가족들뿐이었다. 그저 내 도전의 의미였을 뿐이므로 시험을 준비한다고 알릴 일도 아니고 합격을 했다고 떠벌일 일도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나가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행운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247)
상사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도 있었겠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당장은 직업적인 면에서 따지면 손해가 되겠지만 인생이라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자꾸 자신을 속이며 살다보면 나중에는 내 생각이 뭔지,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헛갈리게 되지 않을까. 회사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제 할 말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물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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