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안개 정원 퓨처클래식 5
탄 트완 엥 지음, 공경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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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의 일꾼들이 내 지시에 따라 유기리를 관리해왔다. 비전문가들의 손에 정원이 관리된 셈이다. 그들은 자라게 둬야 하는 가지들을 잘라냈다. 어렴풋이 가려져야 좋을 풍경을 탁 트이게 손봤다. 정원의 전체적인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오솔길을 넓혔다. 덤불 사이로 드는 바람조차 엉뚱한 소리가 난다. 덤불을 너무 촘촘히 웃자라게 방치한 결과다. (49)

* 말레이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항일전 참전 후 세력이 커졌고, 불법화되면서 정글로 들어가 정부와 게릴라전을 벌였다. 공산당의 주요 세력은 화교였다. (59)

"46년이군. 46년!"
그는 의자에 똑바로 앉으면서 웨이터를 찾느라 두리번댔다. 메그너스가 말했다.
"샴페인을 마실 만한 일이구나!"
"영국인들을 용서하셨어요?"
그는 비스듬히 앉았다. 매그너스는 한동안 침묵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전쟁 중에 그들은 날 죽이지 못했어. 또 내가 수용소에 잡혀 있을 때도 그들은 날 죽이지 못했지. 하지만 46년간 증오심을 부여안고 살았다면...... 그게 나를 죽였을게다." (80)

"어떻게 그게 두 분을 살게 했습니까?"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가상 세계로 도망쳤어요. 어떤 사람들은 꿈꾸는 집을 짓거나 요트를 만드는 상상을 했어요. 상상할 수 있는 세세한 부분이 많을수록 우리를 에워싼 공포감에서 더 멀리 벗어날 수 있었지요. ‘셀‘ 정유사의 네돌란드 기술자 부인은 수집한 우표들을 다시 보고 싶어 했어요. 그 바람이 그녀에게 계속 살아갈 의지를 주었죠. 어떤 남자는 고문을 당하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을 모두 반복해서 암송했어요. 희곡이 집필된 순서대로 외웠죠."
...
"윤 홍이 방문했던 교토의 정원을 떠올리며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한 덕분에 우린 온전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언니는 내게 말했죠. ‘우린 이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할 거야. 이게 우리가 수용소에서 걸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이야.‘" (90)

아리토모는 연못 바닥에 떨어뜨린 돌멩이라도 찾는 듯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한때 언니와 교토의 정원들을 거닌 소녀...... 그 소녀는 아직 거기 있소?"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때도 작고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 아이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내 눈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리토모는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그 아이는 거기 있소. 내면 깊은 곳에, 그 아이는 아직 거기 있소." (144)

"아가씨한테는 너무 무겁습니다요."
아리토모가 한쪽에 서서 나를 지켜보았다. 마음속에서 그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쳤다.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자 속으로 중얼댔다.
‘지금은 달라. 이제는 일본군 포로가 아니야. 난 자유로워. 자유의 몸이야. 또 난 살아 있어." (158)

나는 창틀에 기대서서 산맥을 바라본다. 샤케이. 아리토모는 모든 작업에 차경의 원리를 적용시키지 않고 못 배겼다. 그가 인생에도 그 기법을 적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스친다. 아리토모가 그랬다면, 인생에서 현실과 반사에 불과한 것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시점이 왔을까? 또 결국 내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까?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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