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세상에서 평화를 말하다 - 사회변화를 위한 비폭력 대화
마셜 B. 로젠버그 지음, 정진욱 옮김, 캐서린 한 감수 / 한국NVC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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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폭력들은 어찌된 일인가? 나는 폭력이 우리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다. 나는 신학자인 월터 윙크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그러니까 적어도 8천여 년 전부터 우리가 폭력을 즐기도록 교육받아왔다고 말한다. 그러한 교육은 우리의 연민의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킨다. ... 그러한 교육은 인간 본성이 기본적으로 약하고 이기적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악당들을 무찌르는 영웅이 훌륭한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처럼 파괴적인 신화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 신화는 사람들을 비인격화하고 인간을 사물로 다루는 언어로 나타난다. (25)

상대방이 그것을 강요로 들어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상대방이 부탁을 강요로 받아들일 때 그 결과는 자명하다. 한번은 내가 막내 아이에게 "네 옷은 옷장에 걸어주렴"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누가 아버지 노예였나요?" (51)

"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하지만 이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우리가 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즉 어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비폭력대화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매 순간에 이러한 선택을 인식하는 것, 매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할지를 선택하며 선택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모든 선택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비폭력대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69)

비폭력대화는 애도와 사과 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과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쓰는 폭력적인 언어에 속한다. 그것은 잘잘못을 내포하는 말이다. 즉 누군가가 나쁜 사람이며, 비난받아야 하고, 뉘우쳐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며 충분히 뉘우쳤다고 인정될 때 비로소 용서를 받을 수 있다. "미안하다"는 그 게임의 일부이다. 자신을 충분히 미워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정말 치유가 되는 것은 자신이 못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그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는지를 보는 것이다. (77)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없다. 우리는 천 가닥의 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감의 실들을 따라 우리의 행동이 원인으로서 흘러갔다가 결과가 되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81)

우리가 `테러`라고 부르는 행위를 한 사람들의 경우, 나는 그들이 30여 년 이상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고통을 표현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훨씬 온화한 방식으로 표현했을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경제적, 군사적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밀어붙인 방식 때문에 그들의 가장 신성한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공감적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는 점점 커졌다. 그리고 결국 그런 참혹한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128)

그들은 그가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그를 인간으로 보는 것을 잊어버렸다. 구조 안에서 부장은 구조의 언어를 말했을 뿐, 인간의 언어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관료주의의 언어를 말한 것이다. 월터 윙크가 지적한 것처럼, 조직과 구조, 정부는 자신들만의 영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 안에서 사람들은 그 영성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비폭력대화는 그 구조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그것을 관통하여 그 안에 있는 인간을 보는 방법을 보여준다. (139)

무수한 말들로 시간을 채우지 말라. 대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듣고 싶은지를 당신에게 말하도록 하라. (145)

이 경험은 사회변화 활동을 하는 내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회의 전날 밤, 내 고통과 절망감을 치유하는 데--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던 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를 다시 인간으로 볼 수 있기까지--세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음 날 단순히 소문만으로 그것을 다시 잃는 데 5초가 걸렸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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