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지음, 권영주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나를 면접한 "높으신 분"은 알고 보니 친절한 중년 신사였고, 면접도 결국 별것 아니었다. 면접관의 이름은 글렌 쇼였다. 당시 일본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던 나는 그가 또 다른 면에서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일본 근대 문학 번역의 선구자였으며, 나처럼 철저하게 무지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나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 일본을 조금 알게 된 다음이었더라면 그것을 "일본식 면접"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중요한 문제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다만 어떤 분위기만을 풍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42)

하지만 원자폭탄의 소식은 예정되어 있는 침공에도 동요하지 않고 있던 나의 마음을 크게 어지럽혔다. 나는 폭탄을 투하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 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히로시마에서 방명록에 사죄의 말을 쓰고 와야겠다는 충동을 느낀 적도 없었다. 해리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 또한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끝내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원폭에 의해 잃은 생명들보다 그 덕분에 구한 미국과 일본의 생명들이 더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 나에게는 원폭이 대부분의 일본의 좌익 인사들과 상당수의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원자폭탄이 투하된 그날,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셈이었다. 그것은 미지의 위험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70)

내가 달라진 것은 일본 사람들 틈에 있었던 것이었다. 종전 직후 그들의 행동은 가히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중국에서 귀환하는 일본 병사들을 태운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그 처리 업무를 돕도록 파견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들 매우 명랑하다는 점이었다. (76)
...... 황실이 있든 없든, 일본 사람들에게는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 충분한 내적인 힘이 있었다. 천황이 압력에 의해 물러나지도 않고, 전범으로서 재판정에 서지도 않은 것은 맥아더 장군의 허영심 때문이었다. (77)

라이샤워는 또한 내가 외교관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이것이 매우 적절한 통찰이었음이 입증되었다. (91)

가끔씩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다. ... 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과 그의 정치 모두가 불쾌했기 때문에, 굳이 그를 소개받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소설은 허풍스럽고 따분했으며, 거의 정치는 과거 나의 "톰 폐인 시대"에는 성미에 맞았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렇지 못했다. 오에 또한 굳이 나를 소개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가끔씩 큰 모임 등에서 볼 때도 있었으나, 한번도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다. (177)

그후로 나는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사는 것에 비하면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국인은 일본의 중산층--이른바 ‘샐러리맨‘--을 얽어매고 있는 의례와 의무라는 구속복을 입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3분의 1세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2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