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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평점 :

모든 계절의 반짝임 안에 녹아 있는 기억, 그건 사랑이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관계는 없지만 그래서 다시 젖을 수 있는 모든 사랑의 형태를 보았다. 여기, 그런 사랑이 있다. ‘사랑’을 다룬 본격 한국소설은 처음이다(로맨스 소설 제외). 한국소설 읽기를 꺼리는 건 여전하다. 작품에 담긴 뜻을 파악하고 이해하기가 아직도 여간 어려운 일이기에. 사실 서포터즈가 아니었다면 도전할 엄두가 안 났을 작품이다.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고, 많지 않은 분량이라 부담은 덜했지만 한 편, 한 편에 담긴 뜻을 알아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다 읽었지만 해설을 보고 나서야 그런 뜻이 담겨 있었구나, 싶었으니까. 여덟 편의 단편이 묶인 저자의 첫 소설집은 쉽게 덤비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소설 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하지만 묘하게 자꾸만 읽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다. 어려운데 낯선 감각에 자꾸 구미가 당긴다. 사랑이었다면 사랑이었고, 그저 충동이었다면 충동이었던. 고요한 가운데 파격을 안겨 주는 신묘한 작품이다. 저자의 다른 글이 있다면 찾아 읽고 싶을 정도.
특히, 가장 화나면서도 이해가 안 됐던 그런데도 이상하게 포근했던 <우리는 같은 곳에서>와 잊히지 않을 사랑의 여운을 남긴 <빛과 물방울의 색>은 가슴 한쪽을 진하게 적셨다.
소설집 제목과 같은 <우리는 같은 곳에서>는 아내가 있는데도 한때 연인이었던 여자를 주기적으로 만나는 남자가 등장한다. 도저히 상식선에서 용납할 수 없는 배우자감 아닌가. 읽는 내내 아내에게 이입해 남자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면 과잉이입이려나(입뿐 아니라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렇대도 좋다. 어쨌거나 한밤중에 걸려온 여자의 연락에 정신없이 나가려는 배우자를 반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여보. 그녀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뱉어냈다. 생각 좀 하고 말해.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60쪽
서늘한 한 마디. 드라마 대사라고 덧붙이지만 여자의 본심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남자는 아내와 함께 연인이었던 여자를 찾아간다. 세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눈발이 마치 그들의 앞날처럼 느껴졌다. 눈이 그치면 더는 예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는 예감. 같은 곳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뭔가를 기다리는 세 사람. 그들 사이에 이별과 시작이 공존하는 듯했다. 이해는 해도 용납은 못 하겠다. 세 사람 다 불행의 늪으로 빠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지극한 사랑을 맛볼 수 있던 <빛과 물방울의 색>.
우거진 이파리들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리는 빛. 그 아래에서 두 눈을 감고 있으면 네가 떠오르곤 했다. 아마도 살갗에 내려앉은 온기가 내 안의 물기를 뭉근히 데워 증발시키는 감각 탓이겠지. -73쪽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의 명장면처럼 생생하게 그려지는 묘사가 가슴에 콱, 하고 박혔다. 이 글은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 남아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선명하고 진한 색채를 지닌 글이다.
태풍이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있다 헤어진 연인을 본 남자. 옛 연인은 자신이 죽어가는 중이라고 한다. 그렇게 두어 번 더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옛 연인. 남자는 실직했다가 다른 직장을 다니게 된다. 세상은 그렇게 다르지만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그래서 더 아련하고 그리운 기억임이 틀림없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쥐었다. 쥔 채로 입술 가까이 가져왔을 때에야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 98쪽
소중한 존재의 부재는 익숙하면서도 매번 생경한 아픔을 동반한다. 그런 아픔이 내겐 없길 바라며. 저자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되고 싶다. 비 내리는 오후, 카페에 가면 불현듯 떠오를 작품일 것 같다.
* 자음과모음에서 도서 증정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진심을 담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