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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났어 작가의 발견 2
배명훈.김보영.박애진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는 상상력을 사물과 사물 사이에 다리를 놓고 그들 사이를 결합시키는 힘이라 말한 바 있다. 상상력의 기발함 혹은 창조성이란, 언뜻 보기에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없는 상이한 두 사물(혹은 대상)을 하나로 연결하거나 혹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두 사물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전혀 다른 구조로 엮어가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세계의 구성요소를 자유롭게 관계 짓고, 재구성해 새로운 이해와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배명훈, 김보영, 박애진의 단편모음집 <누군가를 만났어>는 상상력의 훌륭한 모범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각각의 작품은 상이한 장르의 불균질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모든 작품에서 발칙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이 공통적이라는 점에서 놀랍도록 통일된 이야기이다. 

배명훈의 작품은 일단 재밌다. 그는 (B급 잡지의 전설적 고전인) <선데이 서울>에나 실릴 법한 각종 도시전설·괴담, 음모론, 섹스 등의 소재를 자유롭게 엮어, 아주 그럴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게 능청스러운 구라이다.

그의 첫 단편 "이웃집 신화"는 야설의 SF버전 혹은 SF의 야설 버전으로 오르가즘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는 "~간다"는 저속한 표현을 대담하게도 '진짜 이동의 과정'으로 전제한 단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놈팽이를 정말로 벌레로 만들어버린) 카프카마저 혀를 내두를 법한 기발한 발상이다. 두번째 단편 "누군가를 만났어". 이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작가가 고안한) 심령고고학이라는 황당무계한 학문을 소재로 펼쳐지는 심오한 우주론이다. <콘택트>의 B급 버전이랄까. 칼 세이건이 찬사를 보낼 법한 아름다운 서사를 보여준다. 세번째 단편, "임대전투기"는 전선을 이탈한 병사와 시골처녀의 뻔한 로맨스를 외계행성의 전사와 지구처녀의 로맨스로 비틀고 거기에 야설적 상상을 덧칠한 다음 '스페이스 오페라'로 마무리한 단편되겠다. 가히 SF토속에로활극의 신경지를 열어젖혔다고 평가할 만큼 잡탕적 상상력의 극한을 보여준다. (단언컨대, 우주선의 정사는 분명 <007 문레이커>의 패러디일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에 필적한 전투력이다. 네번째, "철거인 6628"는 '철인 28호'와 '전격Z작전'를 연상시키는 '회색 액센트'와 '구보氏' 짝패가 분단 한반도의 종말론적 상황에서 겪게 되는 비극적인 하루를 그린 단편이다. 긴장감 넘치는 서정성을 소소한 일상을 매개로 잘 풀어냈다. 다섯째, "355 서가"는 도서관 지박령'의 기원을 연구자의 논문 스트레스와 책에 대한 집착으로 해석한 단편이다. '학교귀신'이라는 진부한 도시괴담을 연구자의 일상과 연결시켜 이렇게나 세밀하게, 신선하게 빚어내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아래와 같은 대목에서,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전쟁으로 쓸까, 문화로 쓸까…<국가 안보의 문화(The Culture of National Security)>. 기가 막힌 절충이었다. 그렇게 하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내심 감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책을 제압하려는 것처럼 책 표지에 적혀 있는 책 제목을 응시했다. 충분히 기선을 제압했다고 느껴질 때쯤 그는 책장을 넘겨서 서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규범(norm), 정체성(identity) 이런 단어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구성주의의 흔적이었다. 골치아파 보였다.(배명훈, "355서가", <누군가를 만났어>, 147쪽)" 구성주의는 골치 아프기로 유명한 국제관계론 중의 하나이다.  

배명훈은 책에 수록된 모든 단편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 즉 일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세밀한 필치, 뻔뻔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 효과적인 장르변주, 슬픈 소재를 희극적으로 엮어내는 유쾌한 능청 등을 거침 없이 보여준다. 이 사람이 쓴 논문마저 읽고 싶게 만들 만큼 매력있는 이야기꾼이다. 

다음으로 김보영의 작품은 우아하고 품격이 있다. 그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생명과 우주의 순환적 존재론'쯤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어슐르 르귄과 테드 창을 떠올릴 만큼 과학적 논리구조와 인류학적 통찰력으로 탄탄히 뒷받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첫 단편, "종의 기원"은 무기체 로봇에서 유기체 생명으로의 진화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정반대의 세계를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에서 그녀는 로봇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정교하게 창조했는데, 두텁게 잘 쓰여진 한 편의 민속지학 보고서를 읽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젤라즈니의 단편 <프로스트와 베타>를 르귄이 다시 썼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단편(아니 중편인가?>)이다.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생명과 우주의 순환(혹은 윤회)론적 존재론을 내용과 형식의 차원에서 잘 조화시킨 연작이다. 김보영은 이 소설에서 한편으로는 '시간여행자'의 탈을 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최신의 우주론과 신화적 서사로 무장한 채로, 인간과 우주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자유롭게 펼쳐보인다. 유치하게 비유해본다면, 르귄의 캐릭터를 닮은 '닥터 후(Dr.Who)'가  (그렉 이건의) <쿼런틴>의 지식으로, (아서 C.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적 여정를 거치면서,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적 에피소드를 겪게 되는 이야기랄까.

(이 책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Happy SF> 2호에 실린 김보영의 "진화신화"에는 앞서 열거한 그녀의 모든 장점이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삼국사기>에 실린 설화를 실마리 삼아, 우리의 신화와 전설을 과학적 지식프로그램 특히 진화론의 맥락에서 재해석하여 새로운 과거를 창조했다(용의 승천과 폭우의 상관관계를 이렇게나 과학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리다니.). 그뿐 아니라 그녀는 비열한 권력쟁투와 인생무상이라는 주제의식을 자신이 창조한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킨 문학적 성취를 이룩했다. 그녀의 단독 작품집을 간절히 고대하게 만든다.

끝으로 박애진은 독특한 판타지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과 뱀파이어의 그로테스크한 사랑을 그린 "선물", 비범한 정치사회학적 통찰이 예리하게 빛나는 "신체의 결합", 기묘한 꿈과 같은 꺼림칙하지만 인상적인 "누가 나의 오리 벤쟈민 프랑크푸르트를 죽였나" 등까지 그녀는 모든 단편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사설이 길었지만, 진정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이는 <누군가를 만났어>를 읽어 보시라. 

(http://sekaman.tistory.com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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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빌 브라이슨의 글은 유머와 재치로 가득하다. 잘난 척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한다. 종종 신랄하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고 때로 음흉하지만 솔직하다. 상쾌한 문체다. 때문에 짜증의 광풍이 몰아칠 때 읽으면 한결 진정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래 문장의 시시껄렁함은  대학시절 친구들과 후미진 술집에서 낄낄대며 주고 받던 시덥잖은 농담 같아 유쾌하다.

네덜란드 맥주를 손에 들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창밖의 광경을 보면서 이 큰 도시를 아름다운 운하와 쾌활한 창녀들, 풍부한 마약으로 채우다니 네덜란드 인들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 말하곤 했다. <발칙한 유럽산책>, "암스테르담", 133쪽

그런데 변하지 않은 점도 있었다. 독일 여성들은 여전히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았다. 나는 항상 이 점이 어리둥절했다. 모두들 그토록 세련되고 아름다운데 팔만 들면 수세미가 매달려 있다. 그 편히 풋풋하고 구수한 흙냄새도 나면서 자연스럽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밭에서 캐는 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겨드랑이에 무를 달고 다니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함부르크", 159쪽

물론, 이런 농담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이런 진지한 고민도 있다.

오늘날 모든 것은 지금 기차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실용성이 떨어지는 풍차처럼 기껏해야 세련된 외관을 자랑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웬만한 도시 외곽마다 양철이나 콘크리트로 대충 지어놓고 대형 마트라고 부르는 곳들처럼 싸구려 가건물처럼 보인다. 인간은 문명을 건설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쇼핑몰이나 짓고 있다. "코펜하겐", 165쪽

여러 블록에 걸쳐 길 하나가 전부 이런 가게들 일색이며, 주변 골목길까지 이런 매매춘 업소가 퍼져 있었다. 암스테르담에, 아니 세상에 단지 사정이라는 행위 하나를 하기 위해 이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걸 믿을 수 없다. 
"암스테르담", 145쪽

그리고 이런 (편견이 섞인 하지만) 재치있는 해석도 있다.

스무살 때 나는 개방성과 관용, 마약과 섹스 그리고 나이 스물에 하지 못해 안달인 여러 악행에 대한 느긋한 태도 때문에 암스테르담을 좋아했다. 실은 열렬히 존경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 암스테르담 주미들은 이런 톨레랑스(자신과 다른 종교, 종파,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의 전통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취한 다음에는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이런 문제에 대한 지성인의 관용 또는 톨레랑스를 수백년 동안 찬양해 왔기 때문에 낙서나 마약에 찌든 히피와 개똥, 쓰레기 따위를 점잖게 묵인하는 태도를 이제 와서 버릴 수가 없다. 물론 내가 상황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개똥과 쓰레기를 좋아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제발 그렇기를 바란다. 개똥이 많아도 보통 많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 141쪽

남의 시선을 의식한 글보다는 본인의 생각과 견해에 충실한 글이 훌륭한 글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의 교육은 일하는 기계가 아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http://sekaman.tistory.com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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