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나이트>는 선의 화신을 유혹하여 세상의 균형을 되찾는 악마의 성공담이자, 극단의 자경단원이 자신의 한계와 정체에 절망하는 싸이코 드라마이고, 자기허상에 빠진 방범대원과 진실을 이해한 미치광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조커, 이 현대의 메피스토는 선과 악이란 일종의 역할극이며, 그 배역은 우연히 결부되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결정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선/악의 이분법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기초한 망상에 불과하다. 애초부터 절대선이나 절대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는 언제나 섞여 있고, 아주 잠시 분리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세상이 혼돈의 덩어리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조커는 묻는다. “도대체 왜 그리 심각한건데?” 세상의 논리는 욕망의 본능을 따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의 미소가 우스꽝스럽지만 섬짓한 것은 진실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투페이스는 운명의 동전을 던진다. 더 이상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선과 악이란, 삶과 죽음이란 아무렇게나 뒤집어지는 동전과 다름없다. 모든 것은 던져진 동전의 판결을 따르면 된다. 결과가 불만이라면, 다시 동전을 던지면 그만이다. 여기에 사회윤리나 정의, 권력 등이 개입할 틈은 없다. 오직 ‘운’만이 작용할 뿐이다. 세상은 불공정하지만, 운의 윤리는 언제나 공평하다. 게다가 간단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황상태에 빠지는 건 우울증의 천사, 배트맨뿐이다. 조커는 말한다. “나를 불러낸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거야.” 불편하고 당혹스럽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활약이 두드러질수록 악당은 더욱 과격하고 악랄해진다. 대중은 이제 그를 비난하고, 제거하려 한다. 선과 정의의 대리인이라 확신했던 사람마저 선/악의 이종교배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조커의 지적처럼, “너로 인해 모든 것이 변했어, 주위를 둘러 보라고. 그는 이 조증의 악마가 벌이는 무차별적이고 전방위적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난 너랑 노는 게 너무 좋아, 넌 날 죽일 수 없어.” 조커가 낄-낄댄다.

배트맨에게 범죄자 취급을 받은 한 자경원단(가짜 배트맨)이 소리친다. “네가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과연 무엇이 다를까. 선을 향한 의지, 아니면 방법. 극중 폭스(모건프리먼) 사장의 답변은 음미할 만하다. “자네의 고용주이며, 세계 최고의 갑부인데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날뛰는 무법자.” 양자의 차이는 자본과 권력의 규모일 뿐이다. 하여 그의 정의는 독선이다. 이미 그는 알고 있고, 정직하게 대답한다. “복장의 차이지”, 그 뿐이다. 

대중을 깨우치는 조커의 상황극은 한 가지 실험을 통해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 두 척의 배가 있다. 한 척에는 무고한 시민이, 또 다른 한 척에는 악당이 탑승하고 있다. 양쪽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스위치는 서로의 배에 있다. 조커는 제안한다, 30분 이내에 상대방을 폭사시키는 쪽은 살려주겠다고.(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예이다. 알고 있듯이, 게임의 결론은 대부분 공멸이다.) 

우리의 어둠의 기사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 사실 그도 궁금하다. 자기가 확신하던 선의 실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관객인 우리도 선량한 탑승객이 되어 고민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려면 저들이 죽어야 한다. 누군가 제안한다. 표결에 부치자고. 좋은 생각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일 뿐더러, 죄의식 또한 1/n 될테니 부담이 한결 덜하다. 게다가 저들은 악당 아닌가. 역시 결과는 압도적이다. 이제 스위치만 누르면 악몽은 끝이다. 이건 내 결정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결정이다. 악은 평범하고 민주적이다.(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평범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모르겠다고? 왜 그래, 눈치 없이 지금 겪고 있잖아.)

저들은 우리를 죽일 것이다. 저들에게 우리는 죽어도 상관없는 범죄자에 불과하니까. 험악한 인상의 흑인 죄수가 나선다. “죽기도 싫고, 죽이기도 싫은데. 결정을 못내린다면, 당신이 10분전에 내리지 못한 결정을 내가 마무리 하지.” 역시 범죄자의 결정은 단순하고 간결하다. 이제 선량한 시민들은 모두 죽게, 되는 게 아니다. 그가 스위치를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예상 밖이다. 그는 혹은 그들은 희생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는 불편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상업 영화 <다크나이트>는 한발 물러선다. 선량한 시민들 또한 심리적 압박(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대학살의 버튼을 누르는 악역을 누가 자처하겠는가.) 때문에 결국 스위치를 누르지 못하고, 모두 살게 되는 결말로. 조커는 의아해하고, 배트맨은 안도한다. 관객 또한 안도한다. 대학살의 공범이 될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승자는 배트맨인가, 선인가. 당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아름답다, 자신할 수 있는가. 조커가 히죽거리며 쳐다 볼 것이고, 우리는 그의 눈을 피할 것이다. 우리는 내막을 알고 있다. 그들은 타인을 제물로 자신의 생존을 선택했다. 구차한 이유가 뒤따르겠지만, 모두 헛소리이다. 우리 안의 심연에 고개를 숙였던,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과거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배트맨은 과연 이 불편한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조커는 살아 남았고, 하비덴트는 투페이스로 거듭났으며, 배트맨은 쫓기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승자는 누구인가. 

(http://www.cyworld.com/sekamanx 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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