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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프로코피우스 지음, 곽동훈 옮김 / 들메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역사책에는 정사와 야사가 있다. 국가의 감독 하에 편찬된 정사는 공신력이 있지만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다듬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야사는 개인이 쓴 것이라 공신력은 좀 떨어지지만 정사에서 누락된 정보와 다양한 견해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 보통 권력의 눈에 든 사람이 정사를 기록하고, 권력의 눈 밖에 난 사람이 야사를 쓰는 일이 많다.
그런데, 한 나라의 공식 역사를 기록하던 궁정역사가가 후세에 남기기 위해 남몰래 야사를 썼다면? 굉장히 드문 경우인데,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실제로 그리했다. 그는 이 책에서 동로마제국의 중흥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 황후의 잔혹한 실상을 작심하고 폭로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이기도 했고 제국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운 벨리사리우스 장군 부부의 눈뜨고는 못 볼 우행(愚行)도 덤으로 까발린다. 대놓고 썼다가는 밀정들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했을 것이기에 책은 황제가 죽고 난 뒤에야 발간되었다.
책을 쓰게 된 사연도 놀랍지만 서술방식도 남다르다. 프로코피우스는 역사 교과서 쓰듯이 무미건조하게 사건을 나열하지 않는다. 서술방식은 소설처럼 다채롭고 사례는 풍부하며 묘사는 뜨겁고 생생하다. 매 문장마다 황제 부부에 대한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환멸감, 망조가 든 나라에 대한 비분강개와 한탄이 묻어난다. 가히 비잔틴 판 시일야방성대곡이라 할 만하다. 벨리사리우스의 아내 안토니나의 문란한 사생활과 교활함을 소개하는 에피소드들은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하고, 황후 테오도라의 음란함과 탐욕과 권모술수를 묘사하는 일화들은 19금 영화 저리가라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열거하기도 힘든 폭정과 실정을 다루는 에피소드는 최근 몇 년간 이 나라 집권층의 정치 행태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예를들어 선대 황제가 차곡차곡 모아놓은 국부를 대형 건설사업과 전시행정으로 탕진하기, 과거의 합리적이었던 법률, 조세, 행정 체계를 부정부패로 망가뜨리기. 서민을 위한 각종 복지제도를 무너뜨려 빈익빈부익부를 극대화하기, 뇌물수수와 이권 나눠먹기로 천문학적인 사재를 축적하기. 반대파에게 이단, 남색,이교도 딱지를 붙여 마녀사냥하고 탄압하기, 고위직과 법률가들의 극심한 타락상, 아첨꾼과 측근들에게 각종 독점권을 몰아주어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기. 치솟는 물가와 과도한 세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쥐어짜는 방법..등등...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가 권좌에 있던 기간은 38년이나 되었다.황제부부는 ‘니카의 반란’ 때 자국민 3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폭정의 시대를 숨죽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각이 여삼추일진대 무려 38년이라니...거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치욕의 세월을 운명처럼 견디며 공식석상에서는 황제의 치적을 묵묵히 기록했지만, <비사>를 숨겨 놓고 황제가 죽기만을 학수고대했을 노(老 )역사가의 처지가 생각할수록 애잔하다.
책의 서문에서 프로코피우스는 '후일 전제군주로부터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자신들만이 악행의 희생자가 아님을 알고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고 썼다. 졸지에 군주독재국가의 신민이 되어 고통받는 이땅의 민초들에게도 큰 공감과 위로가 될 역사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