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박연준 지음 / 북노마드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인의 산문집'은 편애하는 장르다. 기대하며 들춰보게 된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일도 거의 없다. '소설가가 낸 시집'이라는 말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설렘이 생기는 것은 원체 말을 아끼는 시인들이라 산문을 통해 그들의 내밀한 세계를 조금 엿볼 수 있어서다. 말하자면 시의 비밀을 아는 일이다. 비밀을 알아챈 순간 시가 시시해지는 거 아니냐고? 아니, 그들의 글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시시한 삶이 시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인 거다.

 박연준의 글은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로 처음 접했다. 제목만 읽고 반해버린 시인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제목 자체가 거대한 시여서,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어떤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다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딸을 처제라고 부를 만큼 많이 아픈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지켜보는 딸이 느낄 복잡한 심경 ― 그 마음들을 뭉뚱그려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지 ― 이 그 안에 다 녹아 있었다. 잘난 아버지를 좋아하기는 쉽지만 못난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녀의 시도 좋았지만, 본 적도 없는 박연준이라는 사람이 슬며시 좋아졌다. 궁금했다.

 박연준의 산문집 『소란』을 통해, 그녀의 글을 좋아한 사람들은 평소 궁금했을 그녀의 면면을 사소한 일상부터 의미심장한 사건 및 인물들, 크고 작은 감정과 생각들로 만나게 되어 기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몰랐던 사람도 책을 통해 이 작가의 다른 책으로 건너가고픈 희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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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울어지는 것들만 골라서 사랑하는 유별난 취미가 있고, 그것은 천성이나 성격과 관계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방은 서쪽, 사람은 어깨가 한쪽으로 조금 기운 사람, 꽃은 말없이 피고 지는 모든 꽃, 꿈은 파닥이다 사그라지는 꿈이 좋다.   서쪽, 입술 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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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집의 첫 꼭지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시인은 시가 처음 찾아온 순간, 아버지와의 일화, 연인에 대한 기억 등을 솔직하고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고 있다. 스스로 '슬픔의 창녀 노릇'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글 곳곳에서 그녀는 등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고 슬픔에 잠긴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그 슬픔은 전혀 청승스럽지 않고 눈부시게 반짝인다. 마치 길이가 긴 시를 읽는 것처럼 고르고 골랐을 언어들은 절제된 채 투명한 존재감을 발한다.  

 특히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 그러나 이제는 없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한참 머무르게 된다. 죽은 아버지, 이별한 연인을 추억하며 쓴 글들을 읽다보면 글을 쓴 사람에게 가장 아팠을 기억들이 독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읽히는 역설을 깨닫는다. 박연준이 좋아한다는 '시란 패자가 모두 갖는 게임'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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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버지는 제대로 패배한 사람이었지. 순하게 늙고, 완전하게 패배하고 싶어했고 결국은 성공했으니까. 대학 때는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저 패배주의를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패배주의를 증오한다고 치를 떨었지. 요새는 이런 생각이 들어. 도대체, 제대로 패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바보 이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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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녀는 다만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녀의 글은 그것을 수식할 뿐이다.

 맞아요. 난 이파리가 거센 비를 피하지 못해 휘청거렸듯이 나도 한 시절 당신에게 호되게 빠져 휘청거린 적 있었네요. 그때 나를 누군가 번쩍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면, 아마 그 사람을 증오했을 거예요. 누가 사랑에 빠진 자를 말릴 수 있겠어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나는 사람마다 각자 경험하고 지나가야 할 일정량의 고유 경험치가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다 겪지 못하면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 거죠. 당신을 사랑하고, 또 헤어지던 순간은 꼭 필요한 경험이었어요. 그 일을 나는 긍정합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사람을 일컬어 "한밤중에 펼쳐진 책"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부터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거겠죠.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라는 책이었고,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찢어 없앴고,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즐거웠습니다.   하필, 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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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강약중강약'의 리듬으로 짜여져 읽기 편하다. 명랑함이 느껴지는 짧은 산문도 많고 마지막 장의 사진을 곁들인 글들은 보너스다. 무엇보다 이 책은 베껴 쓰며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시인이 글로 옮긴 마음 속 작은 소란들은 읽는 사람의 소란한 마음을 오히려 차분하게 정돈시키는 힘이 있다. 마음이 분주하고 산만할 때 한 꼭지씩 종이에 필사하면서 천천히 문장을 음미하며 읽으면 딱 좋겠다. 

염을 할 때 아버지의 손과 발, 내가 사랑하던 얼굴을 오래 만졌다.
지금도 만져보고 싶다.
가끔 만질 수 없다는 게 의아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다. 새삼 이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어떻게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온 걸까? 내 몸속을 흐르는 피는 어떻게 한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고 지금껏 움직여 왔을까? (······)

내 침대 아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죽음. 훗날 죽음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려 할 때, 피하지 않고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후회 없이 살았고, 즐거웠다고. 사랑이 충만했다고 말하며 다 읽은 책을 덮듯이 삶을 탁, 닫고 싶다. 그다음 죽음의 손을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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