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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 밭에 심어 가꾸는 곡식. 줄기는 곧게 자라고, 잎은 좁고 길다. 국어 : 우리나라 말 사전 : 여러 낱말을 차례대로 늘어놓고 풀이한 책. 낱말의 뜻, 소리, 쓰임새 들을 찾아보는 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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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재灰 > 번역자와 사용자의 '길'에 대한 단상

 

* 호흡을 짧게 해도 읽히는 토막글들에 대한 독서일기를 이 카테고리에 담는다. 호흡의 길이가 공부의 깊이를 늘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므로 이 카테고리는 정당하다. <노마디즘>의 저자에게 날을 세운 <천 개의 고원> 번역자의 글이 그 첫 출발이다.  

 

1


들뢰즈 번역 출판의 선편을 쥔 김재인이 근래에 비판의 칼날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그 상대는, 들뢰즈 사상 전반에 대한 해설서인 <노마디즘>의 저자 이진경이다. 아래 인용부분은 알라딘 리뷰에 김재인이 남긴 토막글의 일부다. 그것에는 <문학동네>에 실린 "<천 개의 고원>이 <노머디즘>에게"라는 긴 비판문의 핵이 담겨 있다.


"<천 개의 고원> 역자로서 한 마디 붙입니다. (...) 제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마디즘>이 제가 번역한 <천 개의 고원>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책 도처에서 저의 번역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응답하지 않으면, 인정하는 꼴이 되버리지 않겠습니까? (...) 이진경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위와 같은 발언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을 뒤틀고 있습니다. 이진경 씨의 주장과 들뢰즈 자신의 발언은 명백히, 뿌리부터 어긋납니다. 문제는 이런 오류가 <노마디즘>에서 주요 개념 거의 전부에 걸쳐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개념 번역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부분적인 잘못이야 누구나 범하는 일이니까요), 개념 이해와 설명에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지면 관계상, 단지 지면 관계상, 다른 오류를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오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반 독자들은 어쩌란 말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이게 한국 학계의 현주소라고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상호 검증도 없고, 상호 검증할 만한 사람들도 없고(...) 끝으로 <노마디즘>에 대한, <천 개의 고원> 번역자로서의 소감을 구호로 정리하겠습니다. "긴장도가 한없이 떨어지는 책, 끊임없는 오해로 중첩된 책, 그래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책!"


그의 자기중심성은 꽤나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역자의 신분을 밝히고는 알라딘 리뷰에다 급박한 토막글을 올린 것을 통해서, 그의 그 비판적 서평이 일거에 구축된 글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들뢰즈라는 한 걸출한 인물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번역자'로서의 '엄밀성'은 그의 최대 최량의 무기다. 그런 무기가 있음으로 해서 그는 정곡을 비껴난 비아냥이나 거친 숨을 몰아 쉬는 흥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실력이 들통날까 겁내며 권위로 토론의 장을 파괴하거나, 고의로 그 장을 회피하며 고생스런 변명을 일삼는 이들은 김재인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이진경은 그러나, 그 같은 김재인의 글에 대해 아무런 답을 하고 있지 않다.  이들 젊은 두 연구자가 동일한 대상을 거점으로 학문적 공방을 치열히 전개한다면, 그 반향의 의미는 작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이진경의 반응은 있어야 한다. 묵묵부답인 것은 김재인에 대한, 그리고 그 둘 함께 존경하는 많은 학인들에 대한 도리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김재인과 마찬가지로, 이진경의 책임있는 자기중심성에서 피어 오를 향내를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싶다.



2


이진경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맑스를 추종해 함몰하지 않고 사유의 동일한 레벨을 지향하며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자 했다. 그 연장선 위에 <노마디즘>도 걸쳐져 있는 듯하다. 들뢰즈에 대한 '번역'이 아닌 '해설'을 내걸었기에, 실상 그 저층에는 들뢰즈의 사유에 대한 대타적 성격으로서의 '어깃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원전의 정치한 번역과 그 원전의 실체적 구현. 이 둘 사이, 가장 들뢰즈적인 것은 무엇인가. 김재인과 이진경을 지반으로 한 이 물음에 대해 깊이 없는 '원전중심' 비판은 이미 무효하다. 위의 물음은 들뢰즈에 제한된 국부적 문제가 아니라, 키드(kid)들을 양산해내는 한국 인문학문 일부 혹은 전부의 뿌리 부재를 재사유하는 문제에 걸리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재사유가 깊어지면 사회 사상 생명 물질에 대한 포괄적 인식론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보다 크고도 근원적인 문제로 된다.


다른 한편, 위의 인용문에서 김재인이 말한 "한국 학계의 현주소"를 타개해 나가는 방법이, 한 외국 철학자에 대한 상호 검증과 해설의 자리를 만드는 것에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부분적인 것에 멈추기 쉽다. 그런 자리를 최저층에서 관류하는 왜곡된 인식론을 문제삼을 때만이 한국의 학문적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타개책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재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함몰된 들뢰지언'이 된 것은 아닌가. 근대 분과 학문의 탄생과 성장에서부터 그것의 해체를 말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통괄해, 그 편향된 지향성의 원인을 '한국 인문학의 서구 컴플렉스'라고 지적하는 이진우의 비판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인문학이 지나온 투쟁적 정점들의 '과정'과 그 '효용'에 대한 진지한 '답사'는 중요해진다.


'일리(一理)'와 '역안(譯案)'과 '생극(生克)'과 '플레타르키아'와 '흰 그늘'과 '심미적 이성' 등이 밟아나온 길들이 그런 답사의 대상들이다.

 

 

 

 


'동'과 '서', '고'와 '금'의 우열이 공부자에 의해 판가름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학문적 차원에서 운위되야할 것이지, 유행적 담론들의 말류 감각으로 재단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난해하지 않고 명료한 말들을 대하는 사람들은 보다 쉽게 느낄(感) 수 있고, 그래서 보다 쉽게 움직일(動) 수 있다. 그런 '감동'을 통해 '틀' 자체를 새롭게 곱씹기 위한 단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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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퍼온글] 우리들의 행복한 공지영

잡일들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까 생각하던 중에 장문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었다. 한국일보에 '100℃ 인터뷰' 코너가 새로 생긴 모양인데(원래 있었나?) 소설가 공지영과의 아주 '뜨거운' 인터뷰를 싣고 있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1/h2007010119334584290.htm). 아침신문에 게재될 듯한데, 이만한 분량이 전재된다는 게 일단 놀랍다. 지난해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인 만큼 안티독자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는 '문제적인' 작가 공지영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데 아주 요긴한 '창' 구실을 할 듯해서 옮겨놓는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국일보(07. 01. 02) 소설가 공지영

이 만남은 뜨겁다. 덕담이나 입에 발린 말은 사양한다. 까칠하게 묻고 집요하게 말꼬리 잡는다. 새해를 맞아 한국일보가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사회 각계 인물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모습을 파헤치는 다자(多者) 입체 인터뷰를 선보인다. 한 무리의 기자들이 치열하게 묻고 따지는 반론과 해명의 이 펄펄 끓는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편집자주

아주 좋거나 아주 싫거나! 그 중간은 없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소설가 공지영(44)씨. 어지간히 잘 나가는 작가도 1만부를 넘기기 어려운 문학의 장기 침체 속에서 홀로 78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린 그에게는 작품 외에도 늘 다양한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운동권, 페미니스트, 미모, 세 번의 이혼, 성이 다른 세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 공지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저 단어들로 인해 오해와 편견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를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네 명이 만났다. 지난해 12월28일 오후 6시, 홍대앞 한 퓨전식당에서 시작된 이 까칠하고도 뜨거운 인터뷰는 술잔을 기울이며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됐다.

_<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덕분에 지난 한 해가 ‘나의 행복한 시간’이었겠어요.

“네. 당분간 생활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그게 제일 행복하고요. ‘사형제 폐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요.

_불편한 반응들도 있지 않아요?

“많죠. 반은 그렇다고 보면 돼요. 참 이상한 게 그런 리뷰들은 대개 ‘나는 공지영이 너무 싫다’로 시작하는데 끝에 가면 ‘그런데 책은 다 읽었다’ 이렇게 끝나.(웃음) 이게 되게 이상한 현상인 거 같아요. 처음엔 ‘왜 나를 미워하지? 싫으면 안 읽으면 되지 왜 다 읽고, 여기다 리뷰까지 달면서 날 미워할까’ 생각했는데, 뭐 어차피 대중들의 시각이란 게 완벽하게 일치하는 게 이상한 거죠. 어쨌든 저야 팔아주시니까 고맙죠.

_78만부나 팔았으면 죽을 때까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겨우 생활비 걱정 면한 건가요.

“아니, 얼마 전까지 생활비 걱정 했다니까 왜 그래요.(웃음) 막내 대학까지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밤마다 울었다니까요.”

_한 달 수입이 30만~50만원도 안 되는 작가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면 다른 작가들 맥빠지겠어요.

“맞아요. 좀 그렇긴 하죠. 하지만 다 사연이 있으니까 걱정이 된다는 거죠. 돈이라는 게 번대로 착착 쌓일 수도 없는 거고….”

_공지영 소설은 20대 여성이 가장 많이 읽잖아요. 젊은 세대와 통하는 게 있다는 얘긴데.

대학 때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중학교 때 전기가 처음 들어와서 감전된 적 있다’ 이런 얘기들을 막 하는데 너무 놀랐어요. 전 공선옥씨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을 읽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갔어요. ‘왜 대학까지 중퇴한 여자가 이런 데 가서 이 고생을 하지? 취직을 하든가 장사라도 하지’ 이해가 안 가요. 나중에 느꼈는데 60년대산들은 지역이 불균형하게 개발될 때다 보니까 지역별로 세대차가 막 나더라구요.

저는 우연히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경제개발의 혜택을 제일 먼저 입은 세대로 자라나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요. 바로 롤러스케이트 타고, 자전거를 탔죠. 당연히 TV도 봤고. 어떤 의미에서는 70년대 중반산들과 같은 경험을 가진 거예요. 아파트키드라는 거, 대도시적 감수성 가진 거. 문학소녀일 때는 대도시에 태어난 게 너무 창피했었어요. 그때 문학은 다 농촌정서 얘기하는데 나는 도저히 그게 무슨 얘긴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 열등감을 느꼈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제 정서가 더 보편적이 된 거 같아요. 제가 잘 해서 선취한 것이 아니라 제가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죠.”

_공지영씨의 좌파적 가치가 젊은 세대와 통하는 것 아닐까요.

“전 제가 좌파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날 토론에 나갔다가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낙태에 관해 기본적으로 반대입장 취하거든요. 그런데 ‘넌 좌파가 어떻게 낙태를 반대하느냐, 더군다나 페미니스트인데’ 하면서 굉장히 공격을 받았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정치적인 면에서만 좌파고 나머진 굉장히 보수적이더라구요.”

_예를 들면요?

“결혼 같은 거. 이거 웃긴 얘기지만, 남자와 여자는 꼭 결혼을 해야한다든가, 하하. 사람들이 왜 자꾸 결혼을 하냐고 물어서 제가 ‘아니, 사랑하면 결혼해야 되는 거 아냐?’ 그랬거든요. 물론 요즘 좀 생각이 바뀌었지만. 아무튼 그런 면에서 되게 보수적인데, 저는 사안에 따라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게 훨씬 더 고뇌에 차고 가치 있는 삶인 것 같아요. 좌파, 우파로 나누면 제가 어느 쪽인지 모르겠고, 최소한 상식과 합리가 있는 길을 가고 싶어요.”

_운동은 왜 했어요?

“나 진~짜 운동하기 싫었어요. 안 하려고 엄청 애썼고. 그런데 왜 하필 나랑 친한 애들은 다 운동하고, 잡혀가고, 죽고 그러는지. 난 무섭고 귀찮고 싫고 피하고 싶었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예쁜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이상을 가장 근접해 실현하고 있었어요.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이쪽으로 따라갔죠.

또 하나는 안 하고 있으면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차라리 내가 가서 괴로움 당하는 게 낫지. 멀리서 남들 괴로워하는 거 보면서 마음 괴로운 거보다 몸으로 때우는 게 덜 괴로웠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예요. 그것이 오늘날의 절 만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죠. 만약 이 과정이 없었다면 저는 정말로 재수없는 부르주아 여성이 됐을 거예요.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내 인생에 기여한 바가 참 많아요. 나를 정말 사람 만들어줬죠.

_운동하면서 아버지와 갈등 많았잖아요.

전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는 딸이었어요. 제가 1남2녀의 막내거든요.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외국인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전용차로 도요타 크라운이라는 커다란 외제차가 나왔어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아버지는 아무리 술을 많이 드시고 온 날이라도 직접 운전해서 학교까지 태워다 주셨어요. 전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구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희 집이 한국일보를 봤는데, 아버지는 ‘장명수란 여자가 대단하다. 난 니가 그런 여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한테 기대를 많이 하셨죠.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형사가 집으로 찾아오면서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뺨을 한 대 맞았죠. 아직도 정치적인 의견은 많이 다르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_사실 공지영 소설이 문체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미학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서사가 강해서 번역해도 잃을 게 하나도 없는데.

“전 소설을 대하는 입장이 동시대의 다른 문인들과 달라요. 그래서 이런 삐그덕거리는 일들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문체가 아름답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뭐예요, 도대체? 아름다운 단어를 써야 아름다운 문체인가요?

저는 처음부터 미사여구 쓰지 않고, 화려한 문체보다는 단문으로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했어요. 소설은 캐릭터와 상황의 문제예요. 중요한 건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 캐릭터를 어떤 상황에 배치하는가죠. 사람들은 <춘향전>이나 <베니스의 상인>을 원전으로 읽지 않아도 춘향이와 샤일록이라는 캐릭터는 알아요. 제가 추구한 것은 삶의 본질, 인간성, 시대의 본질을 전달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 들었을 때 굉장히 당황했어요. 서사가 강한 게 뭘 그렇게 잘못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나는 소설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항상 보면 ‘극단적인 캐릭터다’, ‘문체가 너무나 거칠다’ 이런 평들을 하니까. 왜 내가 추구하는 것들은 하나도 얘기 안 하죠?

_<춘향전>이나 셰익스피어의 소설미학과는 다른 시대잖아요. 오히려 공지영의 소설이 낡았다는 얘기 아닌가요.

“전 어떤 의미에서 그런 비판을 좋아해요. 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서사의 회복과 캐릭터의 독특성이라는 정공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현대 문학 중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게 <해리 포터>인데, 이건 19, 20세기 정통 영국소설의 문법이거든요. 그 소설은 그렇게 책을 읽지 않는 애들로 하여금 책을 잡게 만들었어요.

서운할 때 드는 생각은 저라는 사람이 2000년대 대한민국에 있는 3만명의 소설가 중 하나인데 왜 나에게 이 모든 것을 원하냐는 거예요. 우리가 최민식 송강호 같은 배우들한테 ‘요즘 영화배우답지 않게 너희는 왜 그렇게 얼굴이 크냐’ 안 그러잖아요. 이나영, 강동원 같은 배우는 연기는 좀 못하지만 클로즈업 하면 우리가 즐겁고. 그런 게 다채로운 영화를 만들어가듯이 한국문학도 다양성 속에서 크게 아울러야 해요.”

_다양하게 아우를 수 있는 시장상황이면 좋지만 혼자서 책을 다 팔고 계시잖아요.

“다양하게 아우르지 않으니까 독자들이 자꾸 떨어져나가는지도 모르죠. 평론가들이 왜 그걸 포용을 못하는지, 포용의 문화가 좀 아쉬워요.”

_평론가들로부터 외면 받으면서 “넌 네 길을 가라, 난 내 길을 간다” 식이 돼버렸는데.

“그럼 내가 어떡해요. 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도 없는 거고. 상도 안 주는데 내가 왜 해.(웃음) 사실 보상이란 게 꼭 평론가들만이 주는 건 아니고, 제가 독자들한테 물질적이거나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때문에 상관 없어요. ‘나는 왜 문학적으로 평가 받지 못하는 거야’ 그런 생각도 별로 안 하고. 이 시대의 평론가들, 상을 주는 심사위원들이 모든 문학을 끝까지 쥐고 있고, 앞으로도 쥘 수 있을지…, 아, 이렇게 자꾸 말하지 말라 그랬는데, 사람들이.(일동 웃음) 이러면 점점 멀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데.”

_상하고 인연은 진짜 없죠?

“세 번이면 됐죠. 이런 말해서 좀 그렇지만, 솔직히 이상, 동인 별로 존경하지도 않는데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받고 싶지 않아요.

_한국일보문학상이면?

“그건 괜찮아요. 가치중립적이니까. 근데 안 주잖아.”(웃음)

_이제 공지영이라는 이름은 확실한 브랜드가 된 것 같아요. 무슨 책을 써도 기본은 팔린다는 관측인데.

그건 오직 신만이 아시는 거죠. 독자들은 너무 변덕스러워서 그 기호를 따라가다가는 제가 망해요. 그냥 제 배짱대로 쓰는 거죠. 우리 문단에서 ‘밥벌이 때문에 소설 쓴다. 밥벌이 안되면 미련 없이 떠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저랑 김훈 선배예요. 난 가장이기 때문에 노동의 대가가 충분치 않을 경우 하시라도 국수집을 할 태도가 돼 있어요. 국수 맛있게 마는 비법이 하나 있거든요. 제겐 프로작가로서의 내 노동이 우리 아이들과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_얼마 전 라디오 설문조사에서 미녀배우들과 함께 ‘20대 여성이 뽑은 닮고 싶은 여성’ 4위에 올랐어요.

“하하하. 1위가 김혜수, 2위가 고현정, 3위가 이나영, 5위가 손예진이었어요. 내가 그거 다 외워. 황당했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내가 올 초에 3번 이혼한 사실을 밝힐 때까지 어려운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남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는데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아, 이 죄인을’이었고. 난 나대로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닮고 싶다니. 세대가 바뀌긴 바뀌었나 봐요.”

_남성잡지 <에스콰이어>가 뽑은 ‘남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 1위에도 올랐어요.

“와. 그러니까 자꾸 광고가 들어와서 날 힘들게 하는구나.”

_무슨 광고요?

“커피 광고도 들어오고, 소주, 아파트 광고도 들어왔어요.”

_거절하셨어요?

“네. ‘묶어서 한 10억 부르고 한 십년 쉬어?’ 하는 그런 생각도 했는데요(웃음). 예전에 돈이 너무 없을 때였는데, 자동차 지면 광고가 들어온 적이 있어요. 너무 유혹적이었죠. 하지만 내가 자본주의도 비판해야 하는데, 거기 가서 ‘이 차 사세요. 좋아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언젠가 그랑 부르주아를 소설에 등장시켜서 깔 수도 있는데, ‘이 차 너무 좋거든요’, ‘이 소주 너무 좋아요’ 이러면 내가 나중에 그걸 어떻게 비판을 해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유를 위해 돈을 포기한 거죠. 얼굴 팔리면 제 생명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익명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이고, 그건 내가 보통인들이 느끼는 체험을 못하고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잖아요. 그러면 저의 작가로서의 삶도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예요.”

_본인도 자기가 예쁜 거 아시죠?

“아니요. 몰라요.”(웃음) 사실 그거 작가생활 하는 데 저 너무 불리해요. 전 정말 제가 못 생겼으면 책이 배는 팔렸을 거라고 생각해요."

_(이구동성으로) 그 반대 아니에요?

“아뇨, 아뇨. 강동원과 이나영의 연기력이 폄하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장동건씨가 전에 “정말 잘 생긴 게 이렇게 핸디캡일지 몰랐다”고 했는데, 난 잘 생겼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이렇게 노력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내 얼굴만 봐요. 얼마 전 조선일보에서 박완서 선배가 공지영 신드롬의 원인 중 하나로 미모를 꼽았을 때 굉장히 불쾌했어요.”

_그런 말도 종종 듣지 않았어요?

“예. 들었어요. 지금은 너무 영광이죠, 사실.”(웃음)

_지금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외모가 메리트가 되잖아요.

“내 직업에선 핸디캡으로 작용해요. 전에 김훈 선배가 재미있는 농담을 했는데, ‘우리 업계가 이게(외모)가 좀 낮아’서 그렇대요. 영화인들이 저희한테 ‘너희는 공지영이 심은하급 되나보지?’ 하고 비웃어서 다들 자지러지게 웃은 적도 있어요.”

_소위 운동을 했다는데, 드러난 작가의 사생활이 너무 풍족했고, 지금도 소설 써서 충분히 보상을 받는 것 같아서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잘 나가는 작가 공지영에 대한 비판의 기저에는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요.

분명히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전 제가 얼마나 유복하게 살았는지 정말 몰랐어요. 다들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어요. 제가 재벌집 딸도 아니고,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지 않았을 뿐이지 저도 아버지 월급을 받아야 용돈을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아이였어요. 그런데 이 문단이라는 데를 나오니까 전부 가난한 사람들인 거예요.(웃음) 이 계가 진짜 나를 너무나 부자로 만들어준 거야. 내가 이 계가 아니라 화류계, 영화계를 들어갔으면 난 굉장히 평범한 집에서 자란 평범한 애였을 텐데, 전통적으로 가난한 것이 미덕이 중요한 계에 들어와서, 제가 아주 계를 잘못 들었죠. 엉뚱한 제가 갑자기 난데없는 상류층에, 난데없는 미모에 황당해요.

대학 때 우리집이 차압을 당해 먼 잠실로 이사 갔어요. 그때 시인 기형도 형이 몇몇 형들이랑 저희 집에 놀러왔는데, 이 형들이 와서는 나를 경원하고 멸시하는 표정인 거예요. 나는 그 형들이 아무 말도 안해서 얼마나 가난한지 정말 몰랐어요. 나중에 기형도 산문집 읽고 절대가난이라는 걸 알았는데 미안하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어요. 왜 나한테 슬프고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형, 우리집 너무 누추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배신감 느낀 거예요. ‘캐비어 좌파’라는 말이 있잖아요. 캐비어를 먹는 사람은 꼭 우파여야 하나요? 비록 캐비어를 먹지만, 좌파적 입장에서 제3세계 얘기하는 게 사실은 더 훌륭한 게 아닐까요.

_나는 몰랐고, 이 업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수긍하기 좀 그런데요.

“나 잘못하면 필화사건 나겠다. 그리고 저 좌파적으로 살았어요, 왜 이러세요.(웃음) 저 연탄 때는 10평짜리 전세 아파트 살다가 연탄가스 먹고 병원에도 가고, 원당읍에 15평 주공 아파트에도 살았고 계속 전셋집 옮겨 다녔어요. 혜화동 천에 십만원짜리도, 삼선교 2,500짜리 반지하도 살았어요. 아 진짜, 이런 구차한 변명까지 해야 되나. 지금 사는 집이 제 첫 집이에요.

제가 차를 바꾼다고 하니까 어느 선배가 벤츠를 사라고 하더군요. “아니, 어떻게 작가가 벤츠를 타” 그랬더니, 그 선배는 우리 문인들이 잘 되서 외제차 타면서 지탄받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대요. 그 말을 듣고 20년 동안 간직해왔던 부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버렸어요. ‘인세 많이 들어와서 좋아요’ 라고 말하고 다닌 지 몇 년 안됐어요. 옛날에는 ‘저는요, 꼭 팔려고 했던 건 아닌데요’ 그랬거든요.

나는 진짜 밥을 벌기 위해서 밤 새워가며 앉아서 글 썼어요. 이제껏 결혼을 3번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생활비를 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23세 이후부터 현재까지 내가 집안의 가장이었고, 사력을 다해 글 쓰는 게 내 밥벌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독자들이 좀 더 좋아할 수 있는 책을 써서 생활비를 댈까 이것이 오직 나의 관건이었죠. 돈은 버는 족족 어디로 갔지만.(웃음) 그래서 <우행시>로 평생 처음 돈을 저축했어요. 남편이 없기 때문에 이제 돈 저축이 되는 거죠.”

_소설에 늘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런 비판이나 죄의식을 풀기 위한 건가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아요. 22세에 첫 결혼을 했는데 그때부터 제 인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구요.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리 인내를 해도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너무 끔찍하고 슬프고 진짜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런 부분들이 나로 하여금 <우행시>에서 사형수를 만나러 가게 했어요.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왜 여기까지 왔나, 나는 왜 이런 낙인을 줄줄이 달고 있나, 난 왜 전과 기록처럼 이런 걸 줄줄이 달고 서 있어야 하나, 이런 게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사회적 사형선고 받은 느낌이었어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극한으로 내몰렸던 마음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정말 내 인생이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들을 했기 때문에 나는 사형수들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어요. 결국 이 모든 것이 내가 소설가로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좋은 환경에 놔두었다면 밤 새워 내가 굳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겠죠. 돈 있고 남편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면 내가 뭐 하러 글을 써요.”

_공지영에 대한 관심이 작가에 대한 관심엔 파란만장한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요.

“제가 두 번째 이혼을 했을 땐데 안티들이 나를 너무 상처 주더라구요. 제가 친구에게 “나 너무 불쌍하지 않냐. 난 심지어 이혼까지 이렇게 많이 해서 진짜 힘들다” 했더니 그 친구가 “너 이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움 받는 거야. 여자들이 너 같은 경우라고 다 이혼하는 게 아냐. 너는 능력 있으니까 이혼했어” 하더라구요. 난 항상 하늘이 몇 조각 나는 경험을 하는 건데,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나도 당신만큼 능력이 있으면 당장 이혼했어’라는 말. 솔직히 그때 화가 많이 나서 조금만 어렸으면, “저 있잖아요. 제가 이혼했을 때 천만원에 10만원 하는 지하방에 살았거든요. 난 그때 소설 수입도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랬을 텐데 지금은 죽음의 시간 같은 것들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해해요.”

_죽음의 시간이라뇨?

“마지막 이혼이 너무 힘들었어요. 제 소원이 비행기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트럭이 나를 덮쳤으면 좋겠다 그런 거였어요. 그땐 친한 친구에게도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서, 하느님한테 갔어요. 18년 만에요. 가서 “항복합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이야기했고, 그랬더니 정말 살려주시더라구요. 제가 그 힘을 가지고, 남들이 보기엔 당당하고 내가 보기엔 좀 담담하게 사람들 앞에 나섰죠.”

_또 결혼하실 겁니까?

“저는 결혼이란 제도를 상당히 좋아해요. 저희 식구들이 다 첫사랑이랑 결혼해서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처음 만나면 빨리 결혼해야 하는 건지 알았고, 그렇게 하면 결혼이란 게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죠.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결혼이란 제도의 미덕이 있어요. 약속을 관철하게 하는 약간의 강제적 힘 같은 것. 사람이란 너무 변덕스럽고 불안하니까요. 그건 아직도 믿어요. 하지만 앞으로 또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사랑은 하고 말 거야. 언젠가. 사람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또 사랑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만난 것은 저 사람이었지 남자 일반은 아니에요. 전 ‘남자는 다 그래’라는 말 참 싫어해요. 그건 여자는 다 그래란 말과 똑같다고 봐요.”

_앞으로 쓸 작품은요?

저희 큰 딸이 고3이고 밑으로 초등학생 아들 둘이 있는데, 우리 가족을 모델로 한 <즐거운 나의 집>을 쓸 거예요. 참 축복인 게 우리 애들이 무지 밝아요. 나의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학교 가면 애들이 밝나 안 밝나 그런 것부터 보거든요. 다들 에미 닮아서 대책 없이 밝아요. 언젠가 제가 딸한테 “엄마가 이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해” 얘기하니까 자기는 그거 잘 모르겠대요. 자기가 오직 항의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우리 아빠랑 왜 이혼했어”뿐이고, 나머지는 엄마의 사생활이니까 인정한대요. 대신 자기가 엄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엄마는 엄마 차의 시동을 한 때 껐지만 엄마의 열쇠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잖아. 내 친구 엄마들은 다시 못 찾게 강물 속에다 다 던져버렸어. 그래서 누가 밀어주기 전에는 다신 못 떠나. 그런데 엄마는 그것을 주머니 속에 감춰두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시동을 켜고 떠났잖아” 그러는 거예요. 저 이제는 안 버려요. 이제는 열쇠를 버릴 생각도 없고, 시동을 끌 생각도 없어요.”

_사람들이 많이 알아보죠?

"아니에요. 전혀 몰라봐요. '혹시 공지영씨와 많이 닮았다는 소리 안 들어요?' 이런 말도 들어봤어요. 그럼 '아니요' 그래요. 난 공지영이지 닮은 건 아니니까. 지면사진과 달리 실제로 생기발랄해서 더더욱 못 알아봐요. 그런데 TV는 잠깐만 나와도 알아보더라구요. 아주 소름끼쳤어요."

_운동 할 때 아버지와의 갈등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화해했죠. 난 우리집이 남녀차별 심한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삼계탕을 하면 오빠와 아버지만 다리를 주고, 언니랑 난 날개를 줘. 엄청 싸웠어요. 닭 한 마리만 더 샀어도 제가 페미니스트가 안 됐을 거예요. 저는 아버지가 굉장히 특별히 사랑하는 딸이었어요. 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저희 아버지는 경제 개발의 혜택을 제일 먼저 얻었어요. 초등학교 때 외국인회사 취직했는데 아버지에게 전용차로 도요타 크라운이라는 차가 나왔어요. 굉장히 큰 차예요. 아버지가 미국 유학 시절 운전을 하셨기 때문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차로 태워 줄 정도로 절 사랑하셨어요. 그 전날 술에 떡이 돼 들어오실 때에도 절 학교 데려다 주고 다시 집에 가서 씻고 출근하실 정도였어요.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시면서 혼자 못 다니게 하시고.

그 시간은 단순히 저를 날라다주는 시간이 아니라 아버지 차 안에서 함께 뉴스 들으며 이런 저런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이었어요. 역사적 주요사건 거의 다 아버지 차 안에서 들었죠. 기대를 많이 하셨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한국일보를 봐 왔어요. 소년 한국일보를 보고 한글을 깨치고. 중고등학교 때 장명수 칼럼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어느날 "나는 내 딸이 기자가 되는 건 싫어. 팔자 세. 그런데 장명수란 여자가 참 대단하다. 논조를 보면, 남자들보다 훨씬 뛰어난데 난 니가 이런 여자가 되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때 칼럼 열심히 읽으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했죠.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형사가 집으로 찾아오면서 아버지가 앞으로 9시까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데요. 난 영문도 모르고 그 이유를 물었는데, 형사 말이 나쁜 놈들이 널 꾀어서 널 나쁜 쪽으로 몰고 간다고요. 아버지가 평생 처음으로 저한테 강압을 하면서 강경하게 나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갈등했어요. 근데 그때 난 스물이 넘었는데 왜 상의도 없이 아버지 맘대로 결정하냐며 대들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못 믿어서 그런다 그러시길래 '내가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일, 예컨대 길거리에서 성폭력을 당한다거나 끌려가서 고문당하면 둘 다 상처니까 아버지가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면 되지 왜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도 왜 미리 걱정부터 하냐'고 대들다가 난생 처음으로 뺨을 한 대 맞았죠. 아직도 정치적인 의견을 많이 다르지만 사랑이란 부분을 많이 느끼고 있었죠."

_닭다리는 누구한테 줘요?

"전 딸이 너무 좋아요. 대를 잇는다는 말은 이해가 안 되는 게, 제가 공자 78대손이라 자신 있게 말하는데, 아이고 웬 대를 이어. 왕관하고 영토가 꽤 넉넉한가 보지? 무슨 대를 이으려면 왕관을 없어도 영토는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영토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대를 어떻게 잇는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영화는 실망스럽지 않았어요? 캐스팅도 젊은 배우고.

"전 만족해요. 선남선녀가 안 나오면 누가 보겠어요. 이쁜 여자가 나오니까 시간이 잘 가잖아."

영화 흥행이 책 매출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데 다소 맥 빠지는 쓸쓸함도 느낄 것 같아요. "영상의 막강한 파워를, 영상이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인정해요. 문학은 갔구나, 아름다운 문학이여, 이런 식으로 생각지는 않아요. 그게 영화화 됐다는 것은 이미 제 작품을 본 독자들이 많다는 의미도 되니까. 영화 때문에 팔리긴 했어도 영화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_봉순이 언니 만나셨어요?

"그게 다 사실이 아니고 소설이에요. 시집가서 남편이 죽는 것까지만 실화예요. 나중에 언니가 찾아왔어요. 그래서 내가 저 언니가 책 읽었으면 어떡하지 했죠(웃음). 다행히 안 읽은 눈친데, 언니가 워낙 순하고 그래서 읽었더라도 봐줬을 거예요. 어린 시절 세팅이나 언니 존재는 실화예요. 30년 만에 만났는데, 잘 살더라구요. 멀리 멀리 시집갔는데 분당 우리 집옆에 죽전에 살더라구요. 옛날에 거기 땅이 있어서 보상 받아 아파트 살고 있었고 아이들도 잘 키워서 아들 하나는 분당 삼성플라자 직원이더라구요.

 

 

 

 

-산도르 마라이 좋아한다면서요.

"내가 왜 그렇게 좋아하나 봤더니, 그 사람이 운명과 싸우더라구요. 현대 유럽작가와 다르게 운명이나 비극을 담고 있다는 평을 봤어요. 아마 그런 것이 나를 매료시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 자신이 마흔이 넘어갈 무렵에 운명이란 게 있구나, 너무 강력해서 내가 피할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나의 노력, 의지, 선의와 상관없는 그런 일들이 내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꼴을 보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운명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가진 많은 것들, 말하자면 키가 큰 것, 좋은 부모님 만난 거. 머리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거, 그래서 공부도 잘 했던 거, 가난하지 않게 살았던 거. 내 의지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우스운 말이지만 얼굴 생긴 것도 내 의지랑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나를 규정해 왔고,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거예요.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느끼면서 신에게 돌아간 것 같아요. 정말 항복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할 기회가 많았어요. 작가로서는 그게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한 여자, 한 인간으로서 굉장히 많은 비극을 갖고 있지만, 작가가 되는 데 고통의 문제, 폭력, 운명의 문제를 나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줬던 거 같아요."

-산도르 마라이 <하늘과 땅> 같은 글을 읽다보면 단어 하나하나 고르는 데 고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자신의 운명과 문학을 통해 정면 승부하는 치열함을 느낄 수 있는데. 문학계 안팎에 들리는 공지영이라는 스타에 대한 얘기들에 대해서 까놓고 얘기하자면, 공지영의 소설들은 서사가 강해서 문체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멋진 표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번역해도 잃을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소설이라는 걸 대하는 입장이 동시대의 다른 문인들과 달라요. 그래서 이런 삐그덕거리는 일들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문체가 아름답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뭐예요, 도대체? 아름다운 단어를 써야 하는 것인지. 괴테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라고 말했는데, 전 그게 굉장히 아름다운 문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는 화려한 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을 짜낸 한 방울의 결정, 그게 아름다운 문체라고 생각하는데, 산도르 마라이가 그래요. 저는 삶에 대한 통찰, 인간성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을 발견해내는 것, 다른 사람들은 흘려보내고 못 보는 그것을 그 틈을 비집고 빛을 쫙 쏘여줬을 때, 초음파처럼 내장의 종양을 딱 보고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해내는 것이 아름다운 문체라고 생각해요.

저는 처음부터 미사여구 쓰지 않았아요. 단문으로 쓰고, 이해하기 쉽게 쓰고, 짧은 단어 속에 화려한 문체보다는 제가 괴테를 좋아했다시피 그런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어요. 원래 시인으로 데뷔했는데, 소설을 택한 이유는 시는 너무 힘든데 제가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지어낼 자신이 있었거든요.

춘향이나 샤일록은 원전 읽은 사람 없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캐릭터들을 알아요. 소설은 캐릭터와 상황의 문제예요. 중요한 건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 캐릭터를 어떤 상황에 배치하는가 하는 것이죠. 제가 추구한 것은 삶의 본질, 인간성, 시대의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 큰 목적이에요. 그래서 문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 들었을 때 굉장히 당황했었어요. 서사가 강한 게 뭘 그렇게 잘못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나는 소설이 그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항상 보면 극단적인 캐릭터다, 문체가 너무나 거칠다 이런 평들을 하니까 내가 추구하는 것들을 하나도 얘기 안 하고 어 내가 왜 이런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춘향전>이나 셰익스피어의 소설미학과 다른 시대인데. 공지영의 소설은 낡았다. 오래됐다. 이런 비판 가능한 거 아닌가요.

"굉장히 중요한 얘긴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비판 좋아해요.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정공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서사의 회복과 캐릭터의 독특성으로요. 제가 현대 문학 중 가장 꼽는 것은 해리 포터예요. 그 소설은 책을 읽지 않는 애들을 책을 잡게 만들었죠. 그게 19, 20세기 정통 영국소설의 문법이거든요. 그래서 그건 저의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건 잘 못하니까(웃음). 그건 제가 좀 자신이 있거든요.

서운할 때 드는 생각은 저라는 사람이 2000년대 대한민국 3만 명 중 하나인 소설가인데 왜 나에게 이 모든 것을 원하나, 나는 이런 소설을 쓰는 개성이 있는데, 이런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누구는 현대소설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각자 장단점 있는데. 그것은 비추지 않고, 평자들이 먼저 현대문학은 이런 것이라는 규정을 두고 너는 맞지 않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너무 편협한 사고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가 최민식 송강호 같은 배우들한테 너희는 왜 그렇게 얼굴이 크냐, 요즘 영화배우답지 않게, 안 그러잖아요. 이나영 강동원 같은 경우는 연기는 좀 못하지만 클로즈업 하면 우리가 즐겁고. 그런 게 다채로운 영화를 만들어가듯이 그렇게 해서 한국문학을 전반적으로 다양성 속에서 크게 아우를 필요가 있어요.

-다양하게 아우를 수 있는 시장상황이면 좋지만 혼자 책은 다 팔고 계시잖아요.

"다양하게 아우르지 않으니까 독자들이 자꾸 떨어져나가는지도 모르죠. 예를 들면 넓은 품을 보여주자, 이거예요. 한국영화 얼마나 다양해요. 그러고 나서 우리가 아, 이것도 볼 만하네, 전쟁영화도 있고 뭐 이렇게 김기덕씨 영화도 있는 거고. 김기덕씨 영화 보고 넌 왜 이렇게 서사가 없냐고 욕할 수도 없는 거고, 강우석 투캅스 보고 넌 왜 이렇게 영상의 미학이 없냐고 할 수도 없고. 포용의 문화가 좀 아쉬워요. 그러니까 자꾸 색다른 개성을 가진 외국 작가의 소설을 읽고.. 전 외국소설 읽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평론가들이 그걸 왜 포용 못하나 안타까워요."

-평론가들과는 각자의 길을 갈 건가요?

"그럼 내가 어떡해요. 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내가 할 수도 없는 거고. 상도 안 주는데 내가 왜 해."(웃음)

-상하고 인연은 진짜 없죠?

"인연 많아요. 세 번이나 받았으면 많이 받은 거 아니에요. 이정도면 됐죠. 뭐.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이런 말해서 좀 그렇지만, 솔직히 이상, 동인 별로 존경하지도 않는데. 내가 별로 좋아하는 작가도 아니고."

-한국일보문학상이면"

"그건 괜찮아요. 근데 안주잖아."(웃음) 근데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해요. 이상, 동인을 존경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 상을 받아야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가. 저는 만해문학상을 받으면 좋겠는데… 만해는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니까. 그 이름으로 받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근데 안 주는데 뭐 어떡해.

그래서 이번에 엉뚱한 상을 또 받았잖아요. 엠네스티서 주는. 상금도 한 푼도 없더라구. 근데 너무 좋았어요. 엠네스티란 단체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해요. 그래서 상 타니까 너무 기뻤어요. 그것이 또 사형제에 대한 문제여서 가문의 영광이다 그런 생각하고 수상소감도 그렇게 했어요. 한국일보를 꼭 존경해서는 아니지만(웃음) 차라리 가치 중립적인 것은 괜찮은데….

-공지영 신드롬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 근데 그거 94년도에도 한 번 했었어요. 공지영 신드롬, 최영미 신드롬이 있었는데. 전 데뷔 때부터 문학 지상론자는 아니거든요. 이 문장 하나 만들기 위해 내 목숨 다 바치겠다,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전. 그래서 사실 보상이란 것이 꼭 평론가들만 주는 건 아니고, 제가 독자들한테 물질적이거나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때문에 독자들의 리뷰나 그런 것으로부터도 받아서 그것이 어떤 일이든 그것이 상관이 없어요. 나는 왜 문학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거야. 뭐 그런 생각도 별로 안 하고. 이 시대의 평론가들, 상을 주는 심사위원들이 모든 문학을 끝까지 쥐고 있고, 앞으로도 쥘 수 있을지…, 아, 이렇게 자꾸 말하지 말라 그랬는데, 사람들이.(일동 웃음) 이럼 점점 멀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데."

-심중의 얘기들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신이 준 상처, 받은 상처 그런 기억들은?

"내 말투, 농담을 함부로 하지 말자 뭐 그런 거 있어요. 저 사람들에게 정말 악의 없어요. 근데 항상 너무나 미움을 많이 받는데, 내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넌 항상 본질을 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서 그걸 말하는 것 자체가 상처를 주는 것 같다고.

제가 상처 받는 건 언제나 이런 거예요. 봉순이 언니에서도 많이 썼는데. 이런 말 해도 되나. 난 꼬인 데 가 없고 사람을 오래 미워하는 법이 없어요. 시인 김정환형한테 "형. 난 왜 이렇게 사람들이 나한테 잘못한 거 금세 잊어버리지" 푸념하니까 "지영아, 넌 너무 착해" 이럴 줄 알았더니 "넌 너무 머리가 좋아서 그래"라더군요. 똑똑한 사람들은 남 미워하는데 오래 끙끙거리지 않고 비생산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대요.

난 그냥 말에 사람들이 상처받고 그러는 것 같아요. 난 금세 잊는데, 나한테 상처받았다는 사람은 너무나 많이 나타나는 거예요. 넌 날 상처 입혔어, 그러면서 가버려요. 아니라고 해도 그리곤 다시는 나를 안 보는 거예요. 그런 것에 제가 상처받았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 걸로 생각하는데.

"네. 별로 상처 안 받아요. 하도 받다보면 나도 살아야 되니까 처리하는 법을 배우잖아요. 30분 정도 걸려요. 미움을 하도 많이 받아서. 고등학교 때 왕따였어요. 어느날 보니 나를 따 시키더라구요. '어머. 사실 나도 너희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어' 생각하고 혼자 그렇게 살았어요. 전 진짜 조숙해서, 지금은 그 조숙만 믿다가 미숙의 경지에 다다랐지만, 친구들이 말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요. 드라마 얘기하고, 전 그런 얘기 하면 옆에서 고개 돌리고 다른 책을 읽고 그랬는데 친구들은 그게 오만방자해 보였겠죠.

-소설 낼 때마다 소외 당하지도 않았지만, 이처럼 단기간에 뜨겁진 않았잖아요. 뭐가 달라졌나요?

"제 소설보다 제가 취재해서 쓴 현실 자체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거 같아요. 그게 좋았어요. 다른 소설들은 제 경험 윤색하거나 시대의 얘기였는데 이건 전혀 동떨어진 세계를 발견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해서 그걸 옮겨다 이쪽에 준 거죠. 그게 너무 가슴 아파서 취재하는 동안 많이 울고 취재 시작부터 소설 쓴 후까지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이 책보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더 뒤인데, 그건 제가 전적으로 지어낸 소설이라 그게 각광받았다면 내가 잘 나서 그랬구나 그런 생각했을 텐데 제가 취재治퓽?각괏예騁耐?때문에 각별한 느낌이 있었어요. 나는 어떤 의미에서 말 그대로 인터뷰어, 옮겨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현실이 각광받는 게 더 중요했고. 다른 게 각광받았다면 느낌이 달랐을 듯해요."

-이젠 스타라 무슨 책을 내든 잘 팔릴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에요. 조용필도 안 팔리는 시대인데. 우리사회가 생각보다 그렇지 않아요. 지금 네티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제가 제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라 그렇지만 저는 독자들이 무지 냉정하고 제가 스타라면 그것에 대한 안티의 눈도 굉장히 많아서, 제가 정말 정신 차려서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소설을 내지 않으면 바로 끝장날 거라고 생각해요. 94년에 베스트셀러 여러 개 낼 때부터 생각한 건데 독자라는 사람들은 굉장히 변덕스럽고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냉정하고 정확해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바라고 있거든요. 스타작가에 대한 평가는 더 혹독하고.

지금도 생각하는 건. 94년부터 제가 아까 생활비 걱정 안 해서 감사하다는 얘기는, 내가 우연히 독자 기호에 맞아떨어져서 이렇게 됐지만, 어떤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대중의 기호를 맞춘다는 것은 할리우드 사람들도 잘 몰라요 그거. 그렇기 때문에 반 장사(50%)예요. 내가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망해요. 그래서 내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내 자신에게 이 걸 쓰는 동안 이것만 생각하고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됐다면 평가는 온니 갓 노우즈거든요. 거의 신경 안 써요. 이게 제 배짱일 수 있고."

-너무 일찍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서 다음 작품에 부담은 없어요?

"무소의 뿔 다음에 고등어 쓰는 데 출판사에서 이거 최소 50만부 찍어야 하는데 이러는 거예요. 난 고등어는 절대 안 팔린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성공하니까 이젠 불안하더라구요. 그 때 내가 대중들을 따라가면 망한다 그런 생각했어요."

-일본 작가들 작품은 어때요?

"전 별로 안 좋더라구요. 키친 하나 빼고 별로예요. 차라리 우리 작가들 소설이 나은 것 같아요"

-어떤 독자들이 기억에 남아요?

"제가 제일 행복해 하는 독자들이 있는데 그게 30대 중반의 독자들이에요. 선배들의 강요로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대학 초년에 읽고, 그 후 <무소 뿔> 읽고 그랬던. 저와 함께 성장해온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이 출판사의 편집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내년 데뷔 20년인데 그럴 때 가장 행복해요.

-왜 소설을 써요?

"얼마 전에 문학 캠프를 갔는데, 김훈 선생과 함께 독자와의 대화를 했어요. 왜 소설을 쓰시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선배가 "난 밥을 벌기 위해 쓴다. 이게 밥이 안 되는 순간 미련 없이 떠날 거다" 그러더라구요. 깜짝 놀란 게 문단에 나와서 밥 때문에 소설을 쓴다고 했던 게 저였는데 김훈 선생님도 그렇더라구요. "저도 그렇다. 난 가장이기 때문에 노동의 대가가 충분치 않을 경우 하시라도 국수집을 할 태도가 돼 있다" 그랬죠.

근데 문단에서 우리 둘만 그런 것 같아. 전 문학 지상주의자도 아니고. 문학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의 베이스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밥도 안 되고 애들도 굶고 있는데 내가 거기 가 있을 필요도 없고, 프로작가로서 이게 내 노동으로서 우리 아이들과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가 굉장히 커요. 반농담으로 국수집 차릴 거다, 국수 아주 맛있는 비법이 하나 있어요, 그랬어요. 실제 가격을 얼마로 매길까 고민도 많이 했다니까요."

-어떤 작가 좋아해요.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새> 제일 좋아해요. 황 선생님은 영화적 작법을 써요. 감정을 묘사하는 대신 정황으로 묘사를 해요. 외로움을 묘사하는 대신 우두커니 서 있는 빗자루, 우산을 쓰죠. 그게 단편에서 두드러지는데 객관적이고 냉정한 묘사를 해요. 저는 '그때 혼자 있는 게 어땠다'는 식으로 써버리거든요. 그분의 문학과 사회에 대한 자세들이 좋아요. 상복도 없어요. 그 다음은 박경리 선생님. 그 분도 상을 하나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좋아한 것은 아닌데, 하도 상 때문에 말이 많아서 찾아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박경리 선생님은 김성종 문학상인가 하나 받았어요. 젊은 작가는 박민규. 저는 <카스텔라> 좋게 봤어요. 저는 젊은 작가들이 좀 더 도발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미 늙어서 아이들을 부러워 하는 형편이니까 형식 내용 모두 도발적으로 가면 제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그의 소설은 상당히 슬퍼요. 그래서 연민이 크다는 점이 좋았어요. 다른 작가들은 읽고 나면 이들이 나보다 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장편은 주목을 받았지만 단편은 기억되는 게 없는 듯해요.

"세계적으로 유명 소설가들이 단편으로 주목받은 경우는 거의 없어요. 단편으로 주목받은 건 일본 정도. 주로 장편을 좋아한 후 단편을 좋아하는 식이죠. 우리 문단의 폐해일 수 있는데 이것도 시각의 차이인 것 같은데, 서사고 로망이고 하는 것은 장편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어요. 누가 단편으로 주목 받나? 에쿠니 가오리, 코엘료 다 장편이에요. 전 그 짧은 순간 그 사람을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김유정의 경우는 단편을 잘 쓰는데, 당시엔 기자를 말한다면 떠오르는게 있어요. 그런데 현대는 너무 달라요. 조선일보 기자, 한국일보 기자, 한겨레 기자 다 다른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을 묘사하면 길어지고. 상황을 묘사하면…, 쉽지 않아요.

잘 쓴 단편의 경우는 일부를 떼고 보면 한 편의 시 같아요. <몰개월의 새>의 경우도 그랬고. 그 작품은 이성복의 시 같아요. 그런 부분은 장편에서는 그렇게 쓸 수는 없어요. 장편과 단편 소설은 서로 다른 장르라고 생각해요. 김유정 이후에도 김승옥 <무진기행> 하나 빼면 와 닿은 것은 별로 없더라. 단편으로 노벨상 받은 사람은 없어요."

-20대 여성이 뽑은 닮고 싶은 여성 4위에 올랐어요.

-하하하. 1위가 김혜수, 2위가 고현정, 3위가 이나영, 5위가 손예진이에요. 내가 그거 다 외워. 나도 황당했어, 그거. 황당했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그게 내가 올 초에 3번 이혼한 사실을 밝힐 때까지 나의 그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건 이제 거의 말하자면 이제 남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그런 결심이었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아, 이 죄인을"이었고, 20대 여성이 난 나대로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닮고 싶다니.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공생활과 사생활을 분리시키나? 아무튼 세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성잡지 <에스콰이어>가 뽑은 남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 1위에도 올랐어요.

"와~. 그러니까 자꾸 광고가 들어와서 날 힘들게 하는구나."

-무슨 광고요?

"맨 처음에엔커피 광고도 들어오고. 소주, 아파트 광고도 들어왓는데 다 거절했어요.

-거절한 이유는? 가격이 안 맞아서?

"하하. '다 묶어서 한 10억 부르고 한 십년 쉬어?' 그런 생각도 해봤는데요. 그 전에도 광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한 번은 돈이 너무 없는데 자동차 지면 광고가 6개월 단발 5천만원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게 너무 유혹적이었어요. 책 못 쓰고 돈 못 벌고 있을 때. 그런데 그냥 너무 이상했어요. 내가 자본주의도 비판해야 하는데 내가 거기 가서 이 차 사세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해요. 내가 언젠가 그랑 부르주아를 소설에 등장시켜서 깔 수도 있는데, 그런 작가인데, 거기 가서 이 차 너무 좋거든요, 이 소주 너무 좋잖아요, 이러면 내가 나중에 그걸 어떻게 비판을 해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유를 위해 돈을 포기한 거죠. 그 분들이 나쁜 자본가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굴 팔리는 것은 내 생명이 끝나는 거라 생각했어요."

-소주를 비판할 일은 없을 거 같은데.

"얼굴 팔리는 건 제 생명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팔리기 시작하면 익명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이고, 그건 내가 보통인들이 느끼는 체험을 못하고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잖아요. 저의 작가로서의 삶도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예요. 시사 프로그램, 역사 프로그램, 여행 프로그램 같은 TV 진행도 들어오는데 평면으로 박힌 것과 TV에 나온 것은 정말 달라요. '느낌표'에 나온 후에 전철 탔을 때 알아보는데 엄청 놀랐어요. 한 100억 정도 주면 한 번 생각해볼까, 모든 것을 작파하고.. 아직은 내 자유의 값은 높으니까." (웃음)

-소설이 밥 벌이이기 때문에 쓴다고 했는데, 다른 밥 벌이를 사용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죠. 그 때도 난 얼굴 팔리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아요. 소설이, 독자들이 나를 이 영역에서 내쫓는다면 모를까, 내가 소설 쓰다 폐병 걸리고 우리 애는 아파서 울고 그러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 쪽으로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직은 나를 그래도 밥은 먹게 하니까, 지금은 잘 먹고 있지만, 예전에도 밥은 먹게 했으니까. 저는 할 줄 아는 게 소설 쓰는 것하고 국수밖에 없어요."

-되게 예쁘시잖아요. 아시죠?

"아니요. 몰라요."(웃음)

-에이. 아시면서

-(웃음) 아니, 진짜 몰라요.

-덜 이뻤으면 따를 당하겠어요? 작가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죠?

"너무 불리해요. 저 정말 제가 못 생겼으면 책이 배는 팔렸을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이구동성으로) 그 반대 아니에요?

"아뇨, 아뇨. 강동원과 이나영의 연기력이 폄하되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요. 장동건씨가 전에 "정말 잘 생긴 게 이렇게 핸디캡일지 몰랐다"고 했는데, 난 잘 생겼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이렇게 노력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내 얼굴만 봐요. 그래서 이번에 이건 좀 얘기할래요. 조선일보에 모 선배(박완서)가 공지영의 신드롬의 원인 중 하나로 미모 얘기했을 때 굉장히 불쾌했어요."

-그런 말도 종종 듣지 않았어요?

"예. 들었어요. 지금은 너무 영광이죠, 사실."(웃음)

-지금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얼굴이 무기잖아요.

"저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내 직업에서는 핸디캡으로 작용해요. 물론 하나님이 '너 옥동자 얼굴 할래, 니 얼굴 할래' 하면 "오우, 하나님 그거 안 할래요" 하겠지만 작가로서는 좀.. 좀 많이 그게... 김훈 선생이 너무 중요한 지적을 한 적 있는데, 누가 "공지영씨 미모 때문에 소설이 많이 팔린다고 한 적 없냐"고 물었어요. 그때 김훈 선생이 "예. 공지영씨 이쁘죠"하고 한숨을 푹 쉬더니 "우리 업계가 굉장히 이게(얼굴 외모) 좀 낮아요"라고 농담을 했어요. 너무 재치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해요. 미모의 작가들 많았죠. 최정희, 노천명, 김채원 깜짝 놀랄만한 미모라고 하더라구요. 강석경 선생님도."

-소위 운동을 했다는데, 드러난 공 작가의 사생활, 풍족했고 아쉬운 것 없었던 것 같고. 지금도 소설 써서 충분히 보상을 받는 것 같고. 작가가 소설에서 얘기하는 바와 삶이 떨어져있지 않나 싶은 배신감이 드는데요.

"'캐비어 좌파'라고 캐비어를 먹는 좌파라는 속어가 프랑스에 있어요. 그럼 캐비어를 먹는 사람은 꼭 우파여야 하냐. 태생적 한계죠. 아까 제가 운명이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태어나고 보니까 그렇게 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비록 캐비어를 먹으면서도 좌파적 입장에서 제3세계 얘기하는 것이 사실은 더 훌륭한 게 아닐까요. 저 자신도 자기는 압구정동 살면서 좌파 얘기하고 하는 게 좀 그렇더라구요. 우리 시대 유명한 평론가 있잖아요. 하지만 그건 사회적 여유의 문제인 듯해요. 자기가 힘들 땐 그런 사람들 미워할 수 있는데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저 사람이 태생이 저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좀 참작해주는 게 더 옳은 생각 아닌가 싶어져요."

-소설에서 환경 중요하다고 얘기하면서 삶에선 음식물쓰레기 아무데나 버리고 하는 사람들 싫잖아요. 행동과 삶이 동떨어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비슷한 게 잘 나가는 작가 공지영에 대한 비판의 기저에는 있지 않을까요.

"분명히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걸로 비난을 받아야 하나 했던 거구요. 전 제가 얼마나 유복하게 살았는지 정말 몰랐어요. 평균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재벌집 딸도 아니고 월급을 많이 받는 월급쟁이었는데. 돈 때문에 배고프거나 슬픈 일이 없었다는 것이지 재벌도 아니고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지 않았을 뿐이지 저도 아버지 월급을 받아야 용돈을 받고 평범하게 자랐어요.

그런데 이 문단이라는 데 나오니까 전부 가난한 사람들인 거예요.(웃음) 이 계가 진짜 나를 너무나 부자로 만들어준 거야. 내가 이 계가 아니라 화류계, 영화계를 들어갔으면 난 굉장히 평범한 집에서 자란 평범한 애였을 텐데. 문학 미술 연극 등 전통적으로 가난한 것이 미덕인 계에 들어와서, 제가 아주 계를 잘못 들어서, 엉뚱한 제가 갑자기 난데없는 상류층에, 난데없는 미모에 이게 황당해.

농담인데 평양 가려고 교육 받는데, 영화계 C모씨, 시나리오 작가 S모씨가 함께 교육을 받았어요. 나랑 같이 얘기하고 있는 남자작가들을 보고 씩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니 여기는 공지영이 심은하급인가보지?" 하길래 한 작가가 "너희는 영화계에서 풍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는 지영이라도 족하다" 그랬어요.(웃음) 그 영화계 인사가 제 친구였는데, 어떻게 쟤를 보고 저러냐, 진짜 불쌍한 계다 그래서 막 웃었던 기억이 나요.

-나는 몰랐고, 이 업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독자들이 수긍하기엔 좀 미흡한 거 아닌가요.

"나 잘못하면 필화사건 나겠다."(웃음)

-갸륵할 수는 있는데, 생활 우파, 사상 좌파의 불균형이 아마 분노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좌파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좌파적 생활에 가까우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나 뭐 그런 거.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 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전 그말이 옳다고 봐요. 정치가와 성직자라면. 그리고 저 좌파적으로 살았어요, 왜 이러세요.(웃음) 전 연탄 때다가 10평 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연탄가스 먹고 병원에도 가고.

94년에 갑자기 책이 너무 잘 팔려서 그렇지. 근데 저는 지금 집이 처음 집이에요. 97년 분양가 낮을 때 처음 내집 마련 했어요. 그 전까지 전부 전세 살았고. 아 진짜, 이런 구차한 변명까지 해야 되나. 저도 94년 갑자기 책이 잘 팔려서 그런 건데. 소파도 <봉순이 언니>가 잘 팔리길래 처음으로 2002년에 처음 사고 그랬어요. 저 지금이 너무 좋아요. 이사 안 가도 되고. 이제는 제가 어떤 좌우파를 떠나서 합리적인 발언하고 싶다는 게 제가 이 나이에 계속 전세 살면 좀 그렇잖아요, 애들 데리고.

그 전에 제가 부모 밑에서 살 때는 좋은 집에서 잘 살았어요. 바로 독립해서 그 다음에는 전 10평, 원당읍에 15평 주공 아파트 살고 그리고 나서 계속 전셋집 옮겨 다녔죠. 혜화동 천에 십만원짜리도, 삼선교 2500짜리 반지하도, 수유리 3천짜리 2층집도 살았어요. <고등어>가 잘 팔려서 처음으로 수유리 극동아파트 고층에 전세를 살았어요. 그 당시 내가 돈을 못 벌어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솔직히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리고 다 잘 살자고 운동하는 거였는데, 왜 다 못 살자고…, 그걸 위해 좌파가 있는 건데.

기회의 평등을 평등이라 배웠는데 지금은 결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제가 충격 받았던 게 얼마전 차를 바꿨어요. 10년 된 차인데 에어컨이 말썽을 부려서 어느 선배에게 "요새 무슨 차가 좋아?" 물었더니 그 선배가 '야, 벤츠는 어때?'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니 어떻게 작가가 벤츠를 타" 그랬더니, 그 선배는 "나는 우리 문인들이 잘 되서 외제차 타면서 지탄받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 하더라구요. 전 그 말을 듣고, 제가 20년 동안 간직해왔던 부에 대한 죄의식을 털었어요. 내가 정당하게 내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었다면, 사실 20년 동안 부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지겹더라고요. "인세 많이 들어와서 좋아요"라고 말하고 다닌 지 사실 몇 년 안됐어요. 옛날에는 "저는요, 꼭 팔려고 했던 건 아닌데요…" 그랬는데.(웃음)

-죄책감은 좀 남아있는 거죠?

-(단호하게) 없어요.(웃음) 진짜 죄책감 많았어요. 또 그걸로 비난도 엄청 받았고.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내 책이 많이 팔리는데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되나, 다들 팔려고 책 내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다른 계에 있었으면 평범한 중류층 가정에서 자란 건데 왜 이 계에 와갖고.(웃음) 제가 진짜 몰랐던 게 그것 때문에 충격도 받고 죄책감도 더했던 건데, 이건 고인이 됐으니까 소송은 안하겠지, 기형도 형 같은 경우, 학교 때 만났는데, 제가 대 2학년 때 차압을 당해 먼 잠실로 이사 갔어요. 선배들이 집들이하라고 해서 한 번 불렀는데 이 형들이 나를 경원하고 멸시하는 표정인 거예요. 나 그 형들이 아무 말도 안해서 얼마나 가난한지 정말 몰랐어요. 나중에 기형도 산문집 읽었을 때 너무 배신감 느낀 거예요. 왜 이렇게 슬프고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형, 우리집 너무 누추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텐데. 죽은 다음에 책이 나왔으니까. 그냥 나를 경원하는 표정으로 니가 뭘 아니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지 한 번도 자기네들의 얘기를 해 준 적도 없으면서. 그래서 나도 알 거 다 알고 고생 다 해봤는데 그랬던 거죠. 어느날 절대가난이 있었구나 그걸 맞닥뜨리면서 미안하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어요. 나한테 얘기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고 자기들 판단대로 했던 거잖아요. 더군다나 내가 축적한 것도 아니고 그 집의 딸이어서, 어디 갈 데도 없고 해서 그 집에 살았던 것뿐인데 왜 이런 말을 하나.

독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운명이란 말 많이 꺼냈는데. 제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났고, 자수성가한 부모 덕에 아현동 빈민가에서 여의도로 가서 살았고, 머리가 나쁘지 않게 살았고, 공부 잘했고, 모두 제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부분인데 비난해요. 근데 나는 왜 비난을 당해야 하나. 더 나가면 글 재주라는 것도 이제는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민한 감수성 같은 것도. 그 대신 난 내 의지를 칭찬해 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요. 나는 진짜 밥을 벌기 위해서 밤 새워가며 앉아서 글 썼어요.

왜냐면 이건 처음 밝히는 건데 제가 이태껏 결혼을 3번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생활비를 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23세 이후부터 현재까지 내가 모든 집안의 가장이었어요. 글 쓰는게 나의 밥벌이었고, 난 생명을 다해서 사력을 다해서 어떡하면 내가 독자들이 좀 더 좋아할 수 있는 책을 써서 내가 좀 팔아서 생활비를 댈까 이것이 오직 나의 관건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돈은 버는 족족 어디로 가고(웃음), 그래서 <우행시>로 처음 돈 저축했어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괄호 열고 남편이 없기 때문에 이제 돈 저축이 되는 거죠."

-아까 생활비 얘기가 그 얘기군요.

"평생 처음 저축해봤어요. 이번에도 웃긴 에피소드가 생활비 들어오니까 너무 좋은데 1년 보통예금에 이자가 만원쯤 되더라구요."

-연애 안하세요?

"소개 좀 시켜줘 봐요. 지금 사실 너무 편안해요. 누구하고도(고개 절레절레). 정말 해외여행을 가니 누가 뭐래, 술을 먹는다고 누가 뭐래 난 너무 좋아."

-소설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런 비판이나 죄의식을 받아온 것을 풀기 위한 것인가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아요. 제 중 1학년때 웃긴 얘기가 있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이 많았어요. 제가 서울여중이라는 서강대 옆 중학교를 다녔는데 공덕동에서 48번을 타고 다녔어요. 그때 우리 엄마가 연보라색 벙어리 장갑을 짜 줬는데, 어느날 한 아저씨가 길을 물어보는데 손을 보니까 손이 터져서 막 피가 나는 거예? 그래서 제가 버스 타기 전에 손이 아플 것 같다며 그걸 억지로 드리고 창피해서 막 뛰어서 버스를 탄 기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돈을 주든지 왜 그 이쁜, 할아버지가 낄 수도 없는 것을 드렸을까. 이것이 어떤 상징일 수 있겠다 싶어요.

사형수 문제도 그런 연민이 기본적으로 깔리고요. 22살에 첫 결혼을 했는데 그 때부터 제 인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구요.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리 인내를 해도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너무 끔찍하고 슬프고 진짜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런 부분들이 나로 하여금 <우행시>의 사형수 만나러 가게 했어요.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고, 나는 왜 여기까지 왔나, 나는 왜 이런 낙인을 줄줄이 달고 있나. 도대체 난 뭔가. 난 한번도 이런 걸 원한 적도 없고, 난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난 왜 여기까지 왔을까. 난 왜 전과 기록처럼 이런 걸 줄줄이 달고 서 있어야 하나, 이런 게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 사회적 사형선고 받은 느낌이었죠. 그래서 사형수에게 갔고 가서 그들의 삶이 독자들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게 나하고 너무 닮아있었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감정이입이 무지무지 잘됐던 듯해요. 너희들도 이런 걸 원치 않았겠지, 어느날 보니까 자기가 이런 처지가 돼 있었겠구나 싶었어요. 각도는 다르지만 감정이입하긴 좋았죠.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내가 소설가로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나를 좋은 환경에 놔두었다면 밤 새워 내가 굳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겠죠. 돈 있고 남편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면 내가 뭐 하러 글을 써요. 그땐 아, 아름다운 백합화, 막 문체 신경 쓰고, 솔직히 그랬을지도 몰라요. 근데 너무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극한으로 내몰렸던 마음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이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들을 했기 때문에 나는 사형수들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어요. 그건 독자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소설가로서의 나의 자부심이에요. 나는 그곳에 갔었고, 내가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 소설가로서 자부심이 생겼어요.

-공지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관심에는 파란만장한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요.

"제가 두 번째 이혼하고 있었을 때 너무나도 안티들이 나를 상처 주더라구요. 친구에게 '나 너무 불쌍하지 않냐. 난 심지어 이혼까지 이렇게 많이 해서 진짜 힘들다' 했더니 '너 이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움 받는 거야' 하는 거예요.

아니 요즘 이혼이 그렇게 큰 죄도 아니고 '나도 이거 어쩔 수 없었는데, 너도 어떤 상황인지 알잖아' 그랬더니 '나도 네가 미워. 넌 이혼도 했잖아" 그래요. 아니 난 항상 하늘이 몇 조각이 나는 경험을 하는 건데, '야 너 여자들이 너 같은 경우라고 다 이혼하는 게 아냐. 너는 능력 있으니까 이혼했어' 그러더라구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나도 당신만큼 능력이 있으면 당장 이혼했어"라는 말도 들었어요. 솔직히 그때 화가 많이 나서 조금만 어렸으면, "저 있잖아요. 제가 이혼했을 때 천만원에 10만원 하는 지하방에 살았거든요. 난 그때 소설 수입도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랬을 텐데 지금은 죽음의 시간 같은 것들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생각해요. 각자의 길이 있고 자기 몫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짐이 가벼워 보이는 것이고. 내가 보기에는 그 여자들 팔자가 더 좋아보이기도 하고, 가끔 나도 그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내 길이니까 내 운명이고 내 짐이니까 걸어간다 생각하면 너무 평안하고 감사해요.

이 얘긴 꼭 써주세요. 요즘은 너무 행복하냐고 물어보는데 정말 행복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 이름을 하나씩 불러요. 우리 애들 이름부터요. 집이 너무 따뜻해서 감사해요. 건강하고 밤에 아이들이 잘 자는 것 감사해요.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해요. 그 세 가지 기도를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그것을 하고 나면 하루가 기쁘고 즐거워요.

94년에 이보다 더 많은 돈을 벼락같이 벌었어요. 하나도 안 행복했어요. 정말 지옥 같았어요. 지금은 빚도 좀 갚고, 저축 조금 하고, 열심히 하면 막내도 대학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너무 행복해요. 아주 해피하게 살고 있어요."

-그동안 많이 힘드셨어요?

"제가 죽음을 넘어섰다고 얘기한 것이. 소원이 이거였어요. 비행기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트럭이 나를 덮쳤으면 좋겠다. 그건 다른 사람에 폐 끼치지 않고 나 혼자 끝내면 되니까.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고찰이 <우행시>에 많이 들어갔어요. 오이디푸스 말대로 모든 것이 운명이었지만 내가 한 거죠. 마지막 고비가 너무 심했고, 너무 힘들었고, 저로서는.. 그 고비를 잘 넘게 한 힘은, 그땐 친한 친구에게도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서, 그래서 하느님한테 간 거죠, 18년 만에. 가서 '항복합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이야기했고, 정말 살려주시더라구요. 제가 그 힘을 가지고, 남들이 보기엔 당당하고 내가 보기엔 좀 담담하게 사람들 앞에 나섰고, 지금도 애들을 위해서 행복하게 살려고 생각했는데, 저절로 행복해졌어요."

-큰 딸이 소설을 쓰면 엄마에 관한 걸 쓴다고 했다면서요?

"내가 엄마가 이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해 얘기하니까 자기는 그거 잘 모르겠대요. 왜냐면 자기가 오직 항의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우리 아빠랑 왜 이혼했어'는 항의할 측면이 있는데, 나머지는 엄마의 사생활이고, 자기는 인정하는데, 대신 내가 엄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엄마는 엄마 차의 시동을 한 때 껐지만 엄마의 열쇠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잖아"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소리야. 열쇠를 던지는 엄마가 어딨어" 했더니 "아냐, 엄마. 내 친구 엄마들은 다 던져버렸어. 강물 속에다. 다시 못 찾게. 그래서 다신 못 떠나. 누가 밀어주기 전에는. 근데 엄마는 그것을 주머니 속에 감춰두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시동을 켜고 떠났잖아" 그러더라구요. 이제는 안 버려요. 이제는 버릴 생각도 없고, 시동을 끌 생각도 없어요.

저는 결혼이란 제도를 상당히 좋아해요. 저는 집안이 우리 엄마 아버지가 동네 첫사랑이었어요. 14살에 만난. 아버지는 보통 한국 남자들이 그 시대에 저지를 수 있는 죄책사유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고, 지금도 손 잡고 우리 다음에 태어나도 또 만나자 이런 쓸데없는 소리하고, 더군다나 언니 오빠 다들 처음 만난 사람들과 결혼했어요.

지금까지 다 무난하게 살았고. 난 사람이란 다 저런 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처음 만나면 빨리 결혼해야 하는 건지 알았고, 그렇게 하면 결혼이란 게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줄 알았고.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엄청 갈등을 했죠. 그래서 저는 아직도 결혼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어요. 내 주변에 좋은 결혼생활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특히 엄마는 아직도 '김장 했는데 아버지가 하루종일 마늘만 까고 파는 안 까주셨다' 뭐 이런 푸념도 해요.

그런 것만 보고 살다가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우리 가족들도 나 때문에 안 거예요. 대신 가족들이 한 번도 나를 비난한 적이 없었어요. 그건 너무나 큰 힘이에요. 너무나 이해해줬고, 그 집 귀신 되라 이런 얘기 절대 한 적 없어요. 하루 빨리 탈피해라, 오히려 밍기적거린 건 나였고, 지금도 굉장히 어떤 의미에서 자랑스러워해 주시고. 그게 큰 힘이죠. 우리 애들도 아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아빠노릇 비슷하게 놀이공원이라도 한 번 더 데려가려고 하고. 농담으로 이 모든 게 나를 소설가로 만들려는 하느님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요."

-아이러니하게 이 과정을 겪고 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어요.

"죽는 줄 알았어요. 츠지의 제안이 너무 매력적이라서 쓰기로 했는데 너무 겁이 나더라고요. 구상을 하는데 필이 전혀 안 오는 거예요. 이건 순전히 필로 해야 하는 건데. 옛날 필 살리려고 7080 노래를 받아서 매일 들었어요. 내가 사랑을 아직 믿었던 시절의 느낌을 다시 가져보려고 무지무지 애를 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리뷰에 "이 여자는 연애를 안 했나 보다"라는 게 있었는데 그걸 보고 "어머, 너무 정확하다" 했어요.(웃음) 사형수를 취재하는 게 훨씬 쉬웠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앞으로 진짜 사랑을 하면 앞으로 연애소설을 얼마나 잘 쓰겠어."

-사랑을 믿어요?

"지금은 진짜 믿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으로 사형수에게 갔는데, 저는 남녀간의 사랑이 따로 분류되는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사형수 보면서 사랑을 믿게 되었어요. 사형수들은 어쩜 개만도 못한 사람이었는데 교화위원들이 10년 넘게 그렇게 돌보면서 교화가 된 거예요. 그러면 왜 나에게 그런 사랑을 주냐고, 나 너무 힘들다고 하는 윤수 같은 상황이 온대요.

처음엔 빵이나 얻어 먹고 그러다가 그들의 진심을 읽고 화를 내고 그 후부터 변하는 식으로요. 야, 이거 정말 인간이 변하는 것이구나. 그 아줌마들은 봉사하러 오는 천주교 신자들일 뿐인데 그냥 와서 '이거 먹어봐. 이거 방에 들어가면 못 먹어 어서 먹어' 엄마처럼 그런 것 뿐인데 사형수들은 한번도 못 받아본 사랑을 접하면서 금방 변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또 사랑을 하고 싶어?' 물어보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래요.

이건 제 의지의 노력이었는데, 내가 만난 것은 저 사람이었지 남자 일반은 아니다. 제가 싫어하는 말은 남자는 다 그래. 저 그런 말 되게 싫어해요. 그것은 여자는 다 그래란 말과 똑같다고 봐요. 심수봉 노래는 가끔 부르기도 하지만. 저도 남자들 좋아해요.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이분법을 잘 모르겠어요. 에로스만의 사랑이 있나요? 그런데 저는 플라토닉 러브는 너무 싫어하거든요. 저는 그게 제가 그렇게 싫어하는 하룻밤 사랑과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플라토닉만 해요? 난 이해가 안 가.

-난 남녀간의 사랑이 다시 온다면요?

"그럼요. 기꺼이."

-결혼은요?

"전엔 시댁이라는 것을 상정하지 못했는데, 하고 나서 이거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특별히 없는데 그렇다고 다신 안해 그렇게 말하지도 않아요. 그것도 결혼에 얽매인 것이니가요. 요즘은 모든 모토가 물 흘러가는 대로 운명대로 가자예요. 결혼이란 제도의 미덕도 있어요. 약속을 관철하게 하는 약간의 강제적 힘 같은 것. 사람이란 너무 변덕스럽고 불안하니까. 그건 아직도 믿어요. 결혼의 장단점은 있으니까.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사랑은 아무튼 하고 말 거야. 언젠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한일문제가 결부되지만 그것 없이도 사랑 얘기는 쓸 거예요?

"너무 쓰고 싶어요. 그런데 질료가 별로 없어서. <폭풍의 언덕>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요. 울부짖는 사랑 같은 거. 괜히 썼다가 연애 못해봤다는 소릴 듣는 거 아냐?"

-<우행시>도 사형수를 살려야 한다고 울부짖는 건 아니잖아요.

"사형제 폐지 이유 중 하나가 오심의 가능성이에요. 저는 윤수가 무죄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고 싶었다는 사실(자살 충동)에서 범죄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고, 이런 사람의 경우, 살해하기 전에 자살 기도를 해 본 사람이고. 법적으로는 누가 찔렀나가 중요한데 작가의 눈에는 죽은 사람의 손에서 반지를 빼고 그런 행동이 더 나쁘다고 보인다는 것이죠. 그게 더 나쁜 게 아닌가요?

유영철 사건이 책을 쓰던 중간에 일어나서 마지막에 그 부분을 썼다가 뺐는데.,저런 놈은 죽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형수들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런 놈은 죽여야 된대요. 자기들은 4명 밖에 안 죽였다면서. 사람들은 참 우스운 존재에요. 유영철을 보면서 그도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어요. 유영철이 몸 파는 여자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거 이슬람에 가면 정당한 살인인 거예요. 그를 살려둬야 그의 행동이 진짜 범죄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행시> 쓸 때 한 달 반 이상 악몽에 시달렸어요.

너무 무서워서. 살인이 사람에게 주는 악영향이 엄청 나요. 최재천 교수, 신부님 모두 살인 연구하면 악몽에 시달린대요. 저도 우리집이 28층인데 노출되지 않았는데도, 창문만 흔들려도 불안한 거예요. 살인에 대한 것은 글자만 봐도 악한 기운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임신하면 좋은 책보고 좋은 거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삶이 피폐해 지는 듯했어요. 신부님들도 다 그래요. 최재천 교수도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그 때는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성스러운 기운을 받아 중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매일 교회 갔어요. 유영철 공판에 매번 갔는데 이래 이래서 살인을 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너무 지적이야. 변호사인 줄 알았어요. 너무 잘 생기고, 눈도 너무 예뻐요. 그런데 간을 빼 먹어다는 둥. 임신한 여자를 어쨌다는둥 엽기도 이런 엽기가 없어요.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느날 유영철이 우리 신부를 만나자고 했대요. 자기가 어릴 적 개신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서 목사는 싫다면서. 살인할 때 교회의 십자가가 잘 보이는 곳에서 했대요. 우리 신부님이 떨면서 만났는데, 보고 와서 하는 말이 "사람이데"였어요. 앞으로 자기를 볼 일 없을 거라면서, 저는 회개하면 더 힘들 것 같다고, 사형제 폐지하지 마시고 저는 그렇게 가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요?

"우리집을 모델로 한 <즐거운 나의 집> 써야 합니다."

-작품 쓸 때 시간관리는?

"저도 노동자인데 낮에 쓰고 일과 시간에 써야죠. 밤에는 자거나 술 마시거나 놀아야죠. 애들이 크고 나서 바뀌었어요. 엄마 노릇이라도 하려면 아침에는 일어나야 하니까. 밤에 하면 애들을 못 챙겨주고. 그러니까 밤에는 일찍 자려고 하고. 그러다 보면 점심때 시간이 남아요. 애들 재우고 새벽 3~4시까지 하기도 했는데. 주로 2시부터 5~6시까지 쓰죠. <우행시>는 너무 잘 써져서 단 두 시간만 자면서 쓰기도 했어요. 출판사에 일정보다 일찍 넘겨줄 정도였죠."

-또래 작가들과 친분은?

"아무도 안 친해요. 전에 친해지려고 노력한 적 있었는데 내가 한 말이 바로 소설로 나오더라구요. 작가들은 친해지면 안돼요. 먼저 쓰는 게 임자인데 난 게으르니까. 시인들은 더 심하답니다."

-애들은 말은 잘 들어요?

"어휴. 지옥 같은 날들이에요.(웃음) 엄마 말을 끝끝내 안 듣는 이 아이들. 큰 딸이 제일 말을 안 들어요."

-수능은 잘 봤어요?

"당연히 못 봤지."

-심리학과나 사회복지학과로 가려고 해요. 수시에 다 떨어져서 네가 더 큰 사람이 되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신호다 그랬어요. 저는 고졸이라도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저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21세기가 서울대 법대, 연대 영문과 뭐 이런 것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될 거라 생각해요. 학문할 사람이 아니라면. 근데 딸은 발끈하더라구요.

-고 3엄마들의 열성이 중요하던데. 고3 엄마로서는?

"제가 고 3때 못 일어나 챙겨주지 못한 적이 많아서 너무 미안해요."

-연말연초 계획은?

"집에 있어요. 애들 다 키우고 나면 봉쇄 수도원에 가서 한 일년 동안 가고 싶어요. 국내로요. 아무리 서로 묵언을 해도 그렇지 굳이 말도 안 통하는 해외 가서 어쩌자는 거예요. 애들만 크면 맘대로 여행도 다니고. 아이들이 제 쓸데없는 욕망의 발목을 잡는, 현실에 묶어주는 족쇄이기도 하고, 하나의 축복이고 행복인 것 같아요.

우리 애들은 제가 가장 축복인 게. 우리 애들이 무지 밝아요. 학교 가서 볼 때 애들이 밝나 안 밝나 그런 것을 봐요. 나의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근데 애들이 다들 에미 닮아서 대책없이 밝아요. 애들에게 상처 주는 선생님들이 있잖아요. 막내의 경우도 왔어요. 저는 '니가 이런 선생님을 만났단다'하고 솔직히 말해요. 선생님이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라고 하고 싶진 않아요. 선생님이 우리 막내를 너무 애정 결핍으로 보는 것에 대해 상처받았어요. 엄마가 너무 바쁘니까 우리 애들을 그렇게 보시는 거죠. 제가 학교 가면 선생님들이 그런 얘기해요. 바쁜 것 가지고 말이죠. 전 우리 부모 세대처럼 다 널 위해 하는 거란 말하지 않고 1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난 애들에게 거짓말로 감싸고 싶지 않았어요."

-솔직한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부르주아의 건강성이랄까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저에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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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퍼온글] 한국 출판계의 고질병

출판계의 고질적인 관행/병폐를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온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종합/정리한다는 의미는 있겠다. '2007년 한국 출판의 현단계'라고 보아도 좋겠고. 올 연말에는 출판계가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기대해보면서 짚을 건 짚고 넘어가도록 해보자.  

 
뉴스메이커(07. 01. 09) 출판계의 고질병 ‘스타마케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과 ‘마시멜로 이야기’(한국경제신문). 두 책의 공통점은 2006년 서점가를 강타한 베스트셀러라는 점이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12월말 현재까지 70만 부가 팔려 2007년 하반기 100만 부 돌파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자기계발서 ‘마시멜로 이야기’는 2006년 8월 이미 1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웠다.

베스트셀러라는 점 외에도 두 책의 공통점은 공지영과 정지영이라는 ‘스타’가 각각 저자와 번역자라는 점이다. 물론 ‘마시멜로 이야기’는 정지영이 아닌 제3의 인물이 대리번역한 사실이 뒤늦게 폭로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마시멜로 이야기’가 밀리언셀러로 등극하는데 가장 큰 공로자는 10대, 20대에 인기가 높은 정지영이라는 TV스타였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정지영은 프리랜서로 독립하기 전까지 ‘SBS 뉴스퍼레이드’ ‘접속 무비월드’ ‘출발 모닝와이드’ ‘TV문화지대-낭독의 발견’ 등을 진행하며 지적인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출판사는 이 점에 착안, 책 광고모델로도 정지영을 내세웠고 수차례에 걸쳐 팬사인회도 열었다.

공지영 소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역시 그가 지닌 스타성과 무관치 않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뿐 아니라 일본작가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펴낸 ‘사랑 후에 오는 것들’(소담출판사)도 2006년 28만 부가 판매됐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문학성 외에도 대중이 공지영이라는 스타작가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의 책 판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공지영은 2006년 5월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황금나침반)를 출간했다. 이 산문집에서 공지영은 늘 왕따였던 어린시절 이야기와 세 번 결혼해 세 번 이혼했고 성이 다른 세 아이를 낳은 사연 등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기호 소장은 “이 산문집에 실린 공지영의 인생역정 등도 대중이 공지영이라는 스타작가를 한결 인간적으로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정지영의 대리번역 파문에 이어 최근 출판계를 발칵 뒤집은 또 다른 사건은 대필 논란이다. 유명 화가 겸 방송인 한젬마의 최근작 ‘화가의 집을 찾아서’와 ‘그 산을 넘고 싶다’(샘터)가 거의 전적으로 대필작가에 의해 완성됐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출판계에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필작가, 일명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그림자작가 또는 유령작가)에 대한 환기를 불러 일으켰다. 고스트라이터는 수려한 문장력과 적절한 비유로 책을 완성도 높게 만들지만 책 판권정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필자이기 때문에 그림자작가 또는 유령작가로 통한다.
 

 

 

이들의 역할은 저자가 쓴 원고를 좀더 매끄럽게 손보는 윤색 수준부터 완전 대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도움을 얻어 책 판권정보에 이름을 올린 저자는 명예와 인세(보통 판매수입의 8~10%)를 챙기는 반면 대필작가는 대부분 인세 대신 원고지 장당 얼마씩 계산하는 식의 수고비를 받는다. 한성출판기획 박영욱 대표는 “가령 대필자에게 원고료로 500만 원을 지불하기로 계약했고 책의 정가가 1만 원이라고 하면 초판을 5000부 찍어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대필자에게 주고 재판부터 발생하는 모든 인세는 저자로 이름을 올린 이에게 준다”고 설명했다.

대필은 주로 자서전 위주로 이루어져왔다. 작가지망생들이나 배고픈 문인들이 부업으로 정치인이나 재벌총수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것으로 이는 가장 흔한 대필의 형태이다. 출판계 풍문에 따르면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국내 최고의 드라마작가로 손꼽히는 A씨가 2억 원을 받고 대필했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대필자가 따로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문인 중 대필작가 시절을 한번쯤 거치지 않은 이는 드물다. 그러나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에 딴죽을 거는 이는 없다.

문제는 이처럼 자서전 위주로 이루어지던 출판계의 관행이 이제는 자기계발서나 수필, 동화에까지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출판관계자는 “소설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발간되는 서적의 50% 이상은 고스트라이터의 손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자서전과 자기계발서는 100%, 베스트셀러 중 6~7권은 대필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젬마의 두 책이 문제가 된 것도 이 지점이다. 맨 처음 한젬마의 두 책에 의혹을 제기한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한젬마가 자신이 직접 쓴 초고라며 구성작가에게 준 것은 메모와 자료 더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판 직후 각종 인터뷰에서 대필작가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인 양 이야기했다고 보도했다. 한성출판기획 박영욱 대표는 “한젬마씨는 자료라도 줬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라며 “심한 경우 대필작가가 취재와 집필을 다하고, 책 판권정보에 저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마지막 교정지만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출판계의 대필관행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출판사의 도를 넘는 대필관행이 ‘스타’를 내세워 판매부수를 높이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는 점이다. 한젬마의 경우 1999년 ‘그림 읽어주는 여자’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명진출판)를 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출판계에서 명진출판은 기획출판을 통해 스타 저자를 많이 배출한 출판사로 이름이 높다. 1999년 당시 한젬마를 출판사에 소개한 출판전문가 김영수씨(김&정 기획실장)는 “한젬마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에 예쁘장한 외모여서 스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명진출판이 한젬마의 이와 같은 스타성을 더욱 부각시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명진출판이 내놓은 두 책과 이번에 문제가 된 샘터사의 두 책의 표지사진은 모두 스튜디오에서 공들여 촬영한 한젬마의 모습이다.

 


김영수씨는 “요즘엔 작가도 이미지가 따라주지 않으면 책이 안 팔린다”며 “이는 소설부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책 판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글이 50%이고 나머지는 작가의 외모나 경력, 사생활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때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신문 등 인쇄매체와 TV 등 영상매체다. 신문이나 TV를 통해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 쉽게 유명인이 되고 이는 곧 책 판매와 직결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책 출간과 동시에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기본이고 책 성향에 따라 방송 프로그램을 섭외해 저자를 직접 출연시키면서 스타 만들기에 힘을 쏟는다. 김영수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출판사들은 기획을 통해 스타 만들기가 가능한 사람에게 자전적 에세이를 의뢰하는 경우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아예 연예인 등 스타를 내세운 에세이도 줄을 이었다. 1998년 박원숙의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중앙M&B)부터 1999년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2004년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미래) 등 많은 책이 나왔다. 이 중 서갑숙의 ‘나도 때론…’은 100만부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다.

그러나 정지영과 한젬마를 둘러싼 파문에서 보듯 부작용도 적잖다. 글솜씨는 물론 너무 바빠 원고를 직접 쓸 시간조차 없는 스타들을 내세우면서 대리번역, 대필문제가 대두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글솜씨가 없는 전문가가 글솜씨가 있는 이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전문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마담으로 이름과 얼굴만 빌려주고 책의 내용 대부분이 대필자의 창작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출판을 통해 스타가 된 이가 심각한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는 일도 있다. 1995년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언제나 한국인’(대원미디어 출간)의 주인공 에리카 김(한국명 김미혜)이 한 사례다. 문제는 그의 동생인 김경준씨가 일으켰다. 김씨는 2001년 크게 회자된 ‘옵셔널벤처스 금융사기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이 전 시장은 2000년 김경준씨와 함께 서로의 머리글자를 딴 ‘LK이뱅크’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김씨는 2001년 당시 코스닥 기업이던 옵셔널벤처스코리아를 운영하다 거액의 회사 자금을 유용하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인터폴의 수배를 받던 김씨는 2004년 5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돼 현재 LA 메트로폴리탄 디텐션 센터에 수감돼 있다. 1990년대 후반 당시 이 전 시장에게 김씨를 소개한 이는 다름아닌 베스트셀러 저자로 명성을 높인 에리카 김이었다.

출판계에서는 정지영과 한젬마를 둘러싼 파문을 ‘출판계의 황우석 사태’라며 자조한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유영준 팀장은 “국민을 상대로 한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사기극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과학계 전체가 욕을 먹고 위축되지 않았느냐”며 “마찬가지로 자기가 쓰지 않은 책을 자신이 썼다며 명예와 인세 등 달콤한 과실만 먹은 이는 비난받아야 하지만 잇따른 이 두 번의 파문에 의해 출판계 전체가 위축될 수 있어 염려스럽다”고 토로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나 출판사들이 두 번에 걸친 파동으로 보조작가가 필요한 서적마저 출간을 꺼릴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대리번역과 대필, 사재기 등 출판계의 도덕성 시비가 당분간 봇물 터지듯 터질 것”이라며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출판계 스스로 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주례사비평이 한국문학 죽였다”

 


출판계의 ‘스타 마케팅’은 비단 요즈음의 일만은 아니다. 국내 소설이 한창 대중적 사랑을 받던 시절, 즉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소설가를 ‘스타’로 띄우기 위한 출판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책의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해서다.

물론 당시의 마케팅은 대리번역, 대필, 사재기 등으로 얼룩진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와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의 작품을 언론을 통해 띄우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 많은 독자의 아낌을 받았던 작가들이 이때 등장하여 주목을 받았다. 스타를 만들어낸 주역은 출판사와 평론가, 주류 언론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특정 스타 작가의 작품이라면 완성도와 상관없이 한국 최고의 문학작품인 양 소개하는 주례사 비평이 평론가와 언론의 입을 통해 잇따랐다”며 “궁극적으로 이런 문화가 한국문학을 절벽으로 내몬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례사비평이란 비평가적 양심보다 출판사, 학연·지연 등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혀 마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듯 작품과 작가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풀어놓는 비평행위를 말한다. 2002년에는 이런 잘못된 비평행위를 정면으로 비판한 ‘주례사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의 표지에는 ‘비판 없는 비평이 몰고 온 비평의 타락과 문학의 위기’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다. 이 책에서 김명인, 고명철, 이명원, 홍기돈, 김진석, 신철하, 하상일, 진중권 등은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김형중 등 스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한기호 소장은 “평론가와 언론은 주례사비평을 일삼고 스타 작가들은 작품을 공들일 여유조차 없이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연달아 성급하게 생산하면서 현재 한국문학의 자멸을 초래한 것”이라며 “요즘은 팩션이나 일본소설을 제외하면 공지영과 김훈 외에 초판 3000부 이상 팔리는 책조차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학이 침체를 면치 못하자 지난해부터 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는 ‘힘내라, 한국문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학회생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수십억 원의 복권기금을 이용해 우수문학도서 구입과 배포,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원고료 지원, 우수 문예지 구입과 배포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학회생프로그램이 오히려 한국문학을 한층 더 고사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작가에게 원고료를 지원하고 한국문학을 출판한 출판사의 해당 책을 사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근원적 해결방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정도의 미봉책’이라는 시각도 적잖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국가에서 한국문학의 침체를 손놓고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자세는 좋으나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이라며 “작가나 출판사에 대한 지원이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을 회생시키는 방안이라기보다는 미봉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박주연 기자)

 

07.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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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쿠자누스 > [퍼온글] [퍼온 글]평택에 왜 미군기지가?

1) 왜 제주(그것도 남서쪽 끝단에 있는) 모슬포에 첨단전략공군기지가 들어서야 합니까?
☞ 이곳은 대만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대만해협을 향한 전투/전폭기의 즉각적인 출격이 가능한 유일한 대한민국 영토입니다.
☞ 이곳에는 F15가 우선배치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고, 현재 군산비행장에 배치된 스텔스전략폭격기까지 배치될 것입니다.

2) 왜 제주남단에 모슬포 공군기지 예정지 옆에 첨단해군기지가 들어서야 합니까?
☞ 이는 중국과 대만분쟁에 미국의 항공모함과 같은 전략무기들이 상주하는 기지가 됩니다.

3) 왜 제주도 남서쪽 모슬포에 MD기지가 들어섭니까!!
☞ 도대체 어디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막겠다는 겁니까!!

4) 왜 미사일방어기지(패트리어트기지)들이 모조리 서해안에 집중배치되어야 합니까!
☞ 인천 문학산에 들어설 예정입니다. 수원/오산/평택/군산/광주에 이미 있습니다.
  제주 모술포옆에 MD기지가 들어설 예정이랍니다.
☞ 도대체 어디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잡으려고 만든겁니까!! 그리고 하나같이 미군부대들을 기준으로 서쪽지역에 모두 배치되었는데 이건 또 뭐하는 플레이입니까!!

5) 군산항에 핵잠수함이 들어왔다 나갔다 합니다. 중국은 여기에 상당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죠. ☞ 왜냐하면 핵잠수함은 중국의 바로 코앞에서 중국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전에서 항공모함과 거의 동격으로 가장 위협적인 전략무기로 평가받고 있죠.



6) 왜 군산 미공군기지에서는 24시간 핵전략폭격기인 스텔스기가 하루종일 공중에 떠있을까요?
☞ 꼭 이래야 됩니까! 남의 나라에 다른나라의 전략핵무기 공격수단이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7) 왜 미국의 핵항공모함이 우리나라에 들락날락합니까!! 뭐 어쩌자는 겁니까!!

8)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러한 모든 미군의 전쟁기지들을 왜 우리가 공짜로 지어줘야 합니까!!

9) 미군은 평택의 미군기지가 앞으로 100년이상 영구적으로 사용될 동북아시아 전략기지가 될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왜 우리가 이런 화약고를 우리돈으로 지어주고 평생을 자자손손 당신들의 머나먼 후손까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까!!

10)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한미전략적유연성합의에서 동북아분쟁발생시 한국군이 자동으로 동북아 지역군으로 편제되어 재배치된다라고 합의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미국놈들 총알받이가 아니고서는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 젊은이들.. 당신의 후손들이 왜 총을 짊어지고 남의나라 전쟁터에 동원됩니까!!

이상 10가지 질문에 대한 합리적이고 명쾌한 답변을 내세울 자신이 없다면 조용히 읽어만 보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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