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면 아마 오락실이란 장소에 대한 기억이 없으실 리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번잡한 다운타운의 화려하고 요란한 거대 오락실부터 동네 구석쟁이에 들어앉은 허름한 오락실까지 그 양태도 다양했던 오락실. 시끄러운 전자음 속에서 나름 우정들을 꽃피웠던 그 문화는 그러나 이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8-90년대 각 동네마다 위치했던 작은 오락실들은 재미있게도 여러 가지 의미의 소통 행위가 발생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습니다. 동네 꼬마들이 모여서 누가 진정한 스트리트파이터의 짱이냐를 놓고 겨루고, 지금 게임하는 사람이 끝나면 다음 게임을 하기 위해 동전을 차례대로 쌓아두는 문화들은 꼬마들 사이에서 나름 자생한 질서의 문화였습니다. 특히 학교와 엄마가 집중적으로 통제하는 그 금기의 벽을 넘는 아슬아슬한 스릴감이란.. 아이들에게는 참으로 마약과 같은 향락이었지요.
8-90년대 오락실 문화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었는데, 동네 오락실과 다운타운의 오락실입니다. 동네 오락실이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소통과 커뮤니티 형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면, 다운타운의 오락실은 만남의 장소 겸 킬링타임으로서의 역할이 강했습니다. 게임도 지그시 오래 앉아서 할 수 있는 장르보다는 빠르게 다음 사람으로 이어지는 형태였고, 좀더 쇼타임스러운 성격이 강한 장르들이 주로 배치되었습니다.
이중 먼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동네 오락실이었습니다. 다운타운으로 나갈 만큼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동네 꼬마들에게는 이제 비디오게임기라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습니다. 더이상 동네 모르는 친구와 철권 대결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친한 친구들과 함께 게임기가 있는 집에 모여서 동전 안쓰고 즐기면 되니까요. 이로써 동네 꼬마들의 음침한 커뮤니티는 사라졌습니다. 그 커뮤니티는 삼삼오오의 집단으로 갈라져 사회 속에 스며들었으며, 나름의 소사회를 이루던 그 공간의 기능 또한 소멸했습니다.
다운타운 오락실의 경우는 나름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주로 역 근처,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친구 기다리며 시간 때우던 공간이라는 의미가 강했지만, 이 또한 플스방/PC방이 대체공간으로 각광받으면서 서서히 밀려갔습니다. 좀더 나이든 층은 화상경마장과 바다이야기, 좀더 젊은층은 PC방과 플스방으로 흡수되었지요.
그냥 이렇게만 서술하면 마치 오락실의 퇴색이 게임기 시장의 확대에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오락실의 쇠퇴를 가장 결정적으로 당겨 온 변화는 오히려 휴대폰의 발달입니다. 휴대폰의 발전이 낳은 여러가지 휴대용 기능들은 기존 오락실이 가지던 보완 효과를 깡그리 날릴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습니다.
우선 모두가 GPS시각에 기반한 동일한 시계를 갖게 됨으로써 약속시간에 대한 관념이 보다 확고해졌습니다. 여기에 개개인이 모두 직접 걸고 받을 수 있는 통신수단을 늘 들고다님으로써, 과거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사라지고 서로 위치와 시간을 확인하며 움직이는 형태로 만남의 양태가 진화했습니다. 이에 따라 과거 다방, 오락실과 같은 이른바 '기다림' 이라는 시간을 위한 소비상품들은 필연적으로 쇠퇴하게 되는 것이지요.
휴대폰의 발달이라는 기술적 측면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텅빈 시간의 소멸' 입니다. 휴대폰이 사람들의 기다리는 시간을 없앤 것이 다운타운 오락실의 쇠퇴 원인이라면, 늘어나는 학원 등의 사교육시장 시간투여 증가는 아이들의 오락실 시간을 없애버립니다. 과거에는 학교 끝나고 오락실 갈만한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죠. 아이들의 시간은 엄마와 학교, 학원으로부터 통제받으며, 심지어는 어린이용 휴대폰에 달린 위치추적기능을 통해 위치까지 파악당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효율성이라는 이름 하에 인간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면서 개인이 만들 수 있는 시공간에서의 자유라는 영역은 확실히 좁아지고 있나 봅니다. 이 좁은 공간은 단순히 공간만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었던 여러 가지 상품 영역들(오락실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들어 본 것입니다. 그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겠죠.) 의 수요 감소를 불러옵니다.
어젯밤에 문득 고전게임 스트리트파이터2를 하다가 든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