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소녀 - 페미니스트 고스트 스토리
베니타 코엘료 지음, 유숙열 옮김 / 이프북스(IFBOOKS)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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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타 코엘료(2020). 특별한 소녀. if

 

인도, 최근 몇 년 사이 소위 집단 강간의 나라로 더 많이 회자된 듯하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스무 살 무렵에 책으로 만난 인도는 영적인 나라’, ‘구루의 나라’, ‘삶을 돌아보고 싶다면 한 번쯤은 여행을 해봐야 할 나라로 일컬어졌다.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과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로 만난 인도는, 삶의 본모습, 진리를 알려는 자라면 한 번쯤은 가봐야 하는 곳이었다.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며, 고대 인도에서 여성이 혼자 고행과 기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기는 불가능했겠구나, 다른 모든 가부장제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도 역시 신분제 뿐 아니라 성차별의 역사가 너무나 깊어 여성이 자신의 삶을 살기에는 불가능한 곳이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인도에서 여성이 글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게 될까. 그래, 귀신 이야기가 가장 적절하겠다. 그래서 이프에서 인도의 여성작가가 쓴 귀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특별한 소녀를 번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꽤 어울린다, 싶었다. 그래, 세상에는 귀신이 되거나 귀신의 입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했지, 우리 옛이야기의 장화홍련처럼. 그리고, 인도에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베니타 코엘료의 소설들에서 여성들은 남성이 없을 때 행복하다.

아버지는 해군이었는데 넉 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면 거기 있던 해군장교는 사라지고 벨트를 집어든 남자가 남았대. 엄마와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아버지가 항해를 떠나 집에 없을 때였고.” (22, 23 특별한 소녀)

그들은 집에서 행복했고, 늙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죽자 더 행복해졌다.” (42 침묵의 영혼들)

남편이나 연인, 자식, 남자 형제들은 여성을 한때사랑할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에게 폭행을 하거나 버리거나 강간하거나 살해한다.

벌어진 상처의 어두운 입구에서 피멍울을 닦아내며 난 그 동안 내 세척 탁자 위에 벌거벗고 누웠던 이들이 당한 모든 배신들을 생각했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폭력 속에서 가장 사랑했던 이들에게 외면당한 여자들. 남편, 연인, 아들에게 살해당한 여자들.

한 여자는 등에서부터 피부가 모두 벗겨져 있었고 또 다른 여자는 불에 탄 흔적과 상처로 피부가 모두 까맣게 변했다. 그녀는 나에게 자식들이 보지 못하도록 상처를 감춰달라고 애걸복걸해 나는 쌀가루와 진흙을 섞어 주의 깊게 그 상처들이 바르고 칠하느라 하룻밤을 몽땅 썼다.

또 다른 여자는 거절당한 구애자의 손에 얼굴 전체에 황산 세례를 받았다. 얼굴이 없어져 버렸는데도 그녀는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고 나에게 빌었다. 그렇지만 녹아버린 피부와 용해되어 사라진 뼈를 복구시키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많은 여성이 겪어야 했던 셀 수 없는 고통들.“ (111 염장이)

아니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이용해 낮은 신분의 어린 아이를 살해하고서 자신의 잔인한 행동에 영향받아 아내가 서서히 정신을 놓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기껏 하게 되는 판단이

“‘나는 그녀의 웃음을 잃어버렸어.’”

정도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과 산다. (180 하리영감의 아내)

소설이지만, 단편집 특별한 소녀에 담긴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 인도에서 일어났고,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온갖 여성 대상 폭력의 보고서로 느껴진다. 너무 오래, 사람으로 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초자연 현상이나, 귀신으로만 자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 웅얼거림, 웅성거림, 우우우우우 스산한 공기의 흐름 속에 떠도는 무언가. 대체로 이야기는 답답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여성 폭력 사건들이 떠올라 읽는 동안 마음이 편치가 않다. 그래도 한국에선 오빠가 단지 체면 때문에 이웃 남자가 자기 여동생에게 마음을 두었다는 이유로 여동생을 살해하는 정도는 아니잖아? 귀신이 아내에게 관심을 두었다는 눈먼 친척의 말 때문에 아내의 혼이 나갈 정도로 남편이 때리지는 않잖아? 과연 그런가.

2020년 한국에서 여성은 데이트하다가 살해당하고 연인관계를 끝내자고 했다가 얼굴 가죽이 벗겨지고, 단지 그를 믿었을 뿐인데 자리를 함께 했다는 이유로 강간을 당하고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동의하지 않은 영상물의 주인공이 되어 온 세상에 까발려지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산다.

단지, 한국 여성들은 귀신으로 둔갑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로, 자기 글로 자기 이야기를 이제 조금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좀 다를까?

평생을 등을 펴지 못한 장애인이자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접신을 하는 무당이었던, 접신 상태가 아닐 때에는 늘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한 여성이 자기 딸이 초경한 날 남편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데비 여신에게 빙의하여

그를 벌하라!”

내게 그의 피를 달라.” (빙의)

외치는 모습에서, 얼마 전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 푸른 사리를 입은 여성들이 강간범을 집단 린치해서 징벌했다는 기사를 떠올리며, 어쩌면 이것이 인도 여성들의 현실적인 해결방법일 수도 있겠다 생각할 만큼, 소설 속 여인들은 평범하게너무 아프고 너무 약하고 너무 힘들다.

나는 평범했다. 바로 당신의 이웃집에 사는 그런 여자.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을 데려오고 그 아이가 점심시간에 먹을 도시락을 싸주는 그런 여자. 늦은 밤이면 남편 곁에 누워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는 그런 여자.” (206 장거리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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