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만들어진다>
한국의 현실에 꼭 맞는, 생생한 책을 만났다. ‘성폭행’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곤란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반가울 것이다. 성폭행 사건은 당사자도 주변인에게도 쉽지 않다. 수치심과 편견, 상처로 얼룩지기 쉽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초등학생이라면? 더욱 복잡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그대로 흡수한 그들이다. 성인 피해자에게 하듯이 더 조심했어야 한다며 비난할 것인가? 성인 가해자에게 하듯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신체 건강한 남자로 대할 것인가? 혹은 무자비한 괴물로 낙인찍어 밀어낼 것인가?
이렇다보니 성폭력 또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에는 어려움이 몇 가지 따른다. 먼저, 그냥 넘겼던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애써 마비시켰던 분노가 새어나와 일상이 가시밭길이 된다. 두 번째, 나 역시 그런 부조리한 구조에 일조하고 있다는 께름칙한 느낌에 시달리게 된다. 살면서 왜곡된 성 인식에서 나온 발언을 한 마디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세 번째, 외국에서 쓰여진 책들과는 문화적 정서적 거리감까지 더해진다. 네 번째로는 앞서 언급한 초등학생 사건이 그렇듯 묵직한 문제의식을 떠안고 골머리를 썩게 된다.
이런 진퇴양난 속에서 이 책을 만났다. 감사하게도 앞서 나열한 어려움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짚어준다. 예를 들어, 성교육 시간은 교사들의 기피과목이 되었다는 사례가 나온다. 그 이유는 민감한 주제라서 자칫 학생들에게 의도치 않은 불쾌감을 줄 수 있고, 교사 본인의 성 인식이 무심결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보니 스스로도 곤혹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순간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는 보건교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과서를 연상시키는 성실함이 책에 담뿍 묻어나온다. 교과서와 다른 점도 하나있는데, 삶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빽빽한 글 하나하나 저자가 직접 겪지 않고서 쓴 글이 없다. 심지어 한국에서 답이 안보이자 성 인권 선진국을 몸소 방문하기까지 한다. 현장에서 건져온 다양한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어디가 왜 부조리한지, 우리가 당당히 주장해야할 경계와 권리가 무엇인지 짚어준다. 혼자서 복잡하게 끌어안고 있던 고민이 정리되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듯하다.
저자의 여러 문제의식 중에 가장 명료하다고 느낀 지점은 바로 ‘가해자는 만들어진다’라는 부분이다. 강간야동을 보고 그것을 ‘놀이’로 착각해서, 집단으로 강간 가해자가 되어버린 초등학생들의 사례가 나온다. 누구의 탓도 쉽게 할 수 없는 참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성-인권과 성-감수성이 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과제이자 권리이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읽었다.
저자는 여자로서 일상적으로 성추행과 성폭행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교사로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된 제자들을 앞에 두고 고뇌한 수없는 날을 보냈다. 그 고통을 견디고 이렇게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탄한다. 그 고통과 고뇌에 마비되지 않고, 단순히 세상 탓을 하지 않고, 몇 년이고 들여다보며 연구한 결실은 묵직하다. 고백하자면, 나에게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한 번을 겨우 읽었다. 하지만 어쩐지 종종 다시 들춰보게 될 것 같다. 한국 성-인권의 교과서, “성 인권으로 한 걸음 – 가해자를 만들지 않는 성교육을 향하여”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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