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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ㅣ 내인생의책 책가방 문고 11
바바라 파크 지음, 김상희 옮김 / 내인생의책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가족은 아이의 세계다. 어린이가 단순한 성인의 축소판이라는 정의를 벗어나 미숙함이라는 스스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후로 가족이라는 부르주아적 가치집단은 어린이를 보호하고 양육해야한다는 의무조항을 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가정이라는 것은 하루 종일 흙구덩이에서 뒹굴다 돌아온 어린 영혼에게 따뜻한 보호를 선물하는 안락함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가정은 거대한 아버지라는 물리적 보호의 이미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정신적 양육의 이미지로 분할되어 상징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부장제의 상징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적어도 주인공에게는.
이 아이, 그런 것은 일찍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없는 이 가정에서 거대한 우산이자 가장 좋은 친구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멋진 할아버지에게 어느날 알츠하이머라는 벼락같은 진단이 내려진다. 찰흙처럼 섬세한 아이에게 할아버지는 자랑거리에서 부끄러움으로 변해가고, 편모의 가정은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보호라는 짐을 선사한다. 방과 후의 친구들과의 야구도, 자기 방에서의 여자친구와의 비밀스런 데이트도, 소꿉친구와 놀며 지세우는 밤도 이 아이에게는 더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추억일 뿐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런 의무는 너무 버거웠다. 아이는 점점 또래의 즐거운 삶에서 멀어져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어두운 삶을 살아가게 되고, 할아버지는 자애롭고 인자한 보호자로부터 천덕꾸러기의 이미지로 변해간다. 그리고 모든 기억을 잃고 어린애처럼 변해가는 할아버지를 부양하는 가족은 점점 삐그덕대기 시작한다.
결국 끝까지 흔한 감동적인 이야기-할아버지가 갑자기 정신이 들면서 아이에게 눈물을 안겨준다거나 하는-를 선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족적 의무와 개인적 즐거움 사이에서 가족적 의무를 받아들이며 고생스런 삶과 화해하는 아이의 모습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것이 가족적 의무라서가 아니라, 삶이란 매양 그런 것임을 받아들이는 성장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