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를 보는 눈
다카시나 슈지 지음, 신미원 옮김 / 눌와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사람들은 가장 선호하는 화가로 흔히 인상파이거나 혹은 인상주의의 영향 아래 있던 화가를 꼽는다. 모네의 "인상-해돋이"나 르누아르의 인상주의 시기의 그림들은 특별한 사전지식이 없이 보아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러나 모네의 그림이 처음 발표된 1874년, "인상파"라는 명칭은 살롱에 입선하지 못하고 따로 전시회를 연 일군의 화가들에 대한 조롱의 일종이었다. 그들이 표방하는 전통에 대한 혁신적 감성은 살롱이라는 제도가 수용할 수 없는 정신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들은 당대의 보수적인 제도를 넘어서 회화의 본질을 추구한 선구자였지만 당시에는 살롱이라는 시스템 밖에서 아우성치던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던 셈이다. 지금 그들의 그림은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이 되었다. 누구도 19세기의 예술을 이야기함에 있어 살롱의 그림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살롱에 그림을 걸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끝내 아카데미로부터 천대받았던 들라크루아 정도가 아닐까. 그나마도 들라크루아가 찬사받는 것은 살롱적 전통이 아니라 결국 아카데미와 반목했던 그의 혁신성이다.

 

인상파가 당시가 아닌 지금에 이토록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치열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근대적 시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상파 이전의 그림이 고정된 전지적 시점에 의한 객관적인, 그러나 동시에 추상적인 순간의 응고였다면 인상파의 그림은 대상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주관적인, 그러나 현실적인 감정의 찰나이다. 미술이 순전한 "개인적 취미"의 영역으로 들어와 숭배되는 현대의 평범한 미술애호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시점인 셈이다. 객관적인 풍경의 흔적은 남아있으면서 동시에 그것과 교류하는 개성도 남아있는 인상파의 그림은, 집단에 대한 종속을 증오하지만 동시에 집단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어정쩡한 개성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현대의 개인의 시각 그 자체이다. 때문에 인상파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직관적으로 수용하기 쉬운 유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인상파를 우리 시대의 미술의 하나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그대로 "인상-해돋이"를 바라보는 것은 좋은 감상일 수 없다. 이는 새로운 감성 없이 살롱의 그림들을 바라보는 19세기의 미술 애호가들의 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각이다. 단지 그들과 정 반대에 서 있을 뿐이다.

 

모든 미술은 당대의 창작활동이었다. 그러니 각 시대의 미술의 창작 기법은 물론이거니와 창작 의도, 그 미술의 의미도 당대의 정치, 경제 등의 다양한 요인에 따라 모두 다르다. 아니, 심지어는 그 시대의 미술을 현대어 "미술"로 기술하는 것 조차도 무리가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의미로 "미술"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뭉크의 <절규>를 같은 눈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보티첼리는 나름의 이유에 "의해" <비너스의 탄생>을 "제작"하였으며, 뭉크는 또 나름의 이유를 "갖고" <절규>를 그린 것이다. 물론 걸작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갖긴 하지만 각각의 그림이 갖는 역사성을 떼어놓은 채로 그림을 보는 것은 절반 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걸작들이 옆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역사성들을 모두 알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 촉박하다. 좋은 개설서가 설 수 있는 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걸작을 감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주 친절한 양서이다. 걸작의 반열에 오를 만 한 중요한 작품들의 도판을 충실히 싣고 있으며, 동시에 각각의 작품들을 역사적, 개인적 관점에서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미술감상이라는 다분히 현대적인 활동에 필요한 미덕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걸작이 왜 걸작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이런 책들은 고리타분하다. 현재가 기술하는 미술사는 어디까지나 현대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역사의 파편일 뿐이다. 2000년대의 루브르의 소장목록이 2500년에도 같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 심지어 그 시대의 사람들이 루브르 박물관의 존재를 이해조차 할 수 있을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어느새 서울 최고의 놀이문화가 되었고 또 30년도 지나지 않아 남산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최소한의 역사성도 인정받지 못한 채로 파괴된 남산식물원을 보아도 현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 듯 싶다. 현재 우리는 혁신성에 따라 미술사를 기술한다. 그것은 흘러가는 (예전에는 순환했던) 역사를 임의로 분절하고 각 시기를 진보 내지는 전환으로 바라보는 근대성의 소산일 것이다. 르네상스 문화의 가치는 중세로부터의 탈피에 있다, 인상주의의 가치는 근대적 개인의 발견에 있다, 라는 식으로. 그리고 각각의 전환기에 시대를 선도한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시대의 책을 읽을 때도 이것을 그대로 "믿어도" 괜찮은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스스로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많은 지식들이라는 것은 극단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은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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