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모노클 읻다 시인선 14
사가와 치카 지음, 정수윤 옮김 / 읻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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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사가와 치카, 본명은 가와사키 아이. 1911년 일본 훗카이도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열 아홉살에 사가와 치카라는 필명으로 전위적이고 어둠과 광기의 에너지가 넘치는 시를 발표해 일본 시단에서 첫 여성 모더니즘 시인의 등장으로 주목을 받은 그야말로 천재시인이다.
24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데 정말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강렬한 시들을 남겼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 참조)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시인의 시집이라 내내  정수윤 번역가님의 글을 끼고 읽을 수 밖에 없었는데, 번역가님의 글에 보면 실제 치카의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과연 바닷가 마을답게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자연의 정취가 느껴지더란다.  과연 시에도 그런 젊은 날의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와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공허, 불완전함이 생생한 자연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면서 깊이 있는 표현들이 많았다. 시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둠과 그늘을 꿰뚫어 본 듯 하다. 

🔖P11 말은 산을 달려 내려와 발광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푸른 음식을 먹는다. 여름은 여자들의 눈과 소매를 푸르게 물들이고 마을광장에서 즐거이 빙빙 돈다
[푸른 말] 중

🔖P35 밤의 어두운 공기속에 살짝 기대어
흡사 잠과 죽음의 경계에서 춤출 때처럼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생명의 그림자다
그 풀 아래서 우리의 손가락은 통꽃부리가 되어 열렸다
무언의 영광 그리고 고혹의 하늘에 내던져진 이 미친 어리석음

이제 그것들이 돌덩이처럼 내 머리를 짓누른다
[별자리] 중


🔖P47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뿐 실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수목의 투영, 그저 낮에만 지면을 기어다니는 귀신과도 같은 모습, 그마저도 곧 보이지 않게 되리니
[ 전주곡] 중

🔖P151 상냥했던 사람의 시체는  어디에 묻혔을까.우리의 잃어버린 행복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아침, 눈 덮인 지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의 꿈을 파내는 것만 같은 삽 소리가 들린다.
[겨울의 초상]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는 그녀가 숨을 거두기 대략 일주일 전 썼다는 [계절] 이라는 시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챈 것일까. 시인의 초연한 태도에 숙연해진다.
그녀의 처음 시에서 등장했던 '말'이  다시 등장했다. '산을 달려 내려와 발광했던' 그 말은 이제
그 '먼 세월이 한꺼번에 흩어지는 것을 보았' 다.

고요히 마음을 울리는 마지막 문장에 책을 덮지 못한 채 한참 문장을 어루만졌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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