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용한 날들의 기록 -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평점 :
조용한 날들의 기록>
p254 이런 조각 글들. 파편화된 내 모습.
이렇게 하나의 책으로 엮일 것을 예감한 것일까. 철학자 김진영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에 가까운 저자의 1348편의 조각이 모인 거대한 퍼즐 조각같은 책이다. 최근 몇년 사이 저자의 여러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산문집이 아닐까 생각된다.
2010년~2016년 암 선고를 받기 전 블로그, 페이스북, 개인노트 등에 기록된 글 중 1348편을 모아 엮었다. 글 수 만큼 두께도 상당하다. 여러 곳에 기록된 글을 엮어 글의 장르랄까 따로 정해진 것은 없다. 그때그때 스치는 단상을 기록한 글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느 곳이나 펼쳐 읽어도 좋은 책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란 것이 묶여 있지 않는 것이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읽고 쓰기에 대한 고민, 반려견 마리, 보고 읽었던 책과 영화들, 강연, 시대와 사람들, 나이듦과 고통 , 다른 이에게 내보이지 못했을 욕망까지도. 솔직하지만 내밀한 감정의 언어들이 빼곡히 자리잡은 책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너무 순식간이라 글로 남길 생각도 하지 못했을 법한 소소한 생각마저도 어떻게든 곁에 붙들고 곱씹었을 모습이 그려졌다. 순간순간 치열하게 생각했고 고민했구나.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만난 단 한 사람"(p703) 그의 글에서 저자의 모습 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모습까지도 그려지는 것은 , 아마도 이런 이유일까. 마음을 관통하는 글이란 이런 글이지 않을까.
저자의 여러 책 중 이 책이 처음이다. 앞서 펴낸 저자의 책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간 저자를 아껴왔던 애독자라면 이 한권만으로 오롯이 좋을 것이다.
#밑줄긋기
p28 눈 뜨면 나보다 먼저 깨어나 기다리는 얼굴들. 이 지겨운 타자들 . 그렇게 나는 아침마다 지옥으로 끌려 내려온다.
P18 왜 우울한가? 그건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모든것을 알고 있다라고 사이렌은 노래한다. 사이렌은 모든 것을 다 말하기 때문에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노래다. R. 바르트는 말한다. 노예란 누구인가? 그는 혀가 잘린 사람이다.(롤랑바르트<사랑의 단상>
p46 어떤 것이 그렇게 강한 힘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건 내가 그것에 그토록 정신없이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로잡힌다는 건 어떤 것이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게 힘을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p311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공통된 증상: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는 것. 온 세상이 하나의 절대 기호로 응축된다는 것
p421 모든것이 사랑인 줄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들이 사랑으로 표현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p379 농익은 감은 절대로 벌리고 기다리는 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절정의 감은 내가 손으로 직접 따야 한다. 결정적인 건 욕망의 입이 아니다. 그건 절정을 포획하는 정확한 손이다.
p380 왜 우리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때가 되면 슬프고 섭섭해하는 걸까. 그건 혹시 생이 우리가 경험했던 가장 긴 여행이기 때문은 아닐까. 남쪽에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p515 책과 사진의 본질은 하나다. 그건 소멸을 이기려는 욕망이다.
p703 존재의 밑바닥에는 누가 있는가.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난다. 외톨이인 한 사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사람. 더 없이 귀한 한 사람. 임종의 침상에 누운 한 사람.
-
📌서평단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