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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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1 반복되는 하루가 예측가능한 일상을 만든다. 예측 가능한 일상이 선사하는 평온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P167  낙엽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잖아요. 활엽수가 생긴 이래로 변한 적이 없는 규칙이에요. 다만 떨어진 낙엽이 바닥 어디에 도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수없어요. 수많은 요소들이 연쇄작용을 일으켜버리니까요. 거시적인 방향은 정확하게 알수 있지만 미시적인 도착점은 대강 알 수밖에 없죠.

여러개의  아르바이트를 거치던 그시절 공장에서 종일 몇 백개의 테이프를 붙이거나 , 상자를 종일 몇 백개씩  조립하던 그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항상 현타가 찾아왔다. 이렇게도 하루가 가고 한 주가 가고 한달이 가는구나. 경력무관,나이무관의 언제든 대체 가능한 사람.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책에서 말한 유령이 되어가는 기분, 그랬다. 책임의 무게는 가벼웠고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거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0의 사람. 나는 줄곧 허무와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책의 끝장을 넘길때까지 이름조차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 주인공의 마음이 신경쓰였다.

갑작스레 정리해고를 당한 주인공은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한 위기감에  나이,학력,성별,경력  무관인 약국채용공고에 지원한다.  몸도 마음도 둘곳이 없어진' 나'는 그렇게 플라워약국에 불시착하게 됐다.
첫대면에 '나'에게 유령이라 칭하며 시종일관 상처를 후벼파는 김약사와  역시 유령 처지인 조,  약국을 드나드는 손님들과 영업사원 , 잘 알지 못했던 약국의 속사정 등 평소 무심히 들렸던 장소인데 그런 것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약국 일을 하며 서서히 마음을 회복시키는 주인공의 모습에 차분히 동화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차분함 ㅎㅎ)
그리고 다시 0의 자리로 돌아가 면접을 보며 새 삶을 준비하는 주인공을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언제든 0의 자리에 불시착 할 수 있는 것이 삶인데 1이되든 아니든 그것이 뭐 그래 중요한가.  다시 시작할 용기만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주인공은 줄 곧 헤어진 연인 혜를 생각한다. '나'와 달리 혜는 분명하고 확고한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건 그런 취향과 기준을 찾아가며 때론 무너뜨릴 줄 아는 유연함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P246
영에 어떤 숫자를 더하면 영은 사라지고 그 숫자만 남습니다. 영에 어떤 숫자를 곱하면 그 숫자를 영으로 바꿉니다.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영은 영 외에 될수 없습니다. 다른 숫자에 기댈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작가의 말 중>



ㅡ서포터즈 자격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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