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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마광수 지음 / 오늘의책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다시 말해서 낳아준 은혜)를 고마워하라고 들입다 강조해대는 효 사상이 얄밉기도 하다. .. 하지만 자살도 못하면서 출생 자체에 대한 원한을 품고서 살아가면 우리만 손해다. 우리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내보낸 부모(또는 섭리)에 대해 일체의 원한도 감사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연히 태어난 삶에 대한 원한을, 우리의 노력에 의해 필연적인 삶,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데 따른 즐거움으로 바꾸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면 출생 그 자체는 이미 고통이 아닌 것이다.

순자의 제천(制天)론은 현대의 과학정신, 또는 내가 지금껏 여러 글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해온 실용적 쾌락주의 정신과 일치한다. 순자는 자연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연을 이용하여 현실을 더욱 편리하게 개조해나가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욕망을 중요시하여 "인간은 원래 선하다" "인간은 양심이 있다" 는 등 밑도 끝도 없는 미신적 낙관론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여 거기에 맞는 실제적 처방을 내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연히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성악설의 진짜 핵심은 부정적 인간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인간의식 개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때 지금껏 통용되어온 운명론의 본질은 쾌락주의에 반하는 금욕주의적 인생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꼭 철저한 금욕까지는 안 간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인내와 절제, 그리고 '하늘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것은 곧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으로 점철되는 것이 바로 외천畏天사상에 바탕한 운명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밑바닥에는 일반민중을 '수분안족守分安足(분수를 지켜 만족함)'케 하는 쪽으로 유도하여 스스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특권계급의 저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의 '가치'를 부정하고 그것을 '일회적 놀이'로서 신나고 당당하게 즐길 때, 운명의 신은 더이상 심술을 부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생의 정신적 의미'를 찾아보겠다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자를 골탕먹이면서 쾌감을 느끼는 자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신'을 정신우월주의나 독재적 부권, 지배엘리트, 위선적인 도덕률과 사회규범 등의 개념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좋다. 행복한 운명은 육체적 쾌락에 솔직한 자들의 것이다. / 총론


윤회설과 업業설은 원래 '베다'시대까지만 해도 인도에 없었던 사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7,8세기 경에 성립된 '브라아흐마나'문헌에서부터 사후세계에 대한 논의가 생기면서 윤회사상이 점점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설의 요체는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다'는 순順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가 없어진다'는 역逆관에 있다. 이는 현대의 유전과학이 몰두하고 있는 테마와도 유사한 것이다. 유전자의 보완 또는 조작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면 전생의 업은 맥을 못쓰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재적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연기설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역으로 현재적 운명의 극복가능성을 역설하기 위해서 연기설을 강조했다는 말이다.

'가족을 버리는 것'이 일반적 세속윤리에서는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반하여 그것이 석가의 경우든 만해의 경우든 불교에서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용납된다. 이런 사실 자체가 불교가 갖고 있는 반운명론적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운명이란 결국 각종의 윤리,관습,규율 등의 총화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불교의 운명관


나 역시 창조적 상상력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문학은 결국 '인공적인 꿈'이라고 보는데, 그 꿈이 길몽이 되게 하려면 도교 사상에서처럼 현실적 도덕률들을 과감히 파기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 장르의 문학작품들을 통해 반유교적 윤리를 강조하면서, 꿈과 쾌락의 가치를 고양시키고 유미唯美적 공상의 나래를 펼치려 노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길몽일수록 탈도덕적인 것이 많고, 성욕,배설욕 등 인간의 순수본능에 의거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가 생각하는 상태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운명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명제다. 여기서 '생각'을 '상상'으로 바꾸면 더 좋을 것이다. .. 유교는 항상 도덕적 죄의식에 가득 찬 삶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이중적 위선으로 가득 찬 모럴 테러리스트로 만들었다. 자기는 도덕적으로 극기하는 삶을 억지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관능적으로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경우, 그는 그 사람을 질투하고 증오하여 죄인시하게 되는 것이다. / 유교와 도교의 운명관


이런 점에서 볼 때 '쾌락만이 유일한 선이요, 고통만이 유일한 악이다'라고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학설은, 아주 오래된 설인데도 불구하고 지성과 본능을 두루 꿰는 가장 적절한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신적 쾌락의 범주 안에 종교적,.도덕적 쾌락 같은 것은 넣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윤리나 도덕 역시 일종의 처세술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철저한 자유주의에 바탕한 편의주의'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듣기에 '편의주의'는 이기주의나 기회주의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래서 비겁한 도피주의나 치사한 타협주의로 간주될 가능성조차 있는데, 편의주의는 실제로 이기주의나 기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고, 타협주의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편의주의는 경직된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유연성 있는 사고'와 통한다. 원시와 과학, 지성과 본능이 합리성의 토대 위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편의주의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편의주의는 '융통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만이 유일한 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고통스런 노력(또는 인내) 끝에 출세'나 '고통스런 고시준비 끝에 합격' 역시 어쨋거나 악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셈이다. '인간은 자유롭다보면 방종해지고, 방종해지다보면 다시 통제를 가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존재'라는 부정적 인간관은, 그런 고통 끝에 출세한 '악한 무리'들의 비퉁그러지고 사디스틱한 금욕주의적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다. 국민 각자의 마음 안에 원시상태와 문명상태가 엇섞여 공존하고 자유와 방종 역시 엇섞여 공존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정적 인간관과 관습적 편견, 그리고 사도마조히스틱한 한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실 자유와 방종은 그 구별이 애매모호하다. 참된 자유는 오히려 방종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까지 하는 방종은 물론 곤란하다. 하지만 그런 방종은 방종이 아니라 범죄요, 범죄는 대개 '어정쩡한 자유'에 대한 신경질적 폭발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방종은 다른 것이다'라고 엄포놓으며 권력을 동원해 자유를 억압하려드는 '관습적 사고의 꼭두각시'들을 당연히 물리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합리적 지성의 육체주의적 실천이 가능해지는, 그래서 평화로운 쾌락과 평등한 인권이 보장되는, '원시와 문명이 편의적으로 공존하는 민주복지사회' 나아갈 수 있다.  /  관습적 사고와 운명


아무튼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병에 걸리는 이유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이란 사실 존재할 수 없다. 그저 남에게 피해나 주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정신과 육체가 상반된 방향타를 가질 때 한 개인의 육체는 급격히 허물어진다. 거듭 설명하자면 정신은 금욕주의적인데 육체는 쾌락주의적 방향타를 가지고 있을 때, 그러한 양가兩價감정은 그 사람의 심신을 이원적으로 분리시켜 황폐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이중적 의식구조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본능적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담론화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진짜 도덕이 이루어진다. 참된 도덕이란 '솔직성'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적 욕구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지만, 사실 동물들은 인간들보다 병이 없다. 그들은 이빨을 안 닦는데도 충치에 걸리지 않으며, 패륜적 섹스를 하는데도 성적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긴 하되 내세걱정은 안하며, 더더구나 말세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동물세계엔 '전쟁'이라는 집단적 정신병이 없다. .. 모든 병은 정신적 욕구와 육체적 욕구의 불일치에서 나온다. '격노하는 본능'과 '위압적인 도덕률'사이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바로 병이다. 도덕을 버리고, 아니 이중적 의식구조를 버리고 본능적 욕구 안에 정직하게 머물 수 있을 때, 병은 더이상 운명이 아니다.  /  병과 운명


비겁하게 살진 않으면서 자기체질에 맞춰 야한(즉 솔직한)정열을 추구해나가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애쓰되 자신의 명분이나 명예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이웃 전체의 구체적인 쾌락과 행복을 도모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나는 믿는다. .. 이 세상에서 소중한 가치는 오직 '솔직성' 하나 뿐이다.

사회적으로 삼풍아파트 붕괴사고 같은 어이없는 인재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주의 사상을 새롭게 진작시켜야 한다. 진정한 자유가 보장될 때 진정한 책임역시 뒤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욕구는 곧 놀이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므로, '일할 땐 확실히 일하고, 놀 땐 확실히 논다'는  사고방식을 자유주의 정신에 따른 최선의 생활관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노는 것 자체가 악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될 때, '일할 땐 노는 것을 그리워하고, 놀 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만성적 이중인격이 형성되기 쉽다.

지금까지 여러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종합해보면, 창조적 인간이란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단순하여(즉 야하여) 세상물정을 잘 모르며 질투심이 적은 인간이다. 또한 상상력이 풍부해서 공상에 빠지는 것을 즐기고, 성적으로도 다형도착多型倒錯적인 면을 보이기 때문에 '생식적 성(또는 성기적 성)'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어린아이처럼 순진함'과 '다형도착적 성 취향' 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한판 놀이요, 한판 게임이다. 예를 들자면 등산이나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이다.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장애물에 속아넘어가거나 굴복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장애물들은 신이 내려보낸 '시험' 도 아니고 의미있는 삶을 위한 수련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놀이'일 뿐이다. 지금까지 당연시된 운명적 결정론은, 오직 민중을 권력에 순응하는 연약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기득권자들의 심리적 전술에 불과했다.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과 감성으로 야한 광기狂氣를 불태울 수 있을 때, 우리는 갖가지 인생의 굴곡과 풍파들을 '권태를 방지해주는 놀이'로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생에 권태를 느끼고 그것이 절망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우리는 게임 중간에 좌초하고 만다. .. 행복한 운명은 인내와 절제에 있는 게 아니라 관능적 열정과 순진한 떼쓰기에 있다. 왜냐하면 운명은 야野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솔직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우리의 육체적 본성이 갖고 있는 솔직한 욕구에 따라 정직한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 당당하게 야한 것처럼 좋은 운명개척법은 없다. '육체적 매커니즘의 일부로서의 정신'이라면 혹 모르되, '육체와 대립되는 형이상학적 존재로서의 정신'에만 가치를 두고 살아갈 때 운명은 반드시 심술을 부린다. 운명은 이중적 사고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한다. 운명은 야하다.  /  놀이와 운명


군 제대 후 모든 위선과 작위를 떨쳐버리고 자유로울 줄만 알았던 내 생활에 대한 기대는 마 선생님이

지적한대로 내 안의 어설픈 이중 의식과 그에 수반된 엄청난 열패감으로 인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내 자신을 찾아가는 길, 흩어지고 널부러진 가엾은 나들을 주워 모아 내 정신의 온전하고도 완전함이

발현된 해방된 정신 해방된 나를 찾아가는 길에 그가 있다. 강준만 씨가 말한대로 마 선생님은 아직

건재하다. 실망 시키지 않는다.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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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눈 뜰 때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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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통째로 어긋나버릴 뻔 했었던 군생활.

삭막한 그 곳에서도 도서관은 있었던지라 이 책을 발견하고 품에 꼭 안고 애지중지했었다.

물론 재미있게 읽었었지만 소설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시뻘건 펜으로 노트에 옮겨두었었던

인상적인 부분들을 옮겨본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인간관계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저급하게는 호기심이나 명예욕으로 문학에 입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애초부터 개인적 구원이라든가 사회적 정의와 같은 아주 고귀한 목적에서 문학을 시작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문학이 내 직업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문학이 자기 구원도 명예욕도 아닌 직업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 고귀하게 느껴졌다.

이제 습작을 겨우 끝낸 소설가 초년생인 내게 소설이란 인생유전을 그리는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소설에 대한 확고부동한 또 하나의 믿음이 있으니 소설이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세상이 100퍼센트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언제나 생각해왔고 그 가운데 10프로의 악의적인 거짓말이 살인을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키며 아우슈비츠를 만든다고 생각해왔다. 나머지 90프로의 거짓말은 악의적인 거짓말과는 달리 무해하거나 도리어 그 거짓말 때문에 많은 문제들을 덮어주는 세상의 윤활유 같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그 악의 없는 거짓말의 가장 참다운 세계가 아닐는지. 소설가라면 깜짝놀랄 거짓말을 해야한다.

분명히 여호와의 증인의 영향이라고 여겨지는 이런 부유는, 그 신앙이 내게서 영혼과 윤회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 신앙의 중요 교리에 의하면, 선택받은 선민들만이 이 땅에 영원히 살게 될 뿐 거기서 제외된 자들은 영원히 지옥의 고초를 겪는 것이 아니라 온 곳으로 자연스레 되돌아간다는 것, 즉 아무런 의식없는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 교리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그 부분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나는, 내 삶이 영원이나 윤회로부터 완전하게 닫혀져 있다는 것을 깊이 존중하며 그 사랑이 단 한번의 생 속에서 여러겹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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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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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야만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다. 빵집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서문 쪽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119쪽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걸 지켜보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는
실연하면서 이미 알게 됐지만,-143쪽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가정법 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배웠고 3차 방정식을 그래프로 옮기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 알게 된 일이다. 내 안에는 많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란 그 빛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다.-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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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하룻밤의 지식여행 19
제프 콜린스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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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해체에 대한 구절들

★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해체는

'무엇이 본질인가?' 라는 사고에 대한 의문으로 더 잘 묘사될 수 있다.

★ 해체는..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의미의 통상적인 가정들을 문제삼는다.

★ 분석 / 비판 / 방법론 / 프로젝트   ㅡ  이들에 저항.


군대말년에 아버지께 말씀드려 택배로 왔던 책들중의 하나가 데리다, 그것도 입문서였다.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중 '사회학' 을 재수 하던 때 보고 대학 과 선택에 영향을 미쳤던 터였다.

지식여행 시리즈에서 이것과 푸코 두 권을 부탁해서 받은 바, 관심 있었던 데리다 부터 들춰보았다.

역시 내 머리로는 입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근무서면서 앞장 뒷장을

왔다갔다 거리며 줄기차게 읽어댔다. 어찌되었든 간에 푸코는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반해 데리다는

왠지 끌린다. 푸코는 여기저기 손을 많이 대서 그런지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어지럽고 산만하다.

이성 중심, 형이상학의 서구 사상에 반기를 들고 해체를 역설하면서도 정작 해체주의자라고

불리우기도 거부하고 사상사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매김 되는 것도 거부한 완전한 자유주의자가

아닐까. 내 맘대로의 판단이다. 어쨋든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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