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선생 날라리들의 빨간 마후라

교수신문(06. 05. 31)에 문학평론가이자 지방대학 국문학 (여)교수 김용희의 영화평 '선생 날라리들의 빨간 마후라'를 옮겨온다. 지난 3월에 개봉됐었던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대한 것인데, 우연히도 어제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다가 막간에 절반쯤 봤다는 게 옮겨온 이유이다. 영화 자체는 (예상대로) 별로 성에 차지 않지만, 혹 생각해볼 거리들이 있나 리뷰들을 더 찾았다. 김용희 교수의 평에 이어지는 것은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의 리뷰이다.   

 

 

 

 

-사실 영화의 촉발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1998년 중학생들이 유희적 자작극처럼 만든 비디오<빨간 마후라>.(*<스물살>이란 영화 등도 같은 소재를 취해서 만들어진 '허접한' 영화였다.) 

-여중생의 실제 성관계를 찍은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들은 그 이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오, 갓! 놀랍게도 이들은 대학교수가 되어있더란 말이지. 아니ㅡ 그럼, 중학교 때 양아치였던 이들이 개과천선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리가. 한국의 영화관객은 ‘대한늬우스’가 나오던 과거 계몽의 훈계에 이미 넌더리가 난지 오래다. 그러니까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교수의 숨겨진 과거, 은밀한 사생활에 대한 훔쳐보기, 대중의 관음증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런 점에서, 이 영화 자체의 발상 또한 대단히 '부도덕'하다. 과거지사와 현재 사이의 '끄나풀'을 물고 늘어지면서 연좌제식의 윤리를 추궁하고 있기에).

-지방 전문대학의 염색과 교수 조은숙과 만화과 교수 박석규. 이들은 중학교 때 최고의 양아치, 양아치의 ‘깔대기’였던 과거를 자신의 비밀로 묻어두고 있다 우연히 대학에서 교수로 만나게 된다.(*한때 살인자도 개과천선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이다. 하물며 '양아치'가 무슨 '절대악'이라도 되는가?)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갖은 교양과 품위 있는 말투로 자신을 치장하고 숨기며 살던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지는 순간이다(*한번 양아치이면 영원한 양아치인가?).

-조은숙(문소리 분)은 스스로의 품위와 지적 풍모에 취하여 높은 비음으로 자작시를 낭송한다. 함께 회식을 하던 남자교수들은 거의 실신할 듯이 감탄을 하며 여교수를 바라본다. 여교수는 광택나고 몸에 붙는 브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있다. 남성들의 숱한 관능적 시선을 스스로 즐기면서 자기도취적으로 몸을 꼬며 걸어간다. 여교수는 자신의 관능미를 마음껏 펼치며 지적 내숭으로 남성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완벽한 코메디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의 내숭과 위선을 포복절도하며 비웃어보라 한다.(*이 영화는 쓴웃음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포복절도까지는 아니다.) 

-아무렴, 세상에 이런 여교수는 없다. 실제 대학현장에서 대개 여교수는 중성적이어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야 한다(여성은 중성화내지 남성화됨으로써 비로소 남성중심 사회에 끼어들 수 있으므로). 여성 학자는 중성적일 때 좀더 지적인 풍모와 안정감을 보장받는다. 사실 여성 학자에게서 아름다움 특히 관능적 미모란 그들의 지성의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잣대일 뿐이다. (“어떻게 저렇게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고 공부란 것을 할 수 있겠어? 말도 안돼!”)

-그렇다. 여교수는 쇼트커트나 단발머리에 거의 원불교 전도사나 수도승처럼 검정, 회색, 곤색 슈트를 번갈아 입고 검정색 단화를 신어야 한다. 만약 영화에 나오는 여교수와 같은 여성 학자가 있다면 그들은 남성 교수에게서 ‘애인’의 그룹에 속하게 되지 ‘동료’의 반열에 놓이지 않는다.(*이 무슨 오버스런 반응인가? 영화는 여교수와 기자간의 기예적 섹스신을 보여주는 서두부터 '리얼리즘'과 무관하다는 걸 이미 전제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 교수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용감하게 맞장 뜨고 서로 통쾌하게 웃어버릴 담대한 호기조차도 없다.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숨긴 채 내숭을 떨고 체면을 차리면서 “적어도 공인이니까” 자위하면서. 제도권 하에서, 당위적 삶의 표본 아래서, 점잖은 목소리와 성숙한 교양으로 욕망을 저당 잡힌 채. 서로를 “선생님,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지성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우리는 어떤 비밀과 공모를 안전하게 숨기고 있는 것인가.(*이 또한 평자의 '유머'인 듯하지만, 별로 웃기지 않다. 지방대학 유머인가?) 

-하여 영화에서 대학 교수는 말한다. “교수생활? 편하거든, 아무렴...... 교수야 입으로 먹고 사는 거지. 그래도, 겁도 나지, 얘들한테 구라쳐서..... 그렇다고, 함부로 못하지. 얘들이 보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빨간 마후라’의 날라리 같은 끼를 반납한 채 어느 정도 내숭을 떨면서 시대의 지성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에 가서 한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아오고 양아치였던 과거를 숨긴 채. 그러니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우리 시대 교수 상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블랙유머가 아니고 무엇인가. 흥미로운 陰畵(음화)가 아니고 무엇인가.(*영화도 그렇지만, 영화평 또한 기대에 못 미친다. 시읽기에 나름대로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준 평자의 영화 읽기는 왜 이리 허술한가? 그리고 제목은 왜 '교수 날라리...'가 아니라 '선생 날라리...'인가?)

(*)건성으로 보던 영화에서 '러시아어' 몇 마디가 들리길래 다시 돌려보기도 했다. '블랙유머'나 '흥미로운 음화'라기보다는 '양아치'적 발상의 영화에 불과하다. 유치하게 '빨간 마후라' 운운하지 말고 '날라리 교수사회'를 정공법으로 풍자하든가 말든가 했어야 했다(애꿎은 '지방 전문대 교수'들이나 도마에 올려놓지 말고). 어느 평자의 '짝퉁 홍상수'란 평조차도 과분해 보인다. 차라리 <스물살> 같은 어설픈 에로영화가 '정직'해 보인다. 더불어, '은밀한 매력' 어쩌구저쩌구 해놓고는 애꿎은 여배우의 전라 연기까지 요구할 건 무언가? 이 영화의 '은밀함'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21(06.04. 05) 황진미, '매혹되기에는 너무 값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이 영화는 첫째, ‘지식인을 조롱하는 영화’가 아니다. 둘째, ‘모호하고 매혹적인 여성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주변부 떨거지인 그들을 지식인이라 하기엔, 아직까지 ‘지식인’이란 말이 아깝고, 그녀에게 매혹되기엔 그녀가 너무 싸구려다. 영화는 그녀를 닮았다. 겉으론 ‘교수’라는 직함에 외모도 그럴싸하지만 천박한 정신에 자아도취가 전부인 그녀처럼, 영화 역시 그럴듯한 제목에 세련된 포스터와 예고편을 내세우지만, 형편없는 주제의식과 자의식 과잉이 전부이다.

-시(詩)를 읊고 살짝 다리를 저는 설정처럼 영화 또한 온갖 형식미학을 어수선히 차용하고, 적당히 언밸런스하고 깨는 듯한 편집을 통해 짐짓 예술영화인 척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첫 장면이 중요하다. 사진 찍는 수녀들의 시선이 머무는 바닷가 여인은 두개의 텍스트를 연상시킨다. 하나는 지방성(地方性)을 화두로 삼는 <무진기행>이요, 다른 하나는 히스테리아를 화두로 삼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두 텍스트에 대한 거명은 평론가의 안목이면서 동시에 고육지책처럼 여겨진다.) 

 

 

 

 

-<무진기행>의 ‘무진’은 실제 지명이 아니다. ‘안개가 특산물인 항구’이자, ‘서울과 대비되는 곳’의 의미로 지어낸 이름이다. ‘심천’ 역시 실제 지명이 아니라,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의 의미로 지어낸 것이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무진에 내려와 처음 만나는 것은 ‘잘 차려 입고 지적(知的)이라는, 미친 여자에 대한 수군거림’이다. 이것이 작가가 잡아낸 ‘지방성’의 첫인상이다. 영화의 첫 장면, 대도시에선 바닷가에 성장(盛裝)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구경거리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녀들의 주시는 지방성의 징표이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지방방송 TV출연을 대단한 일인 양 여기고, 그녀 역시 “TV스타” 운운하며 자아도취에 빠진다. 리포터가 아니라 PD라는 말에 표정이 바뀌고, 상대를 그럴듯하게 보아 동침한다. PD는 “SBS와 SBC가 다를 게 뭐냐?” 대들지만, 곧 “여기 PD가 PD냐?”며 반문한다. 그나마 서울에서 내려가는 박 작가는 “지방 전문대에서… 애들 가르쳐”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PD는 의식은 하되 인정하려들지 않으며, 박 작가는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지방성’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교수’니, ‘선생’이니, ‘작가’니 높여부르지만, 서로를 비웃고 서로의 진성성을 의심한다(“콤플렉스 때문”, “단체엔 연애하러 오나?”, “개나 소나 다 교수”).

-<무진기행>의 그들도 그랬다. “무진에선 누구나 타인은 모두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내가 대학 다닐 때’를 말끝마다 붙이는 음악선생에게 <목포의 눈물>을 청해 들으며, 그녀를 둘러싼 애정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녀 역시 유행가나 듣는 그들을 경멸하면서, 애정관계를 이용해 ‘결혼’이든 ‘서울행’이든 뭔가를 얻고자 한다.

-여기서 ‘지방성’을 거론하는 것은, 지방 사람들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화가 ‘그들’에게 조롱의 시선을 보낼 때, 과연 무엇에 대한 풍자가 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들이 ‘중심부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은 ‘지식인들’의 심장부에 꽂히지 않고, ‘주변부의 지식인인 양 구는 떨거지들’에게 빗맞는 것이다. 풍자는 어설픈 ‘허수아비 논박’이 될 뿐이며, 이로써 중심부 지식인들은 표적을 빠져나간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문학박사이자 비평가인 그녀가 사실은 동거남에게 논문을 얻었고, 동거 사실을 숨긴 채 시집을 가고자 돈을 지불한다는 이야기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폭로가 된다. 그러나 심천대 염색과(대사 “뭐 그런 과도 다 있냐?”) 교수인 미혼녀가 주변의 지인들과 돌아가며 연애를 한다 한들 무슨 풍자가 되는가? <선데이서울> 기사거리도 안 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와 톱스타의 데뷔전 이야기는 스캔들이 되지만, 만화가(대사 “만화 안 보는 사람들은 모르지”)와 지방대 교수의 중학 시절 유명하지도 않은 일화가 무슨 흥밋거리가 되는가? 시에 대한 조롱은 <넘버.3>의 베스트셀러 시집 <스물아홉, 섹스는 끝났다>에서 이미 끝났건만, 아마추어 시인인 그녀를 내세워 무슨 변죽을 울리는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음란서생>이 발칙했던 건 그들이 단순한 양반 나부랭이가 아니라, 중앙의 최고권력층이었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 파문’과 ‘국회의원 성추행’이 실시간인 시대에 지식사회와 중심부 권력에 정조준하지 못하고, 어디다 시시한 총구를 겨누는가?(*내 말이 그 말이다.) 그래도 제일 깨끗해 보이는 환경단체를 조롱한 건 신선하지 않냐고? 이미 수년 전 존경받던 환경단체장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포커스도 맞지 않고, 신랄하지도 않으며, 시대에도 뒤처진 솜방망이 헛손질이 불쌍할 뿐이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시작, 영국 해변가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 그녀에 대한 소문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이며, 미쳤다는 것. 그러나 귀족 청년은 그녀의 지성과 모호함과 특별한 사연에 매혹된다. <여교수…>의 첫 장면, 바닷가의 그녀를 보고 “죽이지 않냐? 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그녀에 대한 수군거림. 교수란다. PD가 그녀에게 매혹되는 지점은 외모와 살짝 장애와 교수라는 직함이다. 훨씬 얄팍하다.

-<프랑스…>에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과거는 아예 ‘창녀, 미친년’이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녀 스스로 꾸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하여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말로 귀족을 매료시키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든다. <여교수…>의 그녀에게 수치스러운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녀는 과거로부터도 현재로부터도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의 그녀는 일찌감치 섹스를 하게 된 여자였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는 아니었다. 외부적으로는 남자친구에 의해 교환 양도되기도 하고, 스스로도 이긴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니가 이겼다며?”) 남성 중심의 성관계를 내면화한다. 그녀의 섹스는 남자들간의 힘의 논리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녀의 의지나 취향에 달려 있지 않으며, 그녀의 프라이버시는 언제이고 남자친구 앞에서 고해져야 하는 것이다(“했냐?”). 그녀는 남자의 전리품이다. 성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상대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지, 그저 문란하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그녀 역시 여왕벌이 아니다. 환경단체 남자들 모두와 시간차를 두고 섹스를 한 듯한 그녀는 그들의 공공연한 치근거림을 받는 상대이다. 그들은 서로 질투하며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여러 명이 그녀와 자고 싶어하니까 그녀에게 지배권이 있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그녀는 그들의 정욕과 경쟁심의 ‘대상’이요, 매개항일 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그들을 지배한다면, 그들은 그녀가 누구와 자든지 감히 상관할 수 없어야 한다(<바람난 가족>에서 황정민의 애인이 딴 남자와 있을 때, 황정민은 사과하고 돌아간다). 그녀 뒤를 캐는 유 선생을 그만두게 하지 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여러 남자와 섹스를 할 뿐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까놓고 말하면 유 선생의 유언처럼 “네가 갖든지, 형이 갖든지, 돌려서 처먹든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녀는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PD라는 직함에 호감을 표하고 섹스를 한 뒤 아이로부터 “엄마 없다”는 대답을 유의미하게 듣는다. 유부남과 관계를 가지면서 부인의 존재 유무에 여전히 신경쓰는 것이다. 그러다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피한다. 유 선생이 PD에 대해 묻자 “결혼할 사람”이라 대답하고, 유 선생이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자 쩔쩔맨다. <프랑스...>의 그녀가 결혼제도의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킴으로써 자유로웠던 것에 반해 <여교수…>의 그녀는 결혼제도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그녀가 수치스러운 과거를 만들어 모호한 매력으로 삼았듯이 <여교수…>의 그녀는 장애를 만들어내어 매력으로 삼는다(“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남다은도 지적하듯(<씨네21> 545호 ‘욕망을 배신하라, 스타일을 배신하라’) 그녀가 다리를 저는 증상은 히스테리아이다. 그 증거로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을 고집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히스테리아는 ‘증상에 대한 무관심’이 특징이다. (또 감독은 인터뷰에서 “약간의 장애가 있는 여자는 남자들이 보호해주고 싶어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가습기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환후(幻嗅) 역시 히스테리아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환후는 적개심의 표현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히스테리오닉 성격장애(hysterionic personality disorder)임을 알 수 있는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주목받기를 원하며, 여학생에겐 심하게 질투를 느낀다. 또한 언제나 ‘개인극장’ 안에서 배우인 양 연극적으로 말하며, 이따금 팜므파탈처럼 차갑게 지시하고, 심한 욕설을 내뱉는 것도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런데 그녀가 히스테리아적 주체라고 말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남성중심 사회에서 언어화되지 않은 욕망이 신체언어로 발화한다고 말할 때, 즉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고 할 때, 그 언어는 누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프랑스...>에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여성의 신경증에 관한 의학 논문과 판례 등이 작품에 삽입되어 있고, 그녀를 ‘남자를 조종하고 이용하는 악녀’로 진단하는 신경증적 분석이 나오지만, 결론적으로 그녀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입으로도 그녀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녀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시점의 문제이다. <프랑스…>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구사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1인칭 시점을 끼워넣듯이 <여교수…> 역시 특이한 시점을 보여준다. 대개의 영화들이 3인칭 시점이고 드물게 1인칭 시점이 활용되는 반면, <여교수…>의 장면들은 2인칭으로 구성된다. 시점숏을 대부분 정면응시로 처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을 대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녀를 2인칭으로 봄으로써 그녀를 3인칭, 객관적 관점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필요를 폐기하고자 한 것일까?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신의 증상을 관객 눈앞에 늘어놓으며 스스로 ‘play’(놀다, 연기하다)할 뿐,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과연 그녀의 몸은 붉은 꽃이요, 그녀의 자궁은 미궁이다. 즐!

(*)해서, 평자가 주목하는 것은 '여교수'가 아니라 '그녀'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녀는 모호한 히스테리적 주체로 남는다는 것. 나는 이 모호함이 그녀의 '은밀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밀함'은 그보다는 값비싸고 숭고한 어떤 것을 요구한다...

06. 05. 31. - 06.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마광수와 앤드류 블레이크

방학이지만 '월요일'이란 이유로 학교에 나왔다(대신에 점심 먹을 때쯤 나왔다). 오는 길에 이번주 <필름2.0>을 사서 대략 점심먹을 때까지 들춰보았다. 그리고는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이드>(2005)와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을 보아야 하는 영화로 일단 꼽아두었다. 전자는 나이 어린 부모(=아이)에게 생긴 한 '아이'에 관한 영화이며, 후자는 두 남자간의 (우정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게이 영화'이다(아래는 두 영화의 이미지). 

내 분류대로 하자면, 전자는 '로망스'이고 후자는 '포르노'이다. 아마도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두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마디 코멘트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아마도 내가 접할 수 있는 '2005년의 영화' 두 편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설특집이라고 실린 '문화계 32인의 강추, 나만의 컬처블로그'를 훑어보는데, 가장 눈길이 간 '블로그'는 역시나 마광수 교수의 '이런 게 예술이지'. 아침 나절에도 요즘 읽고 있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들춰본 탓인지 '예술'이란 단어에 내 시지각이 민활하게 반응했다. 커피 한잔 마시는 김에 아르바이트로 '예술' 좀 따라가본다. 

 

 

 

 

마광수 교수는 작년 한 해 동안 대략 8-9권의 책을 출간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는 모양이다. 앤드류 블레이크에 대해서도 아마 그의 책들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그의 책들을 초기의 문학이론서나 윤동주 론을 제외하면 별반 읽은 게 없다(한두 권 읽어보면 나머지는 지루하다는 게 그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런 게 예술이지'를 읽으며 그에게 더 맞는 건 '야설'이 아닌 '야동'의 세계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명과 일기, 잡담들만 잔뜩 늘어놓는 그의 '권태'는 동적인 영상들로부터의 소외가 낳은 결과는 아닐는지(그런 의미에서, '국민감독' 임권택만 도와주지 말고, '국민권태' 마광수도 좀 도와주자! 진짜 '예술' 좀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또 먹고 살 만하면, 볼 게 포르노밖에 더 있는가?)  

마광수 교수(1951- )가 소개하고/자랑하고 있는 예술은 앤드류 블레이크(Andrew Blake, 1947- )의 세계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지 모르겠지만(나는 처음 들어봤다), '앤드류 블레이크의 세계'의 보다 정확한 이름은 '앤드류 블레이크의 에로틱 세계'이다. 관련사이트에서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니 포르노 관련으로는 작가, 편집, 촬영, 감독, 제작 안 하는 게 없고, 직접 찍은 것만도 거의 60편에 이른다. 마교수는 앤드류 블레이크의 베스트 타이틀 5편을 거명하면서 이렇게 소개한다.

"요즘 학생들한테 물어보니 예쁘기만 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무슨 말씀, 탐미주의자인 내가 보기엔 이거야말로 유미주의의 결정판이지. 포르노가 아니라 예술이다. 미장센이 정말이지 너무 좋다.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어떤 작품을 봐도 앤드류 블레이크의 예술적인 포르노만한 걸 못봤다. 그의 작품을 10년전에 비디오로 봤지만 최근 이 다섯 편을 구해 보면서 다시금 즐거웠다. 예술이란 이런 거다."

마광수 교수의 57편에 이르는 블레이크의 영화들을 다 구해서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베스트 5'로 꼽은 영화들의 목록은 'Body Language'(2005), 'Hard Edge'(2003), 'Girlfriends'(2002), 'Paris Chic'(1997), 'Captured Beauty'(1995) 등이다. (연소자관람불가를 전제하고) 잠시 포스터들을 나열해 본다.

'요즘 학생들'은 재미없어 한다지만, 블레이크는 (예술의 종말과 무관하게) 요즘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이다. 그리고 그 현역 예술가의 세계는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앙드레 김 어법으로 '판타스틱'한 장면들을 나로선 그저 '상상해' 보는 정도이지만, 이런 '패티시'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예술가 마광수도 충분한 영감을 받고 써주었으면 좋겠다('사라'만 즐거운 작품 말고). 마광수-예술론에서 지루하다는 건 죄악이니까(그에게 불충분한 건 도덕이 아니라 예술이다).

06. 01.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