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0.
저자의 4년 전 박사논문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논문과 저작을 4년에 걸쳐 두 번 선물로 받았으니,
『자폭하는 속물』은 두 번 읽어야 할 책이다.
4년 전에 논문의 일부에 대한 짧은 메모를 남겼었는데,
그걸 여기 단행본 저작에다가 붙여놓는다.
2014. 2. 22
복도훈의 박사논문 『1960년대 한국 교양소설 연구』에 대한 인용과 메모.
‘인식’을 위한 이례적인 비교이자 인상적인 경로라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낯설고 그렇게 낯설므로 ‘대상의 생성’(쉬클로프스키)을 인지할 수 있게 했던 한 대목은 『국가와 혁명과 나』(박정희, 1963)에 대한 비평이었다. 5·16 군부쿠데타가 4·19 혁명을 모방하고 변용하면서 서사적으로 경합하고 경쟁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사용된 주요 어휘가 바로 ‘파국’과 ‘청춘’이었고, 그 단어들의 내재적 정치성을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 4·19 세대의 문학적-정치적 이면을 되비추는 한 가지 뜻있는 경로가 될 수 있다는 것. 끊어 인용할 수 없는 한 단락은 다음과 같다: “『국가와 혁명과 나』는 1960년대 교양소설에서 젊음을 서사화하는 상징적 방식을 가늠할 수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국가와 혁명과 나』는 5·16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선점하기 위해 4·19 혁명과 서사적 경합을 벌인 극적인 사례이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규정짓고 그것을 ‘4·19 학생혁명의 연장’으로 정당화하는 서사적 전술을 고안할 때 흥미로운 점은 그가 가장 많이 동원하는 어휘가 ‘파국’(파멸)과 ‘청춘’(청년)이라는 것이다. 이 두 어휘는 각각 끝과 시작, 또는 시작과 끝이라는 고리로 맞물리면서 하나의 서사적 체계를 완성한다. ‘불안한 정치 정세와 각박한 경제 사정 등으로 사회 여러 상황은 한마디로 말해서 내일 없는 파국 전야라 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한 장기독재 16년을 진단하는 데 등장하는 ‘파국’이라는 어휘는 나아가 한반도 수천 년의 역사를 파국과 타락에서 구원을 열망하는 수난사로 재구성하고 5·16 군사쿠데타를 새로운 역사가 개시하는 구원사의 기원으로 전유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수사이자 책략이다. 박정희는 과거를 몰락할 파국으로, 쿠데타를 구원의 혁명으로, 혁명을 인생으로, 쿠데타 집행자들을 ‘청춘’으로 지칭한다.”(21쪽)
4·19 세대 작가들, 곧 최인훈, 김승옥, 박태순, 김원일, 이동하의 1960년대 교양소설(Bildungsroman)이 ‘젊음’을 서사화하는 방법과 태도의 ‘정치적 무의식’을 분석하려는 이 논문의 의도, 다시 말해 당대 근대성의 형성과 그에 대한 비판에 있어 저들 교양소설이 차지하는 위상과 위치를 분석·분류·재배치·재정의함으로써 ‘한국적 교양소설’의 미학과 정치를 규명하려는 이 논문의 의지. 그런 의도와 의지를 따라 위의 한 단락 속에 들어있는 박정희의 문장들은 발굴되었고 그것에 대한 비평의 문장들은 벽돌처럼 쌓아 올려졌다고 생각한다. 파국, 종언, 청년성으로서의 조로(早老)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내게 4·19와 5·16 사이의 비교/비평은 유효했고 또 주효했다. 그런 한에서 이른바 ‘한국적 교양소설’의 모순과 착종, 배리와 역리의 전개를 선명하게 공지하는 한 문장으로 뽑아들 수 있는 건 이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와 같은 개발독재의 영웅이 호명하는 젊음과 4·19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젊음의 관계, 그 차이와 동일성은 무엇인가?”(22쪽) 이 물음을 사태의 착잡(錯雜)을 향한 이끌림, 혹은 곤혹스럽고 곤욕스러운 상황의 난제를 향한 의지의 분출로 읽는다. 그 착잡, 그 난제란 4·19와 5·16이 분리된 두 개의 정치적 장소가 아니라, 적대적이지만 서로에게 기생하는 장소, 서로 결렬하면서도 은밀히 합작하는 장소였다는 것을 뜻한다. “4·19 혁명의 서사를 혁명적 기원으로부터 멀어지는 타락의 서사로 보는 관점과 『국가와 혁명과 나』(1963)와 같은 자서전에서 박정희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혁명이라는 기원을 정초짓기 위해 기존의 역사를 타락과 파국으로 간주하는 서사적 시도는 1960년대 이후의 역사를 형성하는 방식에서 일종의 ‘서사적 경합’을 이루는 주요한 대당(counterpart, 對當)이다.”(17쪽, 각주 43번) 대당. 어긋나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의지하려는 짝의 한 쪽, 어긋나려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던 짝의 다른 한 쪽. 그 두 쪽이 하나의 짝이 되어 있는 상황. 1960년대 한국 교양소설의 장소가 거기다.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가 서로에게 삼투되고 충돌하며 길항과 모순을 일으키는 변증법적 관계라는 사실은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재현과 표상의 층위에서만 취급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29쪽) 재현과 표상의 층위 아래에서, 또는 그 위에서 그 층위를 규정짓고 그 층위를 밀어붙이는 다른 층위, 이른바 ‘정치적 무의식’의 층위에 대한 분석이 요청된다는 것. 헤겔의 ‘교양’, 모레티의 ‘교양중편’에 이어, 그것들을 재합성하는 알튀세르/제임슨의 ‘세 가지 인과성 분석’이 방법론으로 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교양소설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상황과 조건을 하위텍스트로 삼아 그것이 실제로 실행되고 상연될 때의 모순, 분열, 합리화의 다양한 기제를 이데올로기적 봉쇄전략으로 파악하고, 교양소설이 그에 대한 상징적이고도 상상적인 해결책으로 작동하되 교양소설 그 자체도 이데올로기적 봉쇄전략에 노출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32쪽)
혁명과 문학의 관계. 다시 말해 혁명의 사건과, 그 사건의 자장 안에서 의식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문학의 내재적 관련. 4·19 혁명의 아래부터의 힘과 그 힘에 근거해 수행된 그 힘의 재현으로서의 당대 교양소설. 그 젊음의 서사, 그 자기형성 서사의 정치적 무의식이 조국근대화의 기관차로서의 5·16 군부쿠데타가 스스로를 표상하는 젊음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합수하고 어떻게 이반하는가에 대한 질문. 5·16은 4·19 혁명을 모방하고 전용한, 다시 말해 4·19를 내재적으로 타고 들어가 4·19를 중단시킨 내파로서의 반혁명이었다. 4·19 혁명과 그 젊은 힘의 재현으로서의 당대 교양소설은 그런 5·16과 자신을 엄격하게 준별하려고 했으나, 바로 그 분별의 의지를 올라타고 5·16이라는 청년성, 그 성장·육성·함양·발달로서의 근대화 이데올로기는 한 사회를 모조리 석권한다. 이른바, (탈)연루. 그 역설과 배리. 복도훈의 ‘교양’이란 무엇인가. 바로 그 역설과 배리를 파고드는 방법, 고안된 해부칼이다.
그같은 모순과 역리의 장을 근거로, 한국 교양소설은 4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당대의 압축 근대화에 봉헌하는 이데올로기적 보철물로서의 젊음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 최인훈, ‘비판적 소설로서의 교양소설’. 둘째, 교양의 인간이 속물적 삶의 상태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고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지와 표현, 다시 말해 ‘아이러니(irony)’적 유희의 정신. 김승옥, ‘아이러니 소설로서의 교양소설’. 셋째, 근대라는 항구적 쇄신, 그 이동성(이행성)과 내면성, 그 유동성에 대한 분석과 해부(anatomy)로서의 교양소설. 그것은 동시에 그런 유동적 도상(途上)에서의 불안과 혼란이 소설의 미완성 형식으로 표출되는 피카레스크(picaresca) 소설과 맞닿는다. 박태순, ‘아나토미와 피카레스크 소설로서의 교양소설’. 넷째, 젊음을 삶의 다른 형태보다 특권화하면서도, 그 젊음을 삶의 보편적이고 목적론적인 상태로, 예컨대 공동체에 대한 재발견·재이해로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비판하는 교양소설. 김원일 또는 이동하, ‘자기형성 소설로서의 교양소설’.
그런 네 개의 분류 혹은 분포를 승인하면서도, 그 분류법의 공정을 비판적 무기로 재가공하게 하는 힘 있는 문장들을 더 찾으려 애썼고, 찾았다. 그렇게 찾은 그 문장들 속에 들어있던 ‘환영(phantom)의 젊음’이라는 개념은 내게 청년 이상(李箱)의 문학적 의지와 그 좌초를, 그러니까 스스로를 ‘악령’이라고 말했던 조로의 청년 이상에 대한 사고를 다시 촉발시키는 것이었다. 인용해 놓는다: “보통 유럽교양소설은 이윤추구 위주의 경제활동으로 인해 결여된 문화적 소양의 능력, 즉 교양을 보충할 수 있는 중산계급의 문학적 표현에 가깝다. 그런데 1960년대 한국 교양소설은 젊음의 자기 형성과정이 압축성장의 압도적인 논리에 의해 소외됨에 따라 위축되고 경화된 특징을 내포하면서 일종의 반(反)성장, 반교양의 형식을 띠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반교양소설에서 젊음은 성숙을 멈추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 젊음은 성숙을 멈춘다는 데서 미성숙해보이지만 세상의 이치가 강요하는 성숙을 거부한다는 데서 반드시 미성숙하지만은 않은 젊음이다. 따라서 이러한 젊음은 그 실체와 귀속이 도무지 불분명해 보이는 환영(phantom) 같은 특징을 띠게 된다. 성숙과 미성숙의 회로를 벗어나는 젊음을 ‘환영의 젊음’으로 지칭할 수 있다면, ‘환영의 젊음’은 1960년대 한국 교양소설에서 젊음의 특수성을 수식하는 중요한 어휘가 될 것이다.”(33쪽)
다시, 혁명과 문학의 관계. 그 관계에 상응하는 다른 어떤 말이어도 좋겠다. 그 고색창연한 주제, 그 오래된 새것의 문제계가 오늘 필요하고 가능한 하나의 비판적 ‘의제’로서 다시 이월되고 다르게 가동되어야 한다는 촉구 혹은 설득. 그것이 복도훈의 논문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