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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만큼 자라는 아이들
박혜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 어머니는 과연 그랬을까. 자꾸만 우리 엄마와 나를, 박혜란과 그녀의 아이들과 비교를 하게 된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직장에 다니셨다. 내가 과제는 잘 해 가는지, 학교 생활은 어떤지, 친구들과 사이는 좋은지에 대해 일일이 묻지는 않으셨다. 심지어 친구랑 싸워서 학교를 그만둘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셔도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성적표에 도장도 내 손으로 직접 찍었다.

자모회 입회 권유에는 눈길 한 번 안 주시고, 중3이 되어 입시 상담을 받으러 학교에 가실 때까지는 일부러 절대 선생님을 뵌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이렇게 무관심한 행동은 저녁에 들어오시면서 하시는 “학교 잘 갔다왔니? 공부는 열심히 했어?” 라는 애정어린 말로 충분히 보상이 되었다. 그리곤 나를 꼭 안았다고 내려놓으셨다. 나는 박혜란의 그 무덤덤하고, 요즘 엄마들이 보기에 아주 위험성 높은 ‘아이 멋대로’의 교육철학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그녀는 책 마지막 즈음에 자신이 그런 착한 아이들을 둔 것을 ‘인복’으로 여긴다고 하나, 나는 그것이 그녀의 성격과 가치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녀는 아이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존중한다. 그러나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한다. 여기에서 아이들은 자신감과 겸손함을 두루 갖추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엄마로서 한 일 중 가장 훌륭한 것은 든든한 대들보가 되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중심이 되어 흔들리지 않고 강하게 서 있을 때, 세파에 이러저리 부딪치고 시달려 난파된 아이들이 그 중심에 모여 다시 치료를 받고 거친 항해를 떠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충돌을 염려하지만 엄마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충돌을 안 받게 미리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더 험난하게 다가올지 모르는 더 큰 충돌을 맞설 수 있게 안식처가 되어서 치료를 해주는 것이다.

박혜란은 그것을 능히 해내었고,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한 아이들을 키워냈다. 난 그들이 서울대에 들어간 것에 대해 찬탄을 보내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왜 그렇게 해야하는 지를 그 어린 나이에 깨닫게 만든 그 어머니의 위대한 힘에 경외감을 느낀다. 자기들이 알아서 컸다고 하지만, 그녀가 원래 착한 아이들을 얻은 복이 있다고 하지만,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알며 큰 데에는 ‘엄마의 전적인 믿음’이라는 큰 후원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믿었다. 너희들의 인생은 너희가 가장 잘 할 것이다. 아이들은 믿는 만큼 자란다. 그녀가 전폭적으로 믿은 만큼 그만큼 아이들도 아주 멋지게 자란 것이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이 짧은 문장 속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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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멋대로 책을 평가하는 기준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글의 말투가 얼마나 이해되기 쉽게 쓰였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글의 내용이 논리적이고, 상투적이지 않고, 중복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태일 평전」은 두 가지 모두 거의 만점이다. 지은이는 전태일의 생애를 설명하면서,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평을 한다. 그래서 독자를, 이해를 넘어서 그를 동정하고 연민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그와 함께 노동현장으로 뛰어 들어 가게 한다. 중간 중간에 전태일의 일기의 시기적절한 삽입도 글의 짜임새를 더욱 단단하게 한다.

책은 전태일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차례대로 나열하고 있는데, 단순한 생애가 읊어지는 가 싶다가 결국에는 그의 영원한 관심사인 노동문제로 귀결되는 논리적인 면이 돋보인다. 지은이의 말투 또한 학구적이거나 어렵지 않고, 마치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 호흡으로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1960년대 말로 되돌아가 있는 듯하다. 만약 내가 진짜 거기에 서 있다면 나는 과연 전태일의 편에 서겠는가, 아니면 현실의 편에 서겠는가... 그리고는 곧 전태일의 분신자살하는 모습을 평화시장 건물 속 작업실 창문에서 겁에 질려 내다보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된다.

발문을 쓴 장기표씨는 전태일을 예수와 같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절대적인 존재 예수를 한 인간에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나는 동감한다. 가장 천한 자리에 온 예수와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산 전태일. 가난한 사람들의 힘이 되주고, 위로해주며, 마침내는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으신 예수와 전태일. 지금에서야! 전태일을 안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전태일이 세상의 억울함에 못 이겨 자살을 굳게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나이 22살을 훨씬 넘은 나는 너무 좋은(?) 세상을 만난 탓일까... 참으로 한심스럽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를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기쁘다. 세상에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어디 흔할까... 나의 멈춰버린 생각에 윤활류를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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